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동시대적인 쓰임이란, 1990년대생 한국 공예가 5
결코 잠잠해지지 않는 K-공예의 물결. 개성적인 손놀림으로 가장 동시대적인 쓰임을 창조한 1990년대생 공예가 5인이 또다시 새 시대를 연다.
권혜인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
권혜인은 행복을 빌며 도자기를 빚는다. 전통 기복 신앙의 산물인 기물의 형태를 만든 다음 여러 문화권에서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수많은 상징을 섬세하게 새긴다. ‘복을 빈다’는 작업의 의도는 언제부터 굳건해졌을까? 그녀는 “인류 역사에서 전승되어온 예술품의 핵심은 기복이다”라는 답변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박물관에 있는 수많은 공예품은 전부 실용적 가치보다는 추구하는 이상향을 담거나 소원을 비는 목적으로 만든 것들이잖아요. 그 의미를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과거의 이야기가 지금의 욕망을 건드리기도 하고,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되기도 하니까요.”
제기와 항아리를 결합한 시리즈 ‘富, 名譽, 愛, 美, 健康’은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기복의 의미를 현대에 다시 구현하고자 한 본격적인 시도였다. 과거 다산, 자손의 번창, 무병장수 등에 머물던 기복을 넘어 권혜인은 현대인이 가장 욕망하는 것들을 탐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돈, 명예, 사랑, 아름다움, 건강’이라는 다섯 가지 핵심 주제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똑같은 크기와 형태의 다섯 항아리에 각각을 상징하는 이야기를 담아 완성했다. 예를 들어 ‘명예(名譽)’를 기원하는 항아리에는 남다른 효자로 유명했던 그리스 신화의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를 모티브로 한 문양과 조각을 새겼다. 이렇게 탄생한 상형 항아리를 제기 위에 얹은 이유는 조상에게 바치는 제사와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형상과 문양을 찾기 위해 권혜인은 평소 동서양의 다양한 시대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수집한다. 사료부터 다양한 문화권의 신화, 종교 서적은 물론 마블의 히어로 시리즈까지 그녀에겐 모든 것이 이야기의 조각이다. 그리고 수천 년의 간극 속에서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지점을 발견하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를 엮고 섞는 작업이 시작된다.
심장 모양의 도자기를 안에 품고 있는 작품 ‘形骸之內(형해지내)’는 ‘죽고 나서 잰 심장의 무게가 공작 깃털과 같아야만 환생할 수 있다’는 이집트의 신화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권혜인은 동양에서 생명을 의미하는 태항아리(태를 넣어 보관하는 용기)를 밑받침으로, 심장을 품은 항아리의 몸통은 갈비뼈 모양으로 투각했으며, 항아리 윗부분에는 작은 항아리 8개를, 가장 위에는 노리개 장식을 연상시키는 나비를 조각해 얹었다. “노리개의 나비를 형상화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복을 비는 의미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나비 그 자체가 서양에서는 영혼과 자유로움, 심리학에서는 자아를 뜻해요. 이집트의 내세관에서 시작했지만,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살면 그 복이 자신은 물론 후대에까지 이어진다거나 미래는 ‘나’에 의해 결정된다는 현대인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도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죠.” 이처럼 동서양의 직설적인 상징이 결합할 때마다 이야기는 더욱 풍부하고 신비로워졌다.
“도자기의 기본 재료인 흙의 물성 자체가 참 재미있어요. 유약을 칠하면 유리처럼 투명하고 맑게 표현되고, 금속이나 나무의 질감도 표현할 수 있거든요.” 작가는 예리한 조각 표현을 강조하기 위해 불에 구운 도자기의 표면을 다이아몬드 사포로 연마해 광을 내고, 은칠로 마감해 진주 같은 광택감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권혜인은 한 작품 한 작품 영롱하게 빚고 섬세하게 새겨 자기만의 이야기를 쌓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가 담긴 책은 이제 겨우 첫 장을 넘겼을 뿐이다. 지난해 <월간 도예>가 주목하는 도예가 11인에 선정된 후 신당창작아케이드에 입주해 활동하는 권혜인은 올해 더 많은 이에게 작품을 선보일 기회를 앞두고 있다.
