가장 동시대적인 한국화에 대하여
모던하고 스타일리시한 화풍의 민화로 대중적 사랑과 지지를 받은 김지평 작가. 작품 형식과 주제를 끊임없이 바꾸되 한국화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한다.
최근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동양화과 국제 학술제에서 김지평 작가는 ‘동시대 미술 현장과 방법으로서의 동양화’에 대해 발표했다. 2000년대 이후 동양화의 경향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는데, 정확히 다양한 주제와 기법을 실험해온 아티스트인 만큼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충분한 무게감이 실렸다.
“전통 재료와 소재를 이용한 현대 작품은 한국화, 동양화, 지필묵 회화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하지만 전통과 현대는 결코 대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비현대와 비전통도 있고, 배제된 현대와 배제된 전통도 있습니다. 두 용어 간의 차이나 위계에 집중하지 말고 양쪽에서 누락된 것을 고려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을 직시해야 하는데요. 때로는 전통이 진보적이고, 현대가 그 반대일 수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전통을 현대화해야 한다는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요. 전통이 전근대적이니 현대화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전통에서 현대를 발견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한국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젊은 여성 작가’라는 수식어에 대한 고민도 있다. 전통을 둘러싼 진부함이 부담스럽지만 작가로서 정해진 틀에서 빠져나와야 할 필요성에는 공감한다. 동시에 한국 문화의 위상을 높이되 다른 문화를 배척하는 태도는 지양하고, 다름을 존중해야 한다고 여긴다. 한국 전통문화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지점에서 다른 나라 문화와의 동일성을 발견할 수도 있다. 동남아시아와 인디언 문화에서 익숙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는 것처럼. 김지평 역시 한국적 소재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문화에 두루 관심이 있고, 더 너른 관점에서 생활사와 사상 총체를 공부한다.
“다들 ‘한국적인 것’은 곧 ‘전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한국에만 해당되는 전통은 무엇인지 고려해보기도 했어요. 동북아시아 흐름이 한국에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문화 정체성은 분명 우리에게 맞게 변형됐을 텐데 우리의 문화도 어디론가 흘러가 다른 문화로 변모했겠죠. 프랑스 철학가 프랑수아 줄리앙(François Jullien)의 저서 <문화적 정체성은 없다>를 보면, 동서양의 산수화가 어떻게 다른지, 왜 다른지 말해주는데 정말 흥미로웠어요. 요지는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의 폭을 넓히는 거죠.” 이 책에 동양화에는 왜 누드가 없는지에 대한 설명도 나온다. 누드화가 존재하려면 인간 중심 사회여야 하는데, 동양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누드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심지어 우리나라의 춘화에서도 몸이 주체가 아니고 자연과 조응하지 않았다.
K-컬처의 위상이 대단한 요즘, 미술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2024 광주비엔날레의 주제는 ‘판소리-21세기 사운드스케이프’. 부산비엔날레 역시 한국적 감성을 담은 주제를 발표할 것으로 예견된다. “최근 동양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국가 정체성이 지닌 고유한 매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서구 지성이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미친 영향도 커 보입니다. 환경 파괴와 자본주의로 인해 지구가 위기에 직면했고, 기존 사상의 새로운 대안을 비서구에서 찾으려 하죠. 세계 곳곳의 비엔날레가 지역성과 새로운 공동체 탐구를 중요시하며 미래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고 있어요. 가장 쉽게 이상적인 비전을 발견할 수 있는 비결은 기존 문화를 탐색하는 일이죠.”
김지평은 새로운 주제와 형식을 시도하는 일에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 초기에는 민화와 전통 장식을 현대적으로 승화시킨 정교한 작품을 선보여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이런 화풍을 10여 년간 지속하다 보니 한계를 느꼈고, 주제를 넓히자 자유를 얻게 됐다. 2013년 가나아트에서 열린 개인전 <찬란한 결>을 준비하며 맞이한 변화로, 당시 개명까지 선언했다. 물론 ‘김지혜’로 알려진 이름을 어린 시절에 사용하던 ‘김지평’으로 바꾼 것이 작품 세계의 확장과 직접적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름을 바꾸며 자유를 더 느낀 것은 사실이다.
