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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꽃병, 예술이 된 화병

2024.04.06

by 김나랑

    꽃보다 꽃병, 예술이 된 화병

    북유럽 디자이너들은 한 세기에 걸쳐 화병을 예술품으로 승화시켰다. 상징적인 화병 디자인에서 꽃보다 아름다운 세계를 발견하다.

    오사 융넬리우스(Åsa Jungnelius)가 코스타 보다(Kosta Boda)를 위해 디자인한 ‘Crackle’ 화병. 뜨거운 유리를 찬물에 담가서 만든 것으로, 불완전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에스트리드 에릭손(Estrid Ericson)은 꽂아두려는 꽃에 맞는 다양한 화병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이에게 사랑받은 스웨덴 출신 디자이너다운 말이다. 그는 스트란드 베겐에 있는 스벤스크트 텐(Svenskt Tenn) 부티크를 꽃으로 가득한 화병으로 장식해 매일 매장에서 달콤한 꽃향기가 나게 했다. 에릭손에게 화병은 단순히 꽃을 담아두는 용기 이상이었다.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모양새가 바뀌고 특별한 생동감을 전하는, 아름다운 장식품이자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도예가이자 디자이너, 조각가인 군나르 뉠룬드(Gunnar Nylund)가 1950년대에 만든 도자기 화병 ‘Hedgehog’.

    화병은 오랫동안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매료하는 물건이었다. 네덜란드 화가들은 식물로 가득 채운 화병을 화폭에 옮겼고(반 고흐의 ‘해바라기’가 가장 유명한 예일 것이다), 모네와 마네는 거울에 비친 화병을 그림으로 담아냈다. 그림 속 화병이 예술가의 반영인 것처럼, 집에 자리한 화병은 우리를 반영한다. 이는 혹독한 겨울을 나는 동안 집이 위안의 공간이 되는 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는 특히 그렇다.

    “다른 북유럽 국가도 마찬가지지만, 스웨덴에서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곤 해요.” 스톡홀름 국립 박물관(Stockholm’s Nationalmuseum) 실라 로바크(Cilla Robach) 관장의 말이다. “친구들과 야외에서 커피를 마시며 어울릴 수 있는 이탈리아와 달리, 이곳 사람들은 정체성을 교류하는 장으로 집을 훨씬 중요하게 여겨요.” 집이 만남의 장소라는 로바크의 말처럼 북유럽의 디자인 아이템은 특별하다.

    카밀리아 프뤼트(Camilla Prytz)가 매그노(Magnor)의 의뢰를 받아 만든 ‘Unique Brown’. 노르웨이의 전통 유리 브랜드 매그노는 유기적인 둥근 형태가 색감을 아름답게 구현한다고 설명한다.

    각자가 큐레이팅한 개인적인 박물관과도 같은 집에서 소박한 화병은 하나의 작품이다. 이는 스웨덴의 유리공예 명가 오레포르스(Orrefors)가 더 예술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20세기 초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개념이다. 링곤베리 잼병 같은 일상적인 용기 너머를 바라보기 시작한 이 회사는(여전히 성업 중이다) 조각적인 화병처럼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잉에게르드 로만(Ingegerd Råman)이 오레포르스를 위해 디자인한 격자무늬 화병 ‘Cut in Number’. 반투명 패턴과 더없이 맑은 크리스털이 조화를 이루는 이 작품은 스웨덴에서 오래된 유리공예 업체로 꼽히는 오레포르스가 지금까지도 대표작으로 선보이고 있다.

