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김수자가 보따리 안에 넣어둔 마법

2024.04.29

by 김나랑

    김수자가 보따리 안에 넣어둔 마법

    머리 위 대형 유리 돔이 발아래로 펼쳐진다. 닿을 수 없었던 하늘과 손이 맞닿는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2개의 돔과 2개의 하늘 사이 2개의 동일한 피사체가 움직인다. 김수자가 거대한 보따리 안에서 빚어내는 마법 같은 시간. 여기는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 미술관이다.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Bourse de Commerce-Pinault Collection, 피노 컬렉션)에서 9월 2일까지 열리는 기획전 <흐르는 대로의 세상(Le Monde comme il va)>에 참여하는 29팀의 작가들 중에서 주인공을 뽑자면 단연 김수자다. 18세기 곡물 저장고로 지은 돔형 건물의 중앙을 차지하는 지름 29m, 높이 9m의 원형 홀 ‘로통드(Rotonde)’는 미술관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전시마다 누가 혹은 어떤 작품이 이곳에 놓이는지에 대중의 관심은 뜨거웠다. 그러니 주인공이라는 비유가 다소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나 피노 컬렉션의 1층과 지하, 2개 층 전체를 44점의 작품으로 채운 김수자는 이번 기획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술관 측은 한국인 작가 김수자에게 카르트 블랑슈(Carte Blanche)라는 특권을 부여하며 이곳에 초대했다. 백지수표라는 뜻을 가진 카르트 블랑슈는 미술관이 작가에게 기획부터 전시까지 전권을 부여하는 프로젝트로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피노 컬렉션의 엠마 라비뉴(Emma Lavigne)는 관장직을 맡자마자 이 공간을 보고 가장 먼저 김수자 작가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퐁피두 메츠의 관장 시절부터 함께 작업해온 서로 존경하는 아티스트와 큐레이터로서, 엠마 라비뉴는 김수자의 개념 미술에 항상 큰 감동을 받았고 이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타이밍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준비해왔다. 그리고 그 완벽한 타이밍이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지난 3월 20일 기념비적 결과물 ‘호흡-별자리(To Breathe-Constellation)’ 프로젝트가 파리 도심에서 화려하게 공개됐다. 미술관 중앙 홀 바닥에는 418개 거울이 깔렸고 반원형의 천장 돔이 바닥으로 이동해 완전한 구형을 생성하는 착시 효과가 와우 효과를 만들어냈다. 작가는 그동안 지속해온 보따리의 연장선에서 유리 돔을 하나의 달항아리, 즉 보따리로 인식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24개 쇼케이스에는 보따리 작업의 연역적 오브제를 채웠다. 지난가을 국립 세브르 도자기 공방(Manufacture Nationale de Sèvres)과 협업한 크랙을 살린 달항아리 형태의 도자기, 작가가 19년간 쓰던 요가 매트, 지난해 멕시코에서 진행한 퍼포먼스 사진, 세상을 떠난 지인의 유품을 싸맨 보따리 등 섬세하고 서정적인 오브제의 정렬은 차분한 정서를 선사한다. 지하층에는 피노 컬렉션 소장품 중 하나인 ‘바늘 여인’이 상영 중이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여러 대륙을 옮겨가며 천을 둘러싼 문화 모자이크를 그려낸 16mm 필름 영상 연작 ‘실의 궤적’ 여섯 편 또한 만날 수 있다. 작가의 현재뿐 아니라 과거 40년 활동을 탐색하도록 돕는 전개는 거울로 연출된 환상적인 무한 공간의 시작점이 되어준 이주, 정체성에 관한 메시지까지 깊이 이해하도록 만든다.

    ‘호흡’이 공개된 첫 주말에 대면한 로통드의 광경은 웅장한 부조리극이 진행되는 연극 무대 같았다. 관람객은 각자의 방식대로 작가가 창조한 보따리 안에서의 시간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많은 이들이 바닥에 누워 유리 돔을 바라보며 명상을 즐기는 모습이 공간을 채우는 동시에 스스로의 내면을 비우려는 행위로 읽혔다. 등이 거울과 맞닿고 눈은 하늘로 향한 정지된 피사체는 시선을 따라 이동하는 돔의 중앙을 만끽하는 동적인 피사체와 섞여 다양한 굵기, 다양한 패턴의 바느질로 완성됐다. 그리고 미술관이 문을 닫은 날, 촬영을 위해 다시 찾은 텅 빈 로통드는 모노드라마를 위한 무대가 되어 있었다.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19세기 프레스코화와 안도 다다오의 콘크리트 벽을 무한대로 담고 있는 보따리에 들어와 차가운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고요한 가운데 카메라의 셔터 소리만 조용히 울리며 바느질로 단단히 꿰매지는 순간이었다. 작가 김수자의 40년이 무한한 형태로 거울 속에 반사되어 스며들었다. 로통드를 차지한 첫 번째 한국 작가이자 보따리라는 한국적 정서를 가장 현대적이며 세계적인 방식으로 승화시킨 주인공으로 말이다.

    ‘A Needle Woman’(1999-2000)

    피노 컬렉션 측으로부터 카르트 블랑슈 제안을 언제 받았는지 궁금하다.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진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지난가을에 프러포즈를 받았고 6개월 만에 작품을 선보였으니 무척 빨리 진행된 셈이다. 관장 엠마 라비뉴와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만큼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어 순조로웠다.