설수빈의 창공을 가르는 손
설수빈은 공예 작가인 동시에 공간 디자이너다. 공간을 원하는 방식으로 연출하기 위해 직접 나무로 가구를 만든 것이 예술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 후 목재와 금속, 도예를 활용한 다양한 오브제도 만들게 됐다. 그런 그녀에게 많은 영감을 준 것은 20세기 모더니즘과 아르데코의 거장 아일린 그레이. 공예에서 시작해 인테리어 디자인, 건축으로 영역을 확장한 토탈 디자이너로 설수빈에겐 믿음직한 선배 같은 존재다. 여기서 머물지 않고 설수빈은 2020년에 아일린 그레이에게서 영감을 받아 완성한 ‘코리안 아르데코’라는 가구 시리즈를 선보이기도 했다. 원 5개가 균형 있게 결합된 ‘후프 체어’와 한옥 창살 패턴에서 착안한 ‘그리드 체어’ 등을 이 시리즈를 통해 선보였다. 간결한 도형이 이루는 반복과 대칭, 기하학무늬가 눈에 띄는 아르데코 스타일에 절제의 미학과 재료 고유의 특징을 중시하는 한국의 미감을 접목한 작품이었다. “만약 한국에 아르데코가 전파됐다면 어떤 형태로 전개됐을까 하는 상상에서 시작된 시리즈예요. 도형의 배치와 반복, 절대적인 대칭 구조를 꾀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배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작업했죠.” 이후 <에디티드 서울: 뉴-호옴> 전시와 취향의 서재 등 다양한 장소에서 활발하게 전시를 이어가던 그녀는 더욱 심화한 인테리어 디자인 공부를 위해 홀연 영국으로 건너갔다.
환경이 바뀌자 그녀의 작업에 담긴 메시지는 오히려 한층 견고해졌다. 마음가짐의 변화가 미친 영향이 컸다. “영국에서 들은 수업 중에 ‘Thinking Through Making’, 말 그대로 ‘만들기를 통한 사고’라는 수업에서 많은 것을 새롭게 깨달았어요. 핀터레스트의 스크롤을 끊임없이 내리는 것보다 주어진 것에서 즉시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다 보면 최전선에서 디자인의 실마리를 발견하곤 해요. 재료비와 인건비가 비싼 영국에서는 외주 작업도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요.”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리멤브런스(Remembrance)’ 시리즈다. 사우샘프턴에 있는 철거된 발전소의 난간으로 의자와 테이블, 촛대 등을 만들었다. 건축 폐기물 재활용으로 지속 가능성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건축물에 담긴 장인 정신과 미감을 재해석한 디자인으로 사라진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역사를 일상에서 즐기고 기억할 수 있게 했다.
‘Memento Mori(당신의 손때가 묻은 유골함)’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프로젝트였다. RCA 졸업 작업의 일부인 이 오브제의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다. “유골함은 죽음 이후에 우리가 머물게 되는 공간이지만 미리 경험하거나 선택할 기회는 없잖아요. 훗날 내가 존재하게 될 유골함을 오브제로 만들어 일상에서 정성 들여 사용하고 싶었어요.” 유골함을 모래시계 형태로 제작한 사연은 시간의 유한성을 상징하기 위한 것. 그녀는 램프 조명을 켜고 끌 때마다 사용자들이 삶과 죽음을 상기하길 바랐다.
가구와 공간 디자인 작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설수빈은 틈날 때마다 흙을 만지며 그릇을 빚는다. “학교나 회사에 다닐 때도 틈틈이 도예 공방을 찾아 작업을 하곤 했어요. 촉감과 형태를 자유롭게 빚어낼 수 있다는 점이 제법 큰 성취감과 휴식을 주거든요.” 영국에서 시작한 도예 작품 ‘CC Plate’ 시리즈는 흙이나 소성 방법, 유약 등을 지속적으로 바꿔가며 꾸준히 진화하고 있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는 한국의 옹기토나 분청토 등을 작업에 적용하기 위해 몰두하는 중이다. “소중한 멘토가 늘 해주는 말이 ‘디자인에 완성이란 없다’예요. 만약 1부터 10까지 다 해봤다면, 10부터 1까지 거꾸로도 가보고 2나 5부터도 가고, 또 가다가 멈춰도 봐야 한다는 거죠. 계속 접근 방식을 바꿔가며 더 나은 것을 찾으라는 말인데, 완성을 과정으로 여긴다는 이야기가 새롭게 들렸어요.”
