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 코리아의 여자들, 여자들의 보그 코리아
동시대를 함께하는 여성 24인의 <보그> 표지부터 주목받는 현대미술 작가 9인의 전시, 모두가 신뢰하는 여성 리더 6인과의 대화까지. 1996년 창간 이래 다양한 관점과 방식으로 여성을 지지해온 〈보그 코리아〉가 우리 시대 여성에게 보내는 2024년 3월의 상춘곡.
PRE-OPENING PARTY
봄바람에 실린 이야기가 끝도 없이 퍼져나간다. 3월의 끝자락, 소박한 멋을 간직한 북촌 휘겸재에 <보그>가 수놓은 광경이다. <보그>가 올해 첫선을 보인 연례 캠페인 ‘보그 리더: 2024 우먼 나우(VOGUE LEADERS: 2024 WOMAN NOW)’가 열렸다. 닮고 싶은 여성 24인의 3월호 커버로 만든 설치물이 자리한 너른 마당에서부터 본격적인 잔치가 벌어졌다. 3월 27일 사흘간의 만남이 시작되는 오프닝 파티 날, 우리는 알록달록한 봄꽃을 건네며 동시대 여성을 버선발로 맞이했다. <보그>와 함께 패션계를 확장하고, 세상을 바꾸는 문화 예술의 힘을 믿는 우리 ‘프렌즈’들에게 축제의 서문을 끝맺는 말인 “여성으로 태어나줘서 고맙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눈에서 눈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건네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이어 잔치국수와 화전, 계란빵과 약과 등의 잔치 음식이 바구니에 주르르 담겨 나왔고, 매력적인 술이 적재적소에서 대화를 꽃피우며 흥을 돋웠다. ‘뵈브(미망인)’라고 폄하된 마담 클리코가 자신의 비전을 뚝심 있게 밀어붙인 결과인 ‘뵈브 클리코’ 옐로우 레이블부터 돈 훌리오와 텐커레이, 케틀 원 등 개성 강한 술을 가미한 스페셜 칵테일 3종까지, 지난해 아시아 최고의 바 13위에 이어 세계 최고의 바 75위에 연이어 오른 바 참(Cham)의 오너 바텐더 임병진은 돈 훌리오 1942를 베이스로 완성한 ‘VOGUE 1996’을 비롯해 위대한 여성을 모티브로 창작한 칵테일을 끊임없이 건네며 한자리에 모인 대담한 여성들을 축복했다. “여성은 언제나 또 다른 여성에게서 가장 큰 영감을 받아요.” 학창 시절 ‘빨간 머리 앤’의 꺾이지 않는 희망을 동경했던 시나리오 작가 정서경이 최근 <보그>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 말이 맞다. 돌이켜보면 여성인 나를 변화시킨 것은 항상 또 다른 여성의 말과 글, 그리고 그들의 패션과 예술이었다. 여성은 기꺼이 여성의 뒤를 따른다. 그러면서 세상을 한층 풍부한 색채로 물들인다. ‘레벨나인(Rebel9)’과 함께 휘겸재의 가장 안쪽 공간에 마련한 아카이브 룸에서 방문객들은 <보그>가 채집해온 여성의 어록을 프린트해 휴대폰과 지갑에 소중히 저장했다. 작가, 배우, 뮤지션, 예술가, 스포츠인, 정신의학 전문의 등 각 분야에서 존재를 증명하고 영감을 준 여성들이 <보그> 인터뷰에 새겨놓은 문장은 꼭 필요한 누군가의 마음속에 빛을 쏘아 올리며 공감과 연대의 이야기를 확장해나갈 것이다. 이후 봄 마당에 격의 없이 펼쳐진 공감과 화합의 장에 포근한 밤이 드리우고, 우리가 사랑하는 여성들이 무대에 오르며 클라이맥스가 도래했다. 변화를 사랑하는 림킴과 댄서 리아킴이 이끄는 완성형 댄스 크루 원밀리언 그리고 ‘새로운 전설’ 김완선! 대범한 목소리와 몸짓으로 시대를 견인하는 이들이 뜨거운 환호 속에서 되레 관객을 향해 마이크를 돌렸다. 이렇게 존재해줘서 고맙다고, 앞으로도 목청껏 노래하며 하루하루 축제처럼 만끽하며 살아가자고. 우리의 아름다운 봄노래가 그렇게 시작됐다.
