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물감을 모두 소진하기 위한 미술
현대미술가 김용익은 지난 2018년 12월 31일부터 아주 특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1947년생인 작가가 현재 자신에게 남은 회화 도구, 즉 물감이나 색연필 등을 여생에 모두 소진하겠다고 선언한 겁니다. 그가 쓴 짧은 글에서 이런 문장이 눈에 띄는군요. “하루 평균 4시간씩 작업하며 지금 남아 있는 회구를 아껴 쓰다 보면 그것을 다 소진하는 데 몇 년이 걸릴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 소진되기 전에 병이라도 걸려 생이 끝나려 한다면 남은 회구를 더 서둘러 소진하겠다.” “그러다 보면 말년의 작업은 물감을 두껍고 진하게 바른 것이 되거나, 또 작업 시간도 서둘러 4시간 이상으로 길어질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김용익 작가는 이 야심 찬 계획을 ‘물감 소진 프로젝트’라 명명하며 덧붙입니다. “나의 여생을 소진하는 프로젝트다.”
‘물감 소진 프로젝트’는 4월 21일까지 국제갤러리 부산점과 서울점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는 김용익의 개인전 <아련하고 희미한 유토피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여생과 남은 물감을 동일시하는 미술가의 흥미로운 계획은 당연하게도 작품의 조형적 요소와 방법론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를테면 회구를 오래오래 아껴 써야 하기 때문에 회화의 색은 대체로 흐릿하고 옅으며, 드문드문 색칠이 덜 된 부분도 있습니다. 회구를 다 소진하는 게 목적이니 선호하는 특정 색이나 어울리는 색을 골라 쓰는 게 아니라 모든 색을 골고루 다 써야 할 겁니다. 또 색을 골고루 쓰려면 기하학적 도형 형태로 그리거나 면을 잘게 나누는 편이 좋겠지요. 그리고 작가는 이 결과물에 ‘망막적 회화로 위장한 개념적 회화’라는 짓궂은 제목을 붙입니다. 즉 여러분이 보시는 이 디자인이 모두 위장이라고 스스로 공표해버린 거죠.
미술가가 자신의 삶과 작업의 보폭을 맞추려는 이런 흥미로운 프로젝트는 사실 김용익 작가이기에 가능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미술의 주요 흐름 속에서 줄곧 독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며, 개념 미술부터 공공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인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당대 미술 세계와 끊임없이 호흡하면서도 한 번도 그 명예로운 세계에 머문 적이 없습니다. 권력화된 미술 제도와 사회에 늘 비평적인 시각을 제시해왔지요. 예컨대 김용익 하면 많은 분이 떠올릴 일명 ‘땡땡이 회화’ 속 동그라미, 즉 모더니즘의 첨병에 선 이 도형은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 허술합니다. 흐릿하거나, 한쪽을 뭉개거나, 텍스트로 방해받거나, 어쨌든 온전하지 않은 형태의 이면에는 미술적으로 일탈함으로써 오히려 우리가 암묵적으로 시인한 모더니즘에 균열을 내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있습니다.
‘물감 소진 프로젝트’에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작가의 열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예술이라는 작업, 작업을 둘러싼 각종 담론, 50여 년 동안 치열히 쌓아 올린 작가 자신의 역사로부터 말이죠. 나의 삶과 예술이 함께 종말을 맞이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혹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는 오늘도 여전히 남은 물감을 팔레트에 풀고 붓을 듭니다. 이 물감이 소진되는 순간 삶도 끝났으면 좋겠다는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말이죠. 평생 미술의 본질과 예술의 역할을 고민해온 작가는 그 답을 이렇게 자신의 삶과 예술의 간극을 좁히려는 노력으로 찾아내려 합니다. 그러므로 제목 ‘아련하고 희미한 유토피아’는 존재하지도 않는 유토피아를 향해 줄기차게 뛰던 소싯적의 기억과 모든 것이 허상임을 안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는 미련, 그 엄청난 과오와 희망을 솔직히 인정하는 작가의 용기와 실천에 대한 단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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