공간 디자인과 공예를 병행하는 어려움은 없는지 묻자, 그녀는 이런 작업 형태야말로 가장 이상적이고 건강한 균형을 찾는 과정이었다고 대답했다. “큰 공간을 디자인할 때는 아무래도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없지만, 두 손으로 원하는 형태와 과정대로 직접 뭔가를 만들어내는 행위에서는 희열과 만족을 느낄 수 있죠. 더불어 무언가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을 때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를 가장 중요하게 고민해요.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작업의 의미를 찾는 것이 첫 번째죠.” 좋은 가구는 사용하는 즉시 알아챌 수 있다. 설수빈이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메시지를 담으려 했는지 그녀의 공예 작품을 바라보고 만져보면 고스란히 전해진다.
손태선의 유영하는 나무
손으로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던 소년의 꿈은 수영 선수였다. 물속에서 나는 듯 헤엄치던 그가 가족 여행에서 처음 마주한 열대 바닷속 풍경은 우주만큼 낯설었다. 산호며 휘황찬란한 물고기며 바닷속에 사는 생명체의 자유롭고 유연한 몸짓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이후 목공예 작가의 길에 들어선 그는 태어나서 처음 마주한 경이로운 생명체를 가구로 재현해 지상에 차례차례 수놓았다. 그가 2019년부터 꾸준히 ‘Marine Biology’ 가구 시리즈를 선보이게 된 경위다.
나무를 조각해 추상적인 형태로 구현한 해초와 산호 군락은 선반, 벤치, 옷걸이, 사이드테이블 등이 됐다. 나무 굵기 조절로 무게중심을 잡아 안정감을 주었고, 곡면이 끊기고 결합되는 지점과 단면을 절단한 부분에 기능성을 부여했다. 실용성과 아름다움이 융합된 추상적 형태의 가구는 그 자체가 다목적 설명서와 다름없다. 앉아도 되고, 무언가를 얹거나 걸쳐도 되고, 그저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다양하게 변신하는 손태선의 가구는 어떤 공간이든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최근 손태선은 해양식물의 백화현상을 주제로 한 ‘Chlorosis’ 시리즈로 작업 범위를 확장했다. 바닷속의 단단한 산호 군락은 죽어가며 점차 하얗게 변한다. 해양 생태계의 생명력에 집중하던 그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업 때문에 고통받는 시간이 꽤 길었는데요. 계속 작업해오던 산호의 시간을 살펴보니 투명하던 형체는 죽으면서 하얘져 동물 뼈처럼 변하더군요. 거기에서 산호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탄생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 현상을 목재에 적용하기 위해 작가는 나무 표면을 불로 태웠다. 불은 나무에 기피의 대상이지만 잘 사용하기만 하면 나무가 휘는 것과 틀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전통 기법 중에 낙동법이라고, 오동나무를 불로 검게 그을려 결을 살리는 방법이 있어요. 거기에서 착안해 나뭇조각을 그을린 다음 탄 부분을 쇠솔로 벗겨내 마감했습니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전통 목가구를 공부하는 동시에 작품의 특성을 더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재료도 계속 탐구했다. “물푸레나무(Ash Tree)를 그을리면 표면이 푸르스름해져요. 여기에 화이트 오일을 발라 더 창백한 흰빛으로 표현했죠.” 표면의 창백한 느낌이 더해지자 ‘죽은 뒤 하얗게 변하다’라는 작품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었다.
부드러운 곡선을 활용하는 비정형의 작업은 그가 2년간 황형신과 노경택, 김윤환 등 아트 퍼니처 작가들의 작업실에서 일하며 배운 결과다. 학교에서 배운 전형적인 가구의 크기, 형태, 각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여기에 더해 그는 나무만의 물성을 잘 담아내기 위한 노력을 거듭했다. “나무의 가장 큰 매력은 결이 있다는 거예요. 직선인 나무에서 곡선을 만들어내려면 나무를 여러 개 붙여 하나의 덩어리를 만든 다음 조각을 해야 하는데요. 이때 결이 같지 않은 나무를 붙이면 틀어짐과 균열이 많이 발생해요. 눈으로 봤을 때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실제로 만져보면 울퉁불퉁하죠. 매일같이 작업실에 앉아 나뭇결만 들여다보며 예쁘게 조합하고 다듬는 연습을 했어요.”