ART NOW
잔치와 연대의 대담이 펼쳐진 마당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한옥. 전통적인 건축양식과 근대적 요소가 조화로운 휘겸재 본채 공간에는 우아하고도 치열한 예술의 여정이 펼쳐졌다. 이름하여 <영원한 루머(Undying Rumor)>. 큐레이터 전수연의 기획으로, 삶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고, 탐구하고, 실험하고, 실천하는 여성 예술가 9인의 전시가 3일간 열렸다. 전시 제목은 최승자 시인의 ‘일찍이 나는’이라는 시에 등장하는 맨 마지막 시구절,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로부터 탄생했다. 시인으로서, 여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작품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예술가들과 그들의 흔적을 감상하는 관람객 사이에 공명을 일으키기에 더없이 적절한 테마였다. 세상에 대한 탐구와 주변 인물의 관찰, 주어진 도구의 활용, 선천적으로 결정된 한계의 인식이 담긴 작품은 모두 자기 존재의 증명이며 우리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서까래와 복도를 지나 가장 처음 만날 수 있는 작품은 한옥의 나무 기둥과 보가 돋보이는 거실에 설치된 차승언 작가의 대형 직조 회화. 베틀로 캔버스를 제작하며 회화의 조건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그녀는 날실과 씨실로 캔버스를 직접 직조하며 미술사와 회화의 역사를 담고, 규방 공예와 여성의 대표적인 가사 노동이었던 베틀 짜는 행위를 함께 엮어낸다. 왼쪽으로 꺾으면 기하학적 도형과 밝은 색채로 전현선 작가가 경험하고 이해한 인간관계, 사물, 상황을 상징하는 추상적인 작품 ‘그림과 창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곁에는 구멍, 물거품, 가시를 숨긴 먼지 등 인물의 형상을 통해 내밀한 정서를 표현한 표영실 작가의 작품 6점이 배치됐다. 사람들의 시선이 오래 머문 작품 중 하나는 40여 년간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주의 작가로 활동하는 윤석남의 ‘소리’였다. 사람 피부 같기도, 여성의 노동을 보여주는 손 같기도 한 나뭇결에서 영감을 받아 나무에 엄마의 얼굴, 작가 자신의 얼굴과 대중적인 여성의 얼굴을 하나하나 담은 조각품은 지그시 우리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세계를 누비며 활동하는 예술가이자 ‘보그 리더: 2024 우먼 나우’ 커버를 장식한 여성 24인으로 참여한 구정아 작가의 설치 작품 역시 많은 사유를 불러온다. 자석이 서로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속성을 활용해 자유롭게 각색되는 마그넷 조각은 작가의 주요한 축인 작품과 관람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끌어낸다. 휘겸재의 고즈넉하고 따뜻한 분위기와 어우러진 소목장세미(유혜미 작가의 활동명)의 지압 마루 작품, 작가 24인과 함께 예술과 삶 전반에 대한 대화를 나눈 후 남겨진 인상과 단어를 토대로 사진 작품을 만든 정희승 작가의 작업과 먹으로 경험과 감정에 대한 기억을 광목에 표현한 뒤 손바느질로 오려낸 것들을 단단히 엮은 한상아 작가의 ‘공탑’ 시리즈, 연약한 종이를 금속처럼 견고한 조각품으로 탄생시킨 황수연 작가의 ‘종이 몸’과 ‘종이 얼굴’까지. 1930년대생부터 1980년대생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빚어낸 다채로운 장르의 작품에는 작가의 고민과 삶은 물론 사회를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겪고 인내한 우리 여자들의 면면이 녹아 있다. 누군가의 서사는 글과 그림, 이야기 등 어떤 형태로든 남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재된 여성 작가 9인의 결과물 역시 깊은 울림으로 <영원한 루머>를 관람한 이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TALK NOW
한옥을 볼거리로 가득 채웠다면, 꽃봉오리가 움트기 시작한 너른 마당에는 이야깃거리를 늘어놨다. 우리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을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특별한 시간이 펼쳐진 것. 촉촉하게 봄비가 내리던 첫날부터 밝은 볕이 내리쬐던 마지막 날까지, 6인의 <보그> 리더와 <보그> 오디언스 300명의 만남은 사흘간 이어졌다. “꽃과 나비와 내가 하모니를 이루는 계절, 봄입니다.” 언제 들어도 좋은 이금희 아나운서의 맑은 목소리가 그 시작을 알렸다. “내가 지금 이렇게 흔들려도 어차피 나는 이 길을 가게 돼. 결국 되돌아오는 길은 나의 길이야.” 첫 번째 <보그> 리더로 등장한 김연아 선수가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던 말을 전했다. 헤맨 만큼 본인의 외연이 넓어질 테니, 걱정하지 말고 부딪쳐보라는 용기의 말이었다. “Connecting the dots.” 모델 신현지는 스티브 잡스의 명언을 인용했다. “지금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도 하나의 점이고, 여기 오기 전에 밥을 먹은 것도 하나의 점이고, 엊그제 피팅을 하러 간 것도 하나의 점이에요. 이 점들을 나중에 다 연결하면 결국 ‘신현지’라는 큰 세상을 감싸는 선이 될 거예요.” 우리의 선택은 성공이나 실패가 아니라 하나의 ‘실행’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응원을 건넨 것이다. 박세리 선수는 ‘함께’라는 가치에 집중했다. “제 꿈이 누군가의 꿈이 되더라고요. 제가 꿈을 이뤄가는 모습이 누군가에게 또 다른 꿈이 되고요. 누군가와 나누는 것,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이 저를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후배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 누군가와 기꺼이 닿겠다는 의지가 지금의 박세리를 정의하는 것이다. 배우 김민하는 드라마 <파친코>의 ‘선자’ 역이 본인에게 남긴 건 스스로에게 주어진 속도를 찾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세상의 속도에 저를 맞추기보다 제가 저만의 속도로 갈 때, 비로소 이 세상을 잘 볼 수 있고 세상도 저를 잘 알아보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는 이제 새로운 속도를 찾기 위해 또 다른 도전을 앞두고 있다. 최근 <보그>와 인터뷰한 두 여성은 또다시 <보그>를 위해 기꺼이 무대에 올랐다. 다정한 천문학자 심채경 박사는 우주를 연구하는 천문학자가 된 이유가 이 땅에 굳건히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본인의 자리에서 자기한테 잘 어울리는 일을 잘 찾아서 하는 분들에게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싶어요.” 그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하며 깊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약하게 보이는 여성들의 연대야말로 강합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정서경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로 ‘연대’라는 단어를 꼽았다. 김연아, 신현지, 박세리, 김민하, 심채경, 정서경, <보그> 리더 6인이 휘겸재 앞마당에서 함께 나눈 이야기의 공통점은 결국 도전과 사랑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는 여성에게 먼저 길을 개척한 이들이 전하는 애정 어린 마음, 그리고 느슨하지만 단단한 연대를 느낄 수 있었던 사흘간의 대화의 장은 새로운 만남을 기약하며 막을 내렸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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