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400년 된 저택에 사는 여자

2024.04.02

by 김나랑

    400년 된 저택에 사는 여자

    400년 된 글린 사이워치 저택을 구입해 조심스럽게 리모델링을 마친 아만다 할레치가 가족과 친구들을 불러 모아 봄맞이 파티를 열었다.

    유서 깊은 글린 사이워치의 전경. 화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작가 엘리스 윈 등 문화 인사들이 머물며 작업하기도 했다.

    맨 처음 글린 사이워치(Glyn Cywarch)를 방문했을 때는 당시 약혼자 프란시스(Francis)와 함께였다. 아마 1984년이었을 것이다. 슈롭셔에 있는 우리 집에서부터 할레치 마을까지 두 산맥을 가로질러 운전해 갔다.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어찌나 낭만적인지 쉴 새 없이 감탄했다. 스노든산과 깊은 골짜기를 지나 구불구불한 산맥이 계속 펼쳐졌고 새파란 바다까지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끝에, 저 멀리 남서쪽 곶 위로 빠진 치아처럼 우뚝 선 할레치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택에는 라임나무 길이 있다. 반대쪽에 텃밭을 일구고, 1,900만㎡(약 600만 평)의 땅을 농부들과 공유할 계획이다. 부지 관리를 위해 집을 임대하거나 이벤트용으로 대여하고 있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은 차고 넘친다.

    윌리엄 데이비드 옴스비 고어(William David Ormsby Gore) 제5대 남작 할레치(친구들은 그냥 데이비드라고 부른다)와 그의 아내 파멜라 할레치(Pamela Harlech)가 우리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 나는 그 모든 상황에 다소 당황했다. 파멜라는 1616년부터 가족 소유인 글린 사이워치의 고저택을 1970년대에 새로 단장하면서 털이 긴 카펫과 윤기 나는 목재, 은으로 그곳을 가득 채웠다. 아주 편안한 느낌이었다. 개성과 역사, 따스함이 공존하는 태피스트리 같은 느낌이었달까.

    모델 엘라 리처즈(Ella Richards)가 입은 붉은색 드레스는 펜디(Fendi). 2등급 건축 유산으로 리모델링이 쉽지 않았지만 바닥에 난방 배관을 깔고 광택이 나는 콘크리트를 시공했으며 꽃으로 장식했다.

    프란시스와 나는 1986년에 결혼해 아들 자셋(Jasset)과 딸 탈룰라(Tallulah)를 낳았다. 그리고 1년의 거의 절반은 웨일스에서 보냈다. 크리스마스, 부활절, 여름엔 항상 그곳에 있었다. 슬프게도 1985년에 프란시스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집은 우리에게 넘어왔지만, 산더미 같은 상속세와 그것을 마련해야 하는 어려움도 함께 찾아왔다. 하지만 그 문제는 프란시스에게 맡겨두고 나는 주로 글린 사이워치를 집으로 만드는 데 신경 썼다.

    산과 해변이 조화를 이루는 글린 사이워치는 동화 속 세상 같다.

    우리는 집에 친구들을 잔뜩 초대하곤 했다. 매번 친구들을 위한 잠자리를 마련하고 아침 먹기 전에 해변에 내려갔다가 피크닉을 하러 폭포로 올라가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호텔을 경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숲이나 총안을 갖춘 작은 건물 곳곳에서 부활절 달걀 찾기를 하다가 숨겨진 비밀 공간을 찾아내곤 했다. 정말 짜릿하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영국 <보그> 에디터 티시 와인스톡(Tish Weinstock)과 모델 엘라 리처즈는 이곳에서 신나게 화보 촬영을 했다. 그들이 기대선 돌 하나에도 수 세기의 흔적이 묻어 있다. 드레스는 스탠딩 그라운드(Standing Ground).

    한번은 친구들이 전부 집에 모였을 때 내 친구 테사 트래거(Tessa Traeger)가 찍은 사진을 프랑카 소짜니(Franca Sozzani)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사진 속에서 우리는 모두 멋지게 차려입고 머리에 나뭇가지를 얹은 채 숲으로 가고 있었는데, 프랑카는 그 모습에서 다분히 브루스 웨버 같은 자유와 영원한 동심을 본 것 같았다. 그렇게 프랑카는 우리 집에 와서 가족, 친구들, 말과 개를 사진으로 남겨 1997년 이탈리아 <보그>에 소개했다. 웨일스에서는 늘 그렇듯 끊임없이 비가 내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끌로에(Chloé) 드레스를 입은 리처즈와 샤르베(Charvet) 파자마를 입은 탈룰라.

    2016년 프란시스가 세상을 떠난 뒤 집은 자셋에게 상속됐다. 언젠가 그에게 오래전부터 여기 살아온 가문과 강하게 연결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곳 돌계단에는 수 세대에 걸친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고, 이 땅은 소중하게 관리되어왔다. 대체 불가한 곳이다. 그래서 프란시스는 세무 당국에 상속세를 지불한 뒤(2017년 본햄스 경매에 수많은 가구와 예술 작품, 보석을 팔아 돈을 마련했다) 부지의 소유권을 유지하고 당시 아주 좋지 않은 상태였던 저택을 복구했다. 그간 화재와 수해도 있었고 건물 내부에 덩굴이 자라는 등 별의별 문제가 다 있었다. 우리 저택은 유적지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2등급 건축 유산이었다. 누군가는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했다.