최근 그는 나무에 새롭게 적용할 기법을 찾기 위해 화학을 공부하고 있다. “다소 추상적인 이야기지만 나무를 투명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고 있어요. 통이 크고 덩어리감이 있는 제 작업이 어떤 공간에든 잘 녹아들 수 있는 유연성을 갖도록요.” 나무의 한계를 넘기 위한 그의 탐구와 실험은 계속된다.
전아현의 절경을 품은 가구
굽이치는 능선과 뾰족한 봉우리, 그 위를 휘감은 운무까지, 아름다운 산의 풍경이 생생한 입체 형태로 눈앞에 펼쳐진다. 3D 영상이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여러 각도로 들여다볼 수 있는 테이블을 통해서다. 전아현의 ‘심산’ 시리즈는 한국 명산의 풍경을 뚝 떼어다 테이블과 벤치에 심은 작품이다. 산이 그러하듯, 가구 속에 담긴 그 산도 방향과 시선에 따라, 날씨나 시간, 놓인 위치에 따라 매일같이 다른 풍광을 드러낸다.
“힘들 때마다 산에 가게 되더라고요. 자연은 늘 그 자리에 있잖아요. 흘러가는 대로, 나를 그저 나로 받아들이는 자연을 일상에 가까이 두고 싶었어요.” 위로와 휴식을 가져다주는 자연을 ‘심산’ 시리즈에 담고 싶었다는 그녀는 표현 기법으로 산수화를 선택했다. 눈이 아닌 마음의 시선으로 그린 동양의 산수화는 먹의 농담만으로 산의 기개와 공기의 분위기를 표현한다. 단단한 입체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 먹 대신 콘크리트를, 여백과 운무는 레진을 사용했다. 레진은 투명한 액상 합성수지로 시간이 흐르면 유리만큼 단단하게 굳는다.
‘심산’을 작업할 때는 산수화의 여러 시점 중에서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들여다보는 방식인 심원법을 적용했다. 가장 먼저 산의 등고선 데이터를 입력해 3D 모델링으로 틀을 만든다. “오랜 세월 대지의 움직임과 자연현상에 의해 만들어지고 깎인 게 산의 형상이잖아요. 게다가 산은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보는 건 산의 일면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눈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아니라 자연에 남겨진 수치와 흔적 그대로를 표현했어요.” 실제 산의 비율과 배치를 고스란히 재현한 틀에 콘크리트를 붓고 굳히는 데 적게는 한 달, 많게는 세 달까지 걸린다. 완벽하게 건조된 콘크리트의 표면을 다듬은 다음에는 투명한 레진을 붓고, 흰색을 섞은 레진을 섞어가며 운무를 표현했다. 측정 가능한 지형은 데이터를 활용한 3D 모델링으로 실제에 가깝게 재현할 수 있지만 수묵화의 하이라이트인 운무는 순전히 작가의 감으로 표현하는 수밖에 없다. 흰색 레진의 농도와 양, 흘릴 때의 동작으로 산의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처음엔 경험과 추억을 담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산에 골몰하기 시작했지만, 작업 횟수가 늘면서 더 많은 산을 접하고 이해해야 했다. 어느새 산림청 선정 한국의 100대 명산 자료를 뒤적이며 그 형태와 이야기를 수집하고 등고선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녀의 취미가 됐다. “봉우리나 높낮이, 곡선도와 같은 산의 형태, 유래와 설화 등을 찾다 보면 다음 작업의 아이디어가 떠올라요.” 산마다 다른 특성은 개성적인 기능과 사이즈로 표현된다. 동고서저의 한반도 지형이 잘 구현된 ‘가지산’은 가장 표준적인 사이즈의 티테이블로, 두 등성이가 멀찍이 떨어진 ‘천성산’은 커브 형태의 벤치로 재탄생했다. ‘지리산’은 지름 120cm의 원형 테이블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산인 지리산의 순환하는 생태계를 보여주고 싶어서 만든 작품이다.