    거울을 소재로 사용하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시작됐나?

    제안을 받자마자 단번에 거울을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피노 컬렉션을 방문했을 때 내가 이 공간을 채운다면 어떤 작업을 선보일 수 있을까 상상해본 적 있다. 천장 유리를 이용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지난해에 갤러리 라파예트의 천장을 무지갯빛으로 씌운 전시 <호흡(To Breathe)>을 이미 파리에서 선보였으니 이번엔 거울을 중심으로 작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천장의 프레스코가 굉장히 컬러풀하기 때문에 새로운 색을 들이는 것 대신 미니멀하고 뉴트럴한 공간을 연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거울로만 바닥을 채우고, 쇼케이스 또한 즐겨 사용하던 오방색을 배제한 블랙 앤 화이트 톤 작업으로만 배치했다. 1층은 뉴트럴한 색감을 사용해 안정적으로, 색이 들어간 작업은 지하층의 영상 작업과 함께 보이도록 했다.

    로통드의 거울을 40년간의 작업을 모은 쇼케이스가 둘러싸고 있다. 김수자라는 작가가 이끌어온 시간과 활동에 대한 오마주로 느껴진다.

    그렇게도 볼 수 있겠다. 2013년 밴쿠버 아트 갤러리에서 33년 활동을 모은 회고전 <펼침(Unfolding)>을 선보인 적 있지만 지금처럼 장엄한 설치물을 중심에 놓고 이런 전시를 여는 건 작가로서도 매우 특별한 일임에 틀림없다.

    거울 설치 과정 중 어려운 점은 없었나? 어떤 종류의 거울이 사용됐는지도 궁금하다.

    강화유리라고 불리는 템퍼드 미러가 사용됐다. 사람들이 올라서도 잘 깨지지 않는, 무게를 잘 감당하는 거울이다. 바닥에 펠트 천을 깔고 우드 패널을 넣은 후 거울을 올렸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프로세스만 본다면 간단하다고 할 수 있다.

    로통드 바닥 전체에 거울을 깔겠다고 했을 때 미술관 측 반응은 어땠나?

    매우 긍정적이었다. 특히 프랑수아 피노 회장의 반응이 그랬다. 피노 회장은 의외로 새로운 작업을 접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지난해 베니스에 있는 피노 컬렉션의 또 다른 미술관인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의 루프톱에서 선보인 미러 작업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엠마가 더 확신을 가지고 회장을 설득해 카르트 블랑슈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여담이지만 매일 내려와서 본다고 한다.(웃음)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 미술관에서 작품과 하나가 된 김수자 작가.

    주말에 많은 사람이 각자의 방식대로 그곳을 즐기는 광경을 봤다. 돔 중앙을 관찰하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상 중인 이들까지 보였다. 이런 관람객의 반응을 예상했나?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크리스탈 궁전, 베니스의 푼타 델라 도가나 전시 때도 그랬다. 명상을 위한 장소로 활용하는 사람들을 항상 보아왔다. 나는 건축물 자체를 하나의 보따리로 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돔 형상을 발아래 깔면 완전한 구형의 공간을 완성한다고 여겼다. 달항아리를 만들 때 2개의 반구형을 연결하는 방식처럼 말이다. 크리스탈 궁전에서도 거울 작업을 했지만 이곳은 완벽한 돔이기 때문에 달항아리 방식이 더 말이 된다. 그리고 초대하는 관람객을 공연 배우라고 여긴다. 그들은 인지하지 못하지만 내가 관람객이 되어 배우들이 이 공간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반응하는지 살핀다. 그들은 현재를 반영한다. 실제 보따리 안에 헌 옷이 있다면 여기 보따리에는 현실, 즉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움직임이 있다.

    대본 없는 퍼포먼스가 공간에서 연출되고 있지만 작가로서 조금이라도 관람객에게 기대하는 부분이 있나?

    관람객을 향한 기대는 없지만 어떤 방식이든 자연스럽게 사람들에 의해 이 공간이 계속 움직였으면 좋겠다. 매번 다른 형태의 숨을 불어넣는 다양한 활동이 이곳에서 지속되길 바란다.

    도자기, 보따리라는 한국적 소재가 이국적인 공간에서 웅장하게 재현됐다는 점이 한국인으로서 매우 의미 있게 느껴진다.

    내가 해오던 작업의 궤적이 한국의 문화, 색, 형태, 구조에 근거하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철학 또한 기초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거울은 단순한 산업 소재를 넘어 나에게는 더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캔버스 역할을 한다. 그 캔버스 위에서 우리의 시선이 자신과 타인을 보면서 바느질을 하고 그렇게 자신의 실체를 더 이해하게 돕는다. 그게 바느질이라는 행위의 목적이다. 그래서 거울을 하나의 경계로 보고 또 다른 나로도 보는 지속적인 행위의 바느질이 모인다. 어떤 의미에서는 거울을 펼쳐진 바늘로 해석하고 있다. 그야말로 이 공간에 모인 사람들은 감싸면서 동시에 펼치는 역할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웅장함 속에 작가로서 그동안 사유하고 발전시킨 핵심 질문이 모두 담겨 있다. (VK)

    양윤정(예술 칼럼니스트)
    사진
    Jean 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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