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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작, 매혹된 자들’의 불완전한 매혹

2024.03.02

by 이숙명

    ‘세작, 매혹된 자들’의 불완전한 매혹

    <세작, 매혹된 자들>은 궁중 사극에 가상 역사를 더한 멜로드라마다. 출연진이 공개된 단계부터 이 드라마가 <철인왕후>(2020) 유의 코믹 사극보다 무게감이 있고 <연인>(2023) 유의 가상 민중사보다 클래식한 작품이라는 짐작이 가능했다. 왕의 혼인과 후사가 권력 투쟁의 핵심으로 그려지는 한국 정통 궁중 사극은 현재 시청자의 성 관념과 거리가 멀다. 시대극임을 고려하고 본대도 피로감은 느낄 수 있다. 이를 아이디어로 돌파한 좋은 사례가 <옷소매 붉은 끝동>(2021)이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왕비가 되기보다 궁녀로 살다가 친구들과 노후를 보내려는 성덕임(이세영)을 내세워 요즘 시청자에게 소구할 만한 동시대성을 확보했다. <세작, 매혹된 자들>은 남장 여자(신세경)와 임금이 우정을 나눈다는 설정으로 함정을 돌파한다. 주인공 커플이 교감하는 매개이자 그들이 적보다 한 수 앞을 내다보는 지략가임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바둑을 활용한 것도 흥미롭다. 과연 <세작, 매혹된 자들>은 정통 사극의 묵직함, 바둑처럼 치열하게 엎치락뒤치락하는 정치 게임을 담고도 대단히 세련된 느낌이 드는 드라마다. 진중한 분위기 때문에 시청률에선 손해를 보았을지 몰라도 그 덕에 멜로의 여운은 깊다. 다만 여운 한쪽에 아쉬움은 남는다.

    tvN ‘세작, 매혹된 자들’
    tvN ‘세작, 매혹된 자들’

    <세작, 매혹된 자들>은 아름다운 의상, 촬영, 노련한 배우들의 앙상블 덕분에 한 장면도 눈이 즐겁지 않은 순간이 없다. 특히 조정석의 존재는 이 드라마의 변칙적 흐름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무기다. 드라마 초반, 그가 연기하는 대군 ‘이인’은 형이자 임금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려 한껏 몸을 낮춘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왕의 유언을 어기고 스스로 왕좌에 오른다. 그 원죄 때문에 왕이 된 후 그의 심리 저변에는 항상 두껍고 은밀한 레이어가 깔려 있다. 대신들에게 폭군처럼 굴 때도 비릿한 굴욕감이 배어 있고, 항상 이중 삼중 노림수를 두고 상대를 시험한다. 이인이 스스로도 두려움, 죄책감, 의구심을 느끼면서 반대하는 대신들에게 칼을 빼 들 때, 조정석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여자인지도 모른 채 사랑에 빠져버렸던 상대 강몽우(신세경)가 유배 길에 실종되었다가 살아 돌아왔을 때, 반가움을 감추고 잔인하게 구는 연기 역시 장관이다. 그가 맨 아래 레이어에 담아둔 인간적인 감정 때문에 이인이 강몽우와 연인이 되는 과정의 절절한 멜로가 설득력을 발한다. 이인의 왕위 찬탈을 도운 후 위세가 등등해졌지만 애정만은 얻지 못해 답답해하는 동상궁 역 박예영은 캐릭터도 신선하고 연기도 재미있다. 궁중 실세인 왕대비 박씨 역 장영남을 비롯해 손현주, 조성하 등도 묵직한 카리스마로 신을 장악한다. 좋은 배우들은 연기만으로도 스펙터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다.

    tvN ‘세작, 매혹된 자들’

    또 다른 주인공 신세경은 연심과 역심 사이에서 방황하는 강몽우 또는 강희수를 매혹적으로 연기한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연기인가는 나중 문제다. 그의 연기는 시청자를 홀려서 이 캐릭터가 드라마의 결정적 허점이라는 사실로부터 눈 돌리게 만든다. 강몽우의 실체는 이인이 가장 믿는 충신의 딸이다. 드라마 초반 내기 바둑꾼이 세작 일당이라고 수배령이 떨어졌을 때 그가 남장을 하고 제 발로 나타나는 대신 잠자코 집에 있었으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었을 거다. 임금의 공식 바둑 친구가 되어 궁에 들어간 뒤로 항상 감시를 받으면서 왜 그리고 어떻게 집에서는 여자로 지내는지도 의문이다. 그의 임시 거처는 방음이 하나도 안 되는 초가인데. 그의 아비는 아무리 세작이 되었다 해도 하나뿐인 딸이 실종 상태인데 어떻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지, 드라마를 보는 내내 물음표가 자꾸 떠오른다. 청에 시집가는 공주가 가엽다고 신부를 바꿔치기하는 몽우의 전략은 아무리 봐도 무리수다. 임금을 죽이자고 동지들을 모아놓고 저 혼자 갈팡질팡하다 절친의 정혼자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도 의리 없는 짓이고, 그의 캐릭터와 맞지 않는다. 영화 <색, 계>(2007)에서 탕웨이가 양조위의 암살을 막아준 건 애초 그녀의 의도가 치기 어린 것이었기에 납득이 가는데 희수가 동지를 임금 암살범으로 만들어놓고 막판에 대신 칼을 맞은 건 죽은 친구를 두 번 죽이는 짓일 뿐이다. 드라마니까 일일이 따지지 말자고 하기엔 공들인 탑의 이 구멍 하나가 아깝다. 다행히 그 구멍은 아름다운 커튼으로 가리워져 있다. 배우의 힘이 크다.

    tvN ‘세작, 매혹된 자들’

    이렇듯 <세작, 매혹된 자들>은 따져보면 거친 부분이 있는 드라마다. 하지만 매혹이든 미혹이든 기꺼이 당해주고 싶을 만큼 장점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진한 멜로가 그리운 시청자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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