    오레포르스가 디자이너 시몬 가테(Simon Gate)를 영입한 1916년부터 오레포르스의 유리공예, 특히 화병은 수준이 한 차원 더 높아졌다. “1910년대 오레포르스는 예술가와 성공적으로 협업하기 시작했어요. 그런 맥락에서 유리공예는 순수예술까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예술적 공예품으로 자리매김했죠.” 로바크가 말했다. 동시에 오레포르스가 있는 스몰란드(Småland)는 스웨덴 유리공예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창의성과 기능의 세계가 융합됨에 따라 스벤스카 슬뢰이드푀레닝엔(Svenska Slöjdföreningen, 공예를 장려하기 위해 스웨덴 정부에서 운영한 비영리단체)은 스톡홀름의 릴리에발크스 미술관(Liljevalchs Konsthall)에서 ‘가정 전시회(Home
    Exhibition)’를 개최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단체의 사무국장 그레고르 파울손(Gregor Paulsson)은 심미적으로 아름다운 디자인은 기능성 또한 갖춰야 한다는 내용의 선언문 ‘바크라레 바르닥스바라(Vackrare Vardagsvara, 더 아름다운 일상)’를 발표한다. “아무 기능이 없는 도자기 장식을 사지 말라는 말이었죠.” 로바크가 설명했다. “화병은 이곳에서 중요한 물건이 되었어요. 당연히 화병은 꽃을 꽂는 용도로 사용되겠지만, 창의적 디자인과 심미적 특성 또한 갖춰야 합니다.”

    입으로 불어 만든 유리 화병 ‘알토’. 알바 알토가 이딸라를 위해 디자인했다. 디자이너의 고향인 핀란드의 굽이치는 강물에서 영감을 받은 제품으로, 핀란드 인테리어 분야의 전설이 됐다.

    형태와 기능을 모두 만족시키는 상징적인 작품으로는 모더니즘의 극치인 알토(Aalto) 화병이 있다. 사보이(Savoy)라고도 알려진 이 화병은 유명한 핀란드 건축가 알바 알토(Alvar Aalto)가 1936년 디자인한 것으로, 작업자 12명이 10시간을 쏟아부어 1,110도의 온도로 만들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여전히 제작해 판매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딸라(Iittala)가 주관한 경연 대회의 출품작이었다가 후에 파리 국제박람회에 전시되기도 한 이 화병은 유리를 입으로 불어 만든 물결 같은 곡선으로 이루어져 움직이는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킨다. 이 화병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 경연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디자인 애호가들의 클래식으로 남아 있다. “과연 어떤 꽃이 그 화병을 더 멋있게 만들 수 있을까요?” 로바크가 물었다. “그 작품은 화병 자체로 강한 존재감을 표현하기 때문에 어떤 꽃이나 화초가 딱히 그걸 더 아름답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알토가 화병이 아니라 조각품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유리 화병 ‘다그’는 카리나 세트 안데르손이 스벤스크트 텐을 위해 디자인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이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주변 풍경에 영감을 받아 탄생한 알토 화병처럼 스칸디나비아의 또 다른 전설적인 유리 디자인, 스벤스크트 텐의 다그(Dagg) 화병도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마리메꼬(Marimekko)의 우르나(Urna) 화병을 만들기도 한 스웨덴 디자이너 카리나 세트 안데르손(Carina Seth Andersson)은 푸르른 녹음을 보고 이 화병을 디자인했다. 구체적으로는 아침 해를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이슬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2009년 처음 소개된 이래로 디자인 위시 리스트에 빈번히 등장하는 다그 화병은 인테리어에 특히 신경 쓴 집이나 고급 호텔에서 보았을 법하다. “에스트리드 에릭손 때부터 스벤스크트 텐에 전해 내려오는 전통이 있는데, 바로 화병 작업이에요. 요제프 프랑크(Josef Frank)도 했고, 에릭손은 1940년에 작업한 화병 100점을 모아 따로 전시하기도 했죠.” 스벤스크트 텐의 마케팅 디렉터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톰뮈 빈데펠드(Thommy Bindefeld)의 말이다. 진정한 시각적 위업인 다그 화병을 만드는 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화병을 만들려면 먼저 흑연으로 형태를 만든 뒤 속을 손으로 파내야 해요. 그리고 4개에서 6개 정도의 조각을 하나로 합친 다음, 안쪽에서 손으로 유리를 블로잉해야 했죠. 유리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굉장히 무거워요. 그래서 그걸 들어 올리고 형태를 잡는 게 보통 일이 아니죠.”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블룸 보타니카’. 조지 젠슨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라그나르 얄르타르손은 이 디자인을 “꽃과 거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화병”이라고 설명한다.

