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친애하는 이방인에게, 클레어 퐁텐으로부터

2024.04.29

by 김나랑

    친애하는 이방인에게, 클레어 퐁텐으로부터

    유명 문구 브랜드의 이름을 차용한 컬렉티브 아티스트 클레어 퐁텐은 지금 가장 논쟁적인 작가 중 하나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의 주제 역시 이들의 작업에서 착안한 것이다.

    2004년부터 클레어 퐁텐으로 활동해온 풀비아 카르네발레와 제임스 손힐.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와 아랍 국가에서 흔히 보이는 야외 도자 타일의 풍경을 재현한 ‘컷 업(Cut-Up)’ 바닥 위에는 ‘이민자들(Migrants)’이라고 명명한 가짜 레몬이 놓여 있다.

    고급 브랜드와 성형의 메카, 강남의 중심에 위치한 아뜰리에 에르메스 앞마당에는 ‘Beauty is a Ready-made’라는 커다란 네온사인이 걸려 있다. 이 상징적인 문구는 이곳에서 6월 9일까지 열리는 클레어 퐁텐(Claire Fontaine)의 아시아 첫 개인전 제목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출신의 미술 이론가 풀비아 카르네발레(Fulvia Carnevale)와 영국 미술가 제임스 손힐(James Thornhill) 부부가 2004년 파리에서 설립한 클레어 퐁텐은 예술품을 만들고 글을 씀으로써 미술 시스템을 비롯한 기존 질서에 대항한다. 프랑스의 유명 문구 브랜드의 이름이자 맑은 샘(Clear Fountain)을 뜻하는 클레어 퐁텐은 레디메이드를 새로운 미술 개념으로 도입한 마르셀 뒤샹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는 가장 논쟁적인 작가 중 하나인 이들의 작품에서 본전시의 주제를 따왔다.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Foreigners Everywhere)’는 서로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나 소수자 문제뿐 아니라 “모르는 대상과 마주했을 때 비로소 윤리의 문제가 시작된다”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여러 언어로 번역된 이 네온 조각 작품은 서울 전시에 맞춰 한국어를 추가했다.

    레디메이드에 대한 클레어 퐁텐의 질문에 초점을 맞춘 이번 전시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사물로 시각적 서사를 구축하고 있다. 전시장 바닥을 가득 메운 신작 ‘컷 업(Cut-Up)’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와 아랍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야외 도자 타일 풍경 사진을 시트지로 출력한 것이다. 작가들이 거주하는 이탈리아 팔레르모 집 안뜰 바닥의 질감을 재현한 바닥과 그 위에 놓인 레몬은 언뜻 이국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해 보이지만 전시된 모든 것은 현대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슬그머니 드러낸다. 일례로 똑같은 모양의 딱딱한 플라스틱 레몬은 화이트 큐브에 대한 비판으로서 공간의 연속성을 방해한다. 더불어 작가는 이 레몬 조각을 ‘이민자들(Migrants)’이라 명명함으로써 관람객으로 하여금 발길에 채이는 레몬을 다시 보게 한다.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를 앞두고 서울을 찾은 클레어 퐁텐을 만나 궁금한 이야기를 물었다.

    작가 너머로 보이는 작품은 베니스 비에날레 본전시 주제기도 한 ‘Foreigners Everywhere’, 한국어를 포함해 60개 언어로 제작되었다.

    서울에 온 것을 환영한다. 소감이 어떤가?

    한국은 처음이다. 여긴 모든 것이 깨끗하다. 내 말은, 우린 ‘쓰레기는 어디에나 있다(Rubbish Everywhere)’고 할 만한 도시에서 왔으니까. 사실 어디든 도시는 전혀 흥미롭지 않다. 정말 그 나라를 보려면 교외로 나가야 한다. 모든 도시는 통제된 공간이니까. 매우 체계적이고 고급화되어 있다. 여기에선 이 나라의 진짜 질감을 느끼기 어렵다.

    클레어 퐁텐의 웹사이트에 방문했다가 재밌는 걸 발견했다. 당신들이 현재 있는 곳과 그곳의 날씨, 현지 시간이 실시간으로 떴다. 덕분에 지난 일요일부터 당신들이 서울에 있었단 걸 알게 됐다.

    바를 클릭하면 오늘의 장소와 날짜가 나온다. 제임스가 웹 디자이너와 협업했는데 ‘변화하는 아카이브(Changing Archive)’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다. 사실 클릭했을 때 바로 그 내용이 뜨지 않아 짜증이 날 수도 있다. 하하.

    이 같은 작은 장치를 통해 방문자가 작품보다 작가의 존재를 먼저 알아본다. 아카이빙된 작품 역시 과거의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인식하게 한다.

