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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여왕’ 결혼은 정말 사랑의 무덤일까?

2024.03.21

by 이숙명

    ‘눈물의 여왕’ 결혼은 정말 사랑의 무덤일까?

    <눈물의 여왕> 2화. 재벌가 데릴사위 백현우(김수현)가 푸념한다.
    “사랑해서 결혼하는데 결혼하면 왜 사랑을 안 하지?”
    현우의 친구이자 이혼 전문 변호사 김양기(문태유)가 답한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결혼이 독점 계약이라는 거야. 독점이니까 노력을 안 하잖아. 그럼 실망하고 그러다 싸우고 그러다 나 찾아오고.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사랑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든다는 거지. 사랑을 더 오래하고 싶으면 결혼은 안 하는 게 맞다고 본다.”

    tvN ‘눈물의 여왕’
    tvN ‘눈물의 여왕’
    tvN ‘눈물의 여왕’

    김양기의 관점이 냉소적이기만 한 건 아니다. 백현우는 이혼을 결심했다가 아내 홍해인(김지원)이 중병에 걸린 사실을 알자 ‘신이 내린 안전 이별’ 기회라고 좋아한다. 김양기는 그에게 기왕 이렇게 된 거, 해인이 다시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서 유산을 받아내라고 조언한다. 그런데 어떻게? 김양기의 이론은 이렇다. “우리 어렸을 때 생존 수영 배우잖아. 그리고 몇십 년을 안 해. 근데 갑자기 물에 빠진다? 그래도 다 한다니까, 수영을. 다 잊어버린 것 같아도 온몸의 근육이 기억한다고. 사랑도 그래요. 다 까먹은 것 같아도 막상 하잖아? 마음의 근육이 기억하고 있어요.”

    드라마의 주제와 방향은 이 문답에서 모두 나왔다. <눈물의 여왕>은 힘든 결혼 생활 때문에 사랑을 잊어버린 홍해인과 백현우가 초심을 되찾는 과정을 그린다. 막장 재벌가 이야기, 그 집안에 원한이 있어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 시한부 주인공은 단순 클리셰가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로 영리하게 활용된다. 예컨대 이 드라마에서 홍해인이 재벌이라는 설정은 부부 성 역할과 권력관계가 도치된 상황, 사랑해서 결혼한 두 사람이 서로 거리감을 갖게 된 이유, 홍해인의 무자비하고 이기적인 성격, 잘생기고 똑똑해서 멜로드라마 주인공으로 손색없지만 남성성은 억제되어 안전한 느낌을 주는 백현우 캐릭터와 잘 맞물린다. 홍해인이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일은 백현우로 하여금 앞서 김양기가 역설한 ‘노력’이란 걸 시도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퀸즈 그룹을 노리는 악당이자 해인의 전 애인 윤은성(박성훈)은 해인에 대한 백현우의 독점을 위태롭게 만들어서 노력의 동기를 강화시킨다.

    tvN ‘눈물의 여왕’

    이 드라마에서 ‘재벌’이라는 해인의 신분이 작동하는 방식은 꽤 흥미롭다. “고작 80억”이라든가 “내가 거기 건물이 있었나?” 따위 대사가 심상하게 오가는 이 세계에서는 돈, 미래, 사회적 위상에 대한 불안과 매일의 바둥거림이 합리적으로 삭제된다. 현실 한국 가정의 가장 큰 위협 요소가 제거된 가상의 공간에서 주인공들은 노력이 사랑에 미치는 영향을 대리 체험해 보인다. 실험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 주요 변인을 통제한 상황이랄까.

    큰 변수가 한 가지 남아 있긴 하다. 파티장에서 만난 해인의 부자 지인은 자기들 기준 볼품없는 집안 아들과 결혼한 해인을 비웃는다. 결혼은 신분 맞는 사람끼리 해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거라고. 해인은 자기 남편의 “얼굴만 봐도 재미있어서” 같은 곳을 보기보다 마주 보는 게 좋다고 받아친다. 인간이라는 영장류의 대부분은 김수현이나 김지원만큼 재미있는 얼굴을 가지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한 번 사랑에 빠졌던 상대라면 취향에 맞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니 다시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는 가설은 설득력이 있다. 한 번 실망하고 싫어해봤기에 다시 실패하기도 그만큼 쉽겠지만.

    드라마 초반, 아내를 유혹하기 위해 노력하는 백현우의 모습은 우리가 알면서도 자주 잊어버리는 관계의 법칙을 상기시킨다. 감정을 연기하는 일은 실제 그 감정에 도달하는 데 도움을 준다. 괜찮은 척, 행복한 척, 사랑하는 척하는 일은 때로 실패로 끝나고, 때로 위선이라 모함받는다. 실제보다 좋은 사람인 척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이 때로는 변화의 씨앗을 심고 성장시키는 일이 되기도 하고, 자신마저 설득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특히 관계에서라면 그렇다. 피곤해서 튀어나온 섭섭한 말 한마디를 더 섭섭한 말로 받아치고, 외부 요인으로 인한 잠깐의 냉담함을 냉담함으로 받아치고, 무신경한 행동 하나를 티 안 나는 작은 공격으로 보복하는 식의 치킨 게임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관계를 무너뜨린다. 반면 사랑을 확신시켜주는 말 한마디가 다정한 행동을, 다정한 행동이 더 큰 사랑의 감정을 불러오기도 한다. 이미 깊어지기 시작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중단시키거나, 새로운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려면 누군가는 먼저 노력을 해야 한다. <눈물의 여왕>에서는 백현우가 불순한 의도로 이 역할을 떠맡는다.

    tvN ‘눈물의 여왕’
    tvN ‘눈물의 여왕’

    영어 ‘Love’는 명사이자 동사다. 극 중 백현우는 모처럼 사랑이라는 ‘행위’를 한다. 드라마니까 그의 행위는 감정이나 상태로서의 사랑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이 반드시 현실에서도 작동 가능한 원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서울대 법대 나오고 우리 집에 소가 서른다섯 마리 있고 집도 월세 아니고 전세니까 당신 책임지겠다”고 구애하는 잘생긴 남자나, 그런 순박한 남자에게 반해서 헬기 타고 날아가 집어오는 재벌집 딸보다는 충분히 현실적이다. 드라마라고 웃어넘길 게 아니라, 결혼이라는 무덤을 파묘하지 않고 사랑을 되살리는 방법이 어쩌면 여기 담겨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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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N ‘눈물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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