<찬란한 결>은 이전과는 다르게 부서진 책가도이자 무덤을 뜻하는 ‘춘연지묘’ 등을 선보이며, 작품 세계의 대전환을 예고했다. 한국화 재료를 사용한 작품뿐 아니라 부적화, 불교화, 민간 신앙 회화 등을 참고한 작품이 줄줄이 호평받았고, 이후에는 작품을 모아서 전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를 정해서 그에 맞는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프로필에서 특히 관심 가는 부분은 2017년 합정지구에서 선보인 <재녀덕고(才女德高)>다. ‘재녀덕고’는 중국 미술가 양옌핑의 1990년 작품에서 인용한 이름으로, ‘재기 있는 여성은 덕이 높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가부장적인 유교에서 ‘재능이 부족한 여성이 덕이 있다’고 칭송하던 상황을 비판하는 의도를 품고 있기도 하다. “한국화와 관련된 역사를 들여다보면 과거에는 서로 교류하며 생각을 나누려고 그림을 그렸더군요. 모든 것은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았고요.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스승으로 삼아야 하나, 고민에 빠졌습니다. 한국화에서는 여성 작가의 계보가 부재하고, 여성 작가로 알려진 이는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정도가 전부였으니까요. 동시에 예술가의 재능이란 무엇인지 고민하며, 양옌핑의 글자와 박이소 작가의 드로잉을 합친 오마주 작품 ‘무제’를 선보였습니다. 남녀 구분을 떠나 순수하게 재능을 탐구하고 동양화의 전통을 전복하려는 의미가 담긴 전시였습니다.”
조선 시대에 여성의 재능은 분방하고, 요상하고, 음란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지평은 유교에서 금기시한 것들을 붉은색을 띠는 광물 경면주사로 채색한 문자도(민화의 한 종류로 한자와 그 의미를 형상화한 그림)로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의 여성은 모두 가부장제의 희생양이었다는 이분법 역시 위험하다. 민간이나 무속 신앙, 모계사회의 전통은 지금보다 더 개방적인 여성성을 추구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 여성이 갖지 못한 자유를 과거에서 찾을 수도 있고, 스스로 가부장이 된 여성도 있었다.
김지평의 도전 의식은 보안여관에서 열린 <먼 곳에서 온 친구들>(2020)과 인디프레스에서 선보인 개인전 <없는 그림(Paintings Lost)>(2023)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전시명이자 작품 제목이기도 한 ‘없는 그림’은 말 그대로 ‘없는 그림’이다. 텅 빈 유리관 벽면에 유실된 미술 작품에 대한 글이 실크스크린으로 새겨진 작품은 우리의 상상력을 돋우지만, 그 작품이 무엇인지 관객은 볼 수 없다. 신사임당의 산수화는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그에 대한 찬사는 여전히 회자되는 것처럼. 또한 김지평은 전시장에 그림은 없지만 화려한 빛깔을 자랑하는 병풍도 함께 선보였다. “황룡사 벽에 그린 솔거의 노송, 안견의 대나무 그림, 공민왕의 초상화 등은 소실되어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여러 문헌에 기록은 남아 있습니다. 신사임당의 산수화 족자 두 점은 그림의 안료는 사라졌지만, 그 얼룩만으로도 훌륭한 현대미술처럼 보입니다. 그녀의 그림을 예찬한 소세양의 시만 남아 있죠.”
<먼 곳에서 온 친구들>은 그림 외의 것, 즉 병풍과 족자, 장식과 문자가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도발적 전시였다. 한편으로는 이 전시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서양 소설 속 여주인공 레베카(Rebecca), 버사(Bertha), 카르밀라(Carmilla)의 이름을 작품 제목으로 앞세운 족자는 모두 이들의 외형을 형상화한 작업이다. 또한 ‘능파미보(凌波微步)’는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10인의 여성 문인 숙선, 호연재, 옥봉, 매창, 사주당, 금원, 청창, 난설헌, 운초, 빙허각이 지은 글을 각각 한 폭의 병풍으로 시각화했다. 하지만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덧대는 장식인 형형색색의 장황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이들 여성 문인은 대부분 타고난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자취를 감춘 인물로 김지평은 활자로만 남아 있는 이들의 존재를 그림을 배제한 채 형상화한 것이다. 동시에 여성 한국 화가로서 현대를 살아가는 자신이 지닌 고민까지 담아냈다.
박물관의 서문을 읽는 듯한 그녀의 작품 세계에서 유추할 수 있듯 김지평에게 리서치는 지극히 일상적인 작업이다. 도서관과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도판과 고서 역시 그녀에겐 소중한 영감이 된다. 불교 도판처럼 오래된 문서와 사진은 화질이 좋지 않은데 오히려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남다른 탐구 정신의 소유자인 김지평은 관악구 신림동에 자리한 대안 공간 산수문화를 2016년부터 6년 동안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동료 작가들과 함께 동북아시아 문화에 대해 토론하기를 즐겼지만 아쉽게도 코로나19 이후 무기한 휴관 상태다.
“머지않아 <김지평 작가 연구>라는 신간을 발간하려 합니다. 아르코의 지원을 받아 전문가 7인의 비평을 엮은 최초의 연구서죠. 소설가,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 등이 참여해 다채로운 관점에서 저의 작품을 살펴볼 수 있기에 정말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국화는 아직 저평가되고 있다. 전통을 바라보는 새로운 프레임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김지평은 시대착오가 현대에 대한 의구심을 표현하기에 적절하다고 본다. 의도적인 시대착오는 동시대를 반성하는 독특한 방법론이 될지도 모른다. (VK)
- 피처 에디터
- 류가영
- 글
- 이소영
- 사진
- 김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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