2020년부터 시작된 ‘심산’ 시리즈는 인공 재료를 통해 구현한 서정적인 미감으로 아트 퍼니처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지난해 <포브스>의 30대 미만 30인 중 예술가 부문에 선정된 전아현은 청주공예비엔날레를 비롯해 다양한 단체전과 개인전을 통해 늘 새로운 관람객 앞에 아름다운 풍경을 선보이는 중이다. 콘크리트와 레진으로 빚어낸 그녀의 입체 산수화를 통해 누구나 마음속에 간직한 자기만의 산을 고요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임종석의 보석보다 귀한 곤충
임종석의 인스타그램(@kafka8) 피드를 살펴보니 주렁주렁 곤충을 달고 있는 남자 모델들의 화보가 눈에 띈다. 그동안 장신구로 표현되던 곤충은 나비나 잠자리, 작은 크기의 장수풍뎅이 정도가 전부였지만 임종석이 선보이는 브로치는 더듬이와 날개, 다리, 눈까지 굉장히 사실적이다. 임종석은 어쩌다 이런 곤충으로 호불호가 강한 장신구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사실 곤충이라는 테마는 제가 세선세공기법이라는 작업 언어를 찾고 나서 부수적으로 선택한 것이에요.” 세선세공기법은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작업 방식으로 공정이 번거로워 이제는 잘 쓰이지 않는다. 은으로 만든 얇은 선을 새끼줄처럼 꼬아 망치로 여러 차례 두드려 펼쳐 단단하게 만든 다음 수십, 수백 번 감아 형태를 만든다.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신라 시대 금관 장식을 떠올리면 된다. 임종석은 석사과정을 이수할 무렵 금속공예 교재에 실린 세선세공에 대한 단 몇 줄의 설명을 운명처럼 붙잡고 집요하게 탐구했다. 현재 전승되지 않아 사료에 소개된 방법이 생소한 기법에 대한 단서의 전부였지만 그는 손수 실험하고 실패를 거듭하며 본인 스타일로 장착해갔다.
얇은 금속 선을 반복적으로 중첩해 만드는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아주 미세한 질감까지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세히 관찰해야만 겨우 알 수 있는 곤충의 독특한 형태와 기묘한 메커니즘도 표현 가능하다. “금속이긴 하지만 평소 제가 쓰는 소재는 한없이 가볍고 헐거운 선으로 만들어요. 그게 연약한 껍질에 둘러싸인 곤충과 닮아 보였죠. 다들 어린 시절 풀숲을 헤집어가며 이름 모를 곤충을 관찰하고 채집하던 기억이 있잖아요. 그때 그 기억이 떠오른 거죠.” 기법에 맞는 표현 소재로 낙점된 곤충은 과거와 지금의 자신을 연결 짓는 매개체로서 그와 언제나 함께하는 테마가 됐다.
세선세공기법을 활용해 장신구를 만든 지 어느덧 10년째. 곤충에서 시작한 그의 작업은 자연스럽게 조금씩 확장 중이다. 두 번째 개인전 <소년(消年)>에서 그는 우연히 발견한 새로운 채색 기법을 선보였다. “색감을 내기 위해 금속에 옻칠을 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다 태워서 벗겨내고 보니 옻칠이 타고 남은 잿빛 색상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타고 남은 재 자체를 작품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죠.” 의도적으로 만든 형태 위에 우연히 남은 태운 흔적이 곧바로 작품이 되었다. 전시명인 ‘소년(消年)’에 담긴 뜻은 ‘사라진 시대’였다.
매일같이 금속을 만지다 보니 그 원료인 광물과 그걸 품은 지구의 속살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재가 된 옻칠의 흔적은 마그마를 품은 해저의 암석처럼 느껴졌다. 찰나의 영감을 겉으로 평화롭지만 언제든 분출할 수 있는 열망으로 승화해 선보인 것이 2년 전 열린 개인전 <휴화의 바다>였다. 이 전시에서 임종석은 늘 사용하던 사실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유니버스에 사는 명왕성이나 등대, 구름 등을 추상적인 형태로 재현했다.
“현대 장신구를 만든다는 건 외로운 작업이에요. 금속공예, 그중에서도 장신구 작업은 판매로만 명맥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에게 작업을 상업화해 브랜드로 전개해보자는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안주하려는 순간마다 세선세공이라는 기법을 붙잡고 숙련해온 그간의 시간이 그를 다시 예술가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꾸준히 업로드된 그의 작업을 보고 해외 갤러리로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했고, 유럽과 미국에서 그의 장신구를 찾기 시작했다. “저에게 금속공예는 원하는 걸 눈에 보이도록 만드는 작업이에요. 저만의 장신구를 통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계속 전하는 것이 목표죠.” 기회가 오지 않으면 직접 만들어가며 임종석은 끊임없이 같은 꿈을 꾸고 있다. (V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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