    화병은 꽃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하기도 한다. 조지 젠슨(Georg Jensen)의 ‘블룸 보타니카(Bloom Botanica)’도 그렇게 태어났다. 2019년 헬레 담키에르(Helle Damkjær)가 디자인하고 스테인리스 스틸을 조각해 만든 이 화병은 봄을 맞아 사랑스러운 꽃봉오리가 막 피어나려는 순간과 닮았다. “헬레는 모든 작업을 직접 손으로 해요.” 조지 젠슨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라그나르 얄르타르손(Ragnar Hjartarson)이 말했다. “그는 디자인하는 모든 작품을 진흙에서부터 빚어나가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유기적인 흐름이 느껴지죠.”

    판뉘 올라스의 미니 화병 ‘Mood Vessels’. 귀 기울여 듣고 싶은 이야기를 품은 듯하다.

    화병이 화병이 아닐 때도 있을까? 판뉘 올라스(Fanny Ollas)의 기발하게 해체된 작품이 그런 경우다. 몇 점은 실제로 꽃을 꽂기 힘들어 보이니 말이다. 스톡홀름에서 활동하는 이 디자이너는 진흙을 가지고 재치 있게 의인화한 용기를 만드는데, 화병이 심경의 변화를 겪는 것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형태다. 어떤 것은 짓밟힌 듯 보이고, 다른 것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인다. 그것들은 <토이 스토리>의 장난감처럼 우리가 등을 돌리면 살아서 움직일 것만 같다.

    산화 황동과 철로 만든 ‘Foldevase’. 타게 안데르센은 꽃봉오리 하나하나가 빛을 발할 수 있게 이 화병을 만들었다.

    좋은 화병은 그 디자인만으로 좋은 평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타게 안데르센(Tage Andersen)의 접힌 화병은 특정인의 지지를 받아 유명해졌다. 매년 새해가 되면 마르그레테 2세 여왕은 전통적으로 덴마크 사람들에게 신년사를 전하는데, 그 옆에 바로 이 독특한 부채꼴 화병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황동과 철을 사용해 2002년 디자인된 이 극도로 모더니즘적이고 브루탈리즘적인 화병은 안데르센이 당시 협업 중인 대장장이와 외식하던 중 냅킨이 멋지게 펼쳐진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그는 소재와 공예에 대한 감각이 남달라요.” 남편 몬 안데르센(Monz Andersen)이 설명했다. 더불어 그 스타일은 확실히 “유기적인 아름다움과 우아하고 거칠지만 장난기 가득한 여유를 발산한다”고도 말했다.

    입으로 불어 만든 크리스털 유리 화병 ‘Lyngby Vase’. 륑뷔 포르셀렌(Lyngby Porcelæn)이 1936년에 선보인 것으로, 도자기로 만든 이 화병의 단순한 디자인은 시대를 초월한다.

    화병 디자이너에겐 공통점이 있다. 꽃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점이다. 실제로도 타게 안데르센이 운영하는 가게(타게는 1987년부터 코펜하겐에서 꽃 관련 디자인 숍을 운영하고 있다)를 자주 찾는 손님은 꽃에 대한 그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 화병은 실제로 꽃을 사랑하고 꽃을 잘 ‘아는’ 사람이 디자인했다는 게 확실히 느껴져요. 실제로 직접 꽃을 다루지 않는 사람이 디자인한 작품도 많잖아요.” 꽃은 아름답다. 꽃보다 화병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 무엇보다 꽃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가장 아름답다. (VL)

      사진
      OSCAR MEYER
      ANNA CLAR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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