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뉴스

존 갈리아노와 마크 제이콥스, 노병은 죽지 않는다

2024.02.07

by 안건호

    존 갈리아노와 마크 제이콥스, 노병은 죽지 않는다

    존 갈리아노와 마크 제이콥스가 돌아왔습니다. 각자 다른 이유로 부침을 겪은 두 거장이 최근 닮은 듯 다른 쇼를 선보이며 재기에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죠.

    Courtesy of Maison Margiela
    ©Condé Nast / Horst Estate

    마르지엘라의 2024 S/S 꾸뛰르 컬렉션부터 볼까요? 쇼가 끝난 지 2주가 채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역사에 남을 꾸뛰르 쇼’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있을 때부터 존 갈리아노의 특기였던 상상 속 세계를 런웨이에 구현하는 능력이 다시 한번 발휘된 덕분이죠. 존 갈리아노는 컬렉션에 예술적인 레퍼런스를 숨겨놓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안개가 짙게 드리운 쇼장은 파리의 밤을 기록한 포토그래퍼, 브라사이의 사진을 닮아 있었습니다. 쇼의 시작을 알린 모델 레온 데임이 입고 있던 코르셋은 호르스트 P. 호르스트의 이미지에서 영감을 받은 듯했고요.

    Courtesy of Maison Margiela
    Courtesy of Maison Margiela
    Courtesy of Maison Margiela

    실루엣 역시 눈에 들어왔습니다. 대부분의 모델이 코르셋 끈을 과할 정도로 꽉 졸라매고 있었거든요. 비현실적으로 잘록하던 허리 라인은 부풀어 오른 듯한 모양의 재킷, 스커트, 코트와 직접적인 대조를 이뤘습니다. 새롭고 낯선 실루엣을 선보이기 위한 존 갈리아노의 선택이었죠.

    Getty Images

    존 갈리아노의 쇼가 끝나고 정확히 8일 뒤, 마크 제이콥스 역시 2024 S/S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그 역시 존 갈리아노처럼 이번 컬렉션을 위해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는데요. 둘의 방향성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마르지엘라의 베뉴가 20세기 초반, 파리 골목길의 식당을 연상시켰다면 마크 제이콥스의 베뉴는 ‘인형의 집’ 그 자체였죠. 그가 선택한 장소는 바로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파크 애비뉴 아모리(Park Avenue Armory). 한때 무기고로 쓰이기도 했던 건물 안에는 비현실적인 크기의 의자와 책상이 배치되어 있었고, 모델들은 종이 인형처럼 딱딱하고 절제된 워킹을 선보였죠. 모델들이 몸을 비틀고 얼굴을 감싸 쥐며 연기를 이어간 마르지엘라의 쇼와 완벽한 대조를 이뤘습니다.

    Courtesy of Marc Jacobs
    Courtesy of Marc Jacobs
    Courtesy of Marc Jacobs

    잔혹 동화를 그려낸 존 갈리아노, 그리고 환상 동화를 그려낸 마크 제이콥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 공통점도 있었습니다. 마크 제이콥스의 쇼에서도 실루엣과 프로포션이 핵심 역할을 했거든요. 과장된 어깨 라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양옆으로 늘린 듯 독특한 디자인의 치마를 입은 덕에 모델들의 얇은 허리가 더 부각되기도 했고요. 서로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상상력을 발휘해, 전에 없던 실루엣을 창조해낸 것입니다.

    Courtesy of Maison Margiela
    Courtesy of Maison Margiela

    공통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쇼의 컨셉에 완전히 들어맞는 헤어와 메이크업에서는 두 거장의 관록이 느껴졌죠. 마르지엘라의 쇼에 등장한 모델들은 하나같이 도자기처럼 매끈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설적인 메이크업 아티스트, 팻 맥그라스의 작품이었죠. 그는 섬뜩할 정도로 창백한 얼굴에 약간의 색조 화장을 얹으며 쇼에 비현실성을 더했습니다.

    Courtesy of Marc Jacobs
    Courtesy of Marc Jacobs

    마크 제이콥스 쇼의 메이크업을 담당한 다이앤 켄달은 바비 인형 같은 느낌을 연출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피붓결은 플라스틱 같았고, 두껍게 칠한 마스카라는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죠. 스프레이 한 통은 족히 뿌린 듯한 헤어 역시 큰 역할을 했고요.

    환갑이 넘은 두 베테랑의 쇼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다 보니, 그들의 삶이 묘하게 닮아 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존 갈리아노와 마크 제이콥스 모두 아주 어린 나이부터 주목받았다는 점. 브라운스가 존 갈리아노의 졸업 컬렉션을 통째로 구매했고, 마크 제이콥스 역시 파슨스에 재학하던 때부터 수많은 상을 휩쓸었으니까요.

    첫 번째 위기를 맞이한 뒤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됐다는 점도 동일합니다. 1994년 재정난에 허덕이던 존 갈리아노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컬렉션을 선보입니다. 당시 런웨이를 걸은 모델들에게 줄 돈조차 없었던 그는 1년 뒤, 지방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죠. 마크 제이콥스 역시 페리 엘리스의 1993 S/S 컬렉션을 선보인 후 많은 비판에 직면합니다. 결국 컬렉션 이후 브랜드에서 해고당하지만, 5년 뒤 루이 비통 제국의 수장이 되죠.

    그 후 둘의 경력이 탄탄대로였던 것도 아닙니다. 2011년 인종차별적 발언을 쏟아내는 모습이 공개된 후 존 갈리아노는 긴 휴식 기간을 가져야만 했죠. 마크 제이콥스 역시 루이 비통을 떠난 뒤 주류에서 멀어졌다는 평가를 받곤 했습니다. 2018년 <뉴욕 타임스>는 아예 “마크 제이콥스는 어떻게 뒤처지게 됐나?”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행했고요.

    마크 제이콥스는 올해로 브랜드 창립 4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존 갈리아노 역시 올해로 마르지엘라의 지휘봉을 잡은 지 10년이 됐고,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하이 앤 로우(High & Low)> 역시 공개를 앞두고 있죠. 일제히 성공적인 쇼를 선보이며, 패션계의 정중앙에 다시 서게 된 마크 제이콥스와 존 갈리아노에게 어느 때보다 많은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 두 베테랑이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갈지 우리 모두 유심히 지켜봐야겠습니다. 노병은 죽지 않으니까요.

    사진
    Getty Images, GoRunway,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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