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미니멀리즘, 왜 하필 지금 유행일까?

2024.02.12

by 안건호

  • Alexandre Marain

미니멀리즘, 왜 하필 지금 유행일까?

‘Y2K’로 대표되는 키치한 2000년대 스타일이 가고, 미니멀리즘의 시대가 왔습니다. 디자이너들 역시 다시 옷의 본질로 회귀하고 있죠. 질 샌더나 케이트, 더 로우처럼 몇 년째 꾸준히 블레이저, 펜슬 스커트, 탱크 톱, 트렌치 코트 등을 변주하며 기본에 충실하던 브랜드도 빼놓을 수 없고요.

피터 도의 2024 F/W 컬렉션 피날레. Getty Images

‘미니멀리즘 열풍’에 불씨를 제대로 지핀 사건은 헬무트 랭의 피터 도 선임이었습니다. 그는 데뷔 컬렉션에서 하우스의 창립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그의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죠. 그로부터 약 두 달 뒤, 헬무트 랭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은 피비 파일로가 긴 침묵을 깨고 돌아왔습니다. 빅토리아 베컴과 크리스토퍼 에스버처럼 미니멀 스타일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는 디자이너 역시 출현했고요.

<그리페(Griffé)> 매거진의 공동 창립자 살로메 뒤드멘(Salomé Dudemaine)은 점점 더 많은 디자이너와 셀럽이 1990년대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아 룩을 완성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단지 느낌을 흉내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니멀리즘의 전성기 1990년대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동반되고 있다고도 덧붙였죠. 미우치아 프라다 역시 2024 S/S 컬렉션 직후 “이념과 견해에 관한 이야기는 지겹습니다. 이제 옷 이야기 좀 합시다”라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죠.

Getty Images

대중이 미니멀 스타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따로 있습니다. 지난해 3월, 기네스 팰트로의 ‘법정 룩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죠. 2016년 스키장에서 뺑소니 사고를 냈다는 혐의를 받은 그녀는 법정에 출두하는 내내 얌전하면서도 우아한 룩을 선보였는데요. 더 로우, 프라다, 랄프 로렌 같은 브랜드를 선택한 그녀의 차림새에서는 그 어떤 로고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당시 ‘법정 코어’와 같은 신조어가 잠시 쓰였지만, 지금 뒤돌아보면 기네스 팰트로의 법정 룩은 조용한 럭셔리의 시발점과도 같죠. 그녀의 재판이 이뤄지기 몇 달 전, 앰버 허드의 법정 룩 역시 화제가 됐고요. 논란의 중심에 선 스타들이 일제히 비슷한 느낌의 룩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지나치게 과시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고, 대중에게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위함이죠.

살로메 뒤드멘은 ‘미니멀 스타일’이라는 카테고리가 서구식 귀족주의의 영향 아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무언가를 과시하는 듯한 태도는 ‘귀족적이지 못하다’는 인식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죠. 값비싼 소재, 차분한 컬러와 실루엣으로 완성되는 조용한 럭셔리 역시 마찬가지고요. 아주 오래전부터 미국의 상류사회를 지배한, 백인 개신교도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Getty Images

조용하지만 럭셔리한 룩을 선보인 대표적인 상류층 인물이 바로 캐롤린 베셋 케네디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스타일을 ‘솔직하다(Straightforward)’고 표현했는데요. 공을 전혀 들이지 않은 듯, 멋스러운 스타일을 연출하는 데 그 누구보다 능했던 그녀는 지금도 미니멀 스타일의 아이콘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캐롤린 베셋 케네디의 스타일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책, <CBK: Carolyn Bessette Kennedy, A Life in Fashion>의 작가 수니타 쿠마르 나이르는 그녀의 스타일이 호화롭지 않은 동시에 럭셔리했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그녀는 과도한 레이어링과 액세서리를 꺼리기로 유명했죠. 캐롤린에게는 파워 블레이저, 프릴 장식, 화려한 프린트, 볼드한 주얼리 없이도 힘이 느껴지는 룩을 완성할 수 있는 자신감과 여유가 있었습니다. 존 F. 케네디 주니어와 함께 컴벌랜드섬에서 조촐하게 그리고 매우 그녀답게 치른 결혼식만 봐도 알 수 있죠.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웨딩 데이, 캐롤린은 실크 슬립에 마놀로 블라닉의 힐만 매치했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심플한 차림이었죠.

조용한 럭셔리에서 시작된 지금의 미니멀리즘 트렌드에는 약간의 속물근성이 숨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용어 자체에 ‘럭셔리’라는 단어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예로부터 캐시미어로 짠 심플한 스웨터만큼 시크한 아이템은 없었습니다. 상류층은 언제나 값비싼 아이템을 과시용이 아니라 실제로 입으며 생활하기 위해 구매했고요. 조용한 럭셔리 그리고 미니멀리즘은 언제나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지금 ‘진정한 럭셔리’가 각광받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럭셔리 아이템은 빠르게 소비되는 패스트 패션과 달리 보존 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에르메스의 켈리는 물론 생 로랑이나 프라다의 재킷을 몇 년 입다가 버리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진정한 럭셔리 아이템은 관리만 잘해준다면 자식에게도 물려주며, 환경에도 도움을 줄 수 있죠.

지금 젊은 세대가 어느 때보다 ‘진정성’에 목말라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메리엄-웹스터는 ‘진짜의’를 뜻하는 단어 어센틱(Authentic)을 2023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기도 했죠). 소셜 네트워크에서 유행하는 숏폼과 자기중심적인 콘텐츠를 단순한 소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조용한 럭셔리란 그 모든 공해 속에서 나를 보호해줄 일종의 갑옷일지도 모르겠습니다.

Alexandre Marain
사진
Getty Images
출처
www.vogue.fr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