    디자이너 미란다 브룩스(Miranda Brooks)는 자기가 기르는 강아지 쿠쿠와 함께 왔다. 플라이엘 피아노(할레치에 따르면 “쇼팽이나 드뷔시를 연주할 때 제격”이라고), 슈롭셔에 자리한 할레치의 집에 있는 것과 똑같이 만든 벽등이 눈에 띈다.
    2등급 건축 유산으로 리모델링이 쉽지 않았지만 바닥에 광택이 나는 콘크리트 등을 시공했으며 꽃으로 장식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바뀌었을까? 저택의 웅장한 정면은 그 모습 그대로지만 깨끗하게 보수를 마쳤다. 내부는 매우 많이 달라졌다. 다만 제임스 1세 때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미 1970년대 감성이 잔뜩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2등급 건축 유산은 지역 당국의 동의 없이 함부로 개조하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50년 전에 방의 판석을 뜯어내고 콘크리트 위 마룻바닥으로 교체했다면, 이번에는 바닥에 난방 배관을 깔고 멋지게 광택이 나는 콘크리트를 얹자는 게 우리의 아이디어였다.

    아만다 할레치의 사랑스러운 가족 사진.

    자셋, 탈룰라와 나는 강한 열정과 순수함을 가지고 집을 개조했다. 자셋이 재정 관리와 지붕 수리 같은 굵직굵직한 외부 요소를 담당했다.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집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결정은 더없이 탁월했다. 지금 이 집은 순전히 폭포에 설치된 열펌프로만 난방이 된다. 탈룰라와 나는 인테리어를 맡았는데, 오로지 우리의 비전과 느낌만 믿기로 했다. 한정된 예산이었지만 느슨하게나마 우아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걸 정확하게 선택해야 했다. 수도꼭지 하나, 욕조 하나, 샤워기 하나까지 전부 다 말이다. 엣시(Etsy)에서 굉장히 많은 걸 샀다.

    행랑의 문을 통해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 결과는 정말 자랑스럽다. 곡선 유리창이 있는 연회장이 다시없이 마음에 든다. 우리가 엘리자베스 방이라고 부르는 방에 아름다운 펜디 매트리스가 있었는데 그걸 활용하고 싶어서 친구에게 제임스 1세 스타일의 조각을 사용해 침대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조각도 애초에 기둥 4개짜리 침대에 붙은 걸 떼낸 것이다. 나는 작가 엘리스 윈(Ellis Wynne)이 한때 이곳에서 집필할 때 쓰던 방을 좋아한다. 우리 생각에 그 방 벽에 그려진 용과 꽃 그림도 그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노출된 기둥과 서까래 아래 수도 없이 많은 가방과 바구니로 들어찬 다락 공간도 정리해 요가실로 바꾸었다. 벽난로가 있는 다이닝 룸을 참 좋아하는데, 긴 방에도 벽난로가 2개나 있다.

    정원에서 꺾어온 꽃.

    친구 사라 허즈번드(Sarah Husband)는 조그만 비밀 공간이 있는 아주 낭만적인 정원을 꾸며주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있었던 것 같은 그런 비밀 공간이다. 울타리를 두른 정원에는 아주 오래된 사과나무 몇 그루와 라임나무 길이 있는데, 정원 한쪽에 야생화와 개암나무가 자생하게 해 자연미를 살렸다. 한마디로 개암나무 숲을 만들어 새들이 찾아오게 하고, 관리하기 어렵던 커다란 장벽을 없앴다. 나무숲 반대쪽에는 곧 텃밭을 일구고 1,900만㎡(약 600만 평)의 땅을 농부들과 공유할 계획이다. 부지 관리를 위해 집을 임대하거나 이벤트용으로 대여하고 있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은 차고 넘친다.

    이날 멋진 춤을 선보인 댄서 프란체스카 헤이워드(Francesca Hayward)가 입은 스웨터는 구찌(Gucci). 정원 한쪽에선 야생화가 자생한다.

    글린 사이워치에는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불러오는 아주 특별한 에너지가 있다. 위대한 작가들은 이곳에서 글을 썼으며,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같은 화가들은 이곳의 바위와 바다, 하늘이 만드는 놀라운 풍경에 이끌렸고 여왕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유령이 보인다는 사람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이곳에는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존재가 엄청나게 많아요. 정말 에너지가 넘치는 마법 같은 곳이죠.” 나 역시 그렇게 여긴다. (VL)

    사진
    Sean Thomas
    Amanda Harlech
    패션 에디터
    Amanda Harlech, Tallulah Harlech
    헤어
    Shiori Takahashi
    메이크업
    Mathias van Ho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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