    창작의 산물보다 창작 과정에 많은 감각을 제공하는 것, 우리의 작업을 지나간 과거의 시각 자료로 그치지 않게 하려는 시도다. 우리는 창작 과정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다. 사유는 선형적 흐름에 따라 전진하는 게 아니라 나가고 되돌아오길 반복한다. 동일한 직관이 다른 형태와 다른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웹사이트는 이런 리좀적 사유를 토대로 하는 우리의 작업을 반영하고 있다. 거기엔 방문객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다. 혹시 보았나?

    경력 사항이 적힌 작가 소개 대신 ‘Dear, Visitor’로 시작되는 편지 한 통이 있었다. 2017년 5월 22일 프랑스 몽트뢰유에서 작성한 것이었다. 왜 이런 편지를 썼나?

    웹사이트를 만들기 시작한 날짜다. 프랑스를 떠나 이탈리아에서 살기로 결심한 때이기도 하고, 우리 삶의 꽤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편지는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와 전시장을 벗어난, 전시의 맥락 밖에서 행해지는 작업과 활동에 대한 바람을 담고 있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에게 그런 우리의 바람이 닿길 바랐다. 그거야말로 인터넷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니까.

    ‘Untitled (Protection)’, Industrial frameless LED lightbox with pearl vinyl digital print, 156×277×10cm, 2018

    아시아 첫 개인전이다.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밀라노와 로마에서 개인전을 하고 있을 때, 안소연 큐레이터(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아티스틱 디렉터)가 전시장을 방문했다. 서울 전시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제시했고, 그때부터 대화를 통해 함께 전시를 만들어갔다. 마법과도 같은 멋진 경험이었다.

    전시 작품을 선별하고 공간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에르메스’라는 브랜드가 어떤 영향을 미쳤나?

    전시 내용이 에르메스라는 브랜드의 영향을 받았냐고 묻는 거라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겠다. ‘Beauty is a Gesture’라는 에르메스의 광고 문구는 우리 작품 중 하나를 연상시키기도 하니까. 실제로 그 광고가 우리에게서 영감을 받은 건지는 잘 모르지만 말이다.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Beauty is a Ready-made)’는 전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어떤 뜻인가? 여기에서 ‘아름다움’은 ‘예술’로 대체될 수 있을까?

    글쎄. 모든 예술이 레디메이드라고 여기진 않는다. 이 제목은 아름다움의 개념이 사회적·문화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정의된 것이기 때문에 논의가 가능하다는 걸 강조한다. 윤리적인 측면에서 말이다. 우리가 사람이나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할 때 그건 아름답지 않은 것과 연관된다. 자연스러운 외모, 다양한 체형의 여성들에 대한 포용이나 인종차별 문제를 논의할 때, 핵심 질문은 빠져 있다. 중요한 건 부정하고 배제해온 다른 유형의 것들을 어떻게 기존 고정관념에 포함시키느냐가 아니다. 그보다는 모순된 고정관념 자체를 바꿔야 한다.

    아뜰리에 에르메스가 위치한 장소는 성형의 메카 강남이다. 그렇다 보니 이 단어가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맞다. 우리도 이 지역의 특수성에 대해 알고 있다. 흥미로운 지점이다. ‘럭셔리’는 배타적이기 때문에 사람과 사물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사회계층에 대해 애기할 때, 예를 들면 이방인의 생각을 얘기한다고 치자. 이방인은 누구인가? 그 이방인은 자기가 이방인이라고 여길까? 그들은 이방인이 아닌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사람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묘사다. 아름다움의 개념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만약 아름다움이 소셜 미디어가 유발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안과 슬픔을 의미한다면, 그건 아름다운 것일까?

    클레어 퐁텐이라는 작가명은 마르셀 뒤샹의 ‘샘(Fontaine)’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당신들은 여기에 ‘클레어’를 추가해 프랑스의 문구 브랜드와 같은 풀 네임을 만들었다. ‘클레어’가 꼭 필요했던 이유는?

    이름이니까. 하하. 파리에서 살 때 우리 집이 이 문구 브랜드의 창고와 매우 가까웠다. 거리를 오갈 때마다 클레어 퐁텐을 마주쳤는데, 그 이름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정말 아름다웠다. 클레어 퐁텐이 문구류의 대명사처럼 들린다는 점도 재미있었다.

    클레어 퐁텐은 특히 공책으로 유명한 브랜드다.

    그러니까 클레어 퐁텐이라는 이름의 첫 번째 아이디어는 흰 종이라고 할 수 있다. 깨끗하고 분명한, 그야말로 클리어한 출발점이다. 또 이 이름에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 아이디어가 투명하게 드러나길 바랐다. 순환과 흐름, 생명력, 창조성이 바다를 이룬다는 시인 루미의 아름다운 시를 인용한 부분도 있다. 클레어 퐁텐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아이디어를 얻고 우리의 주관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이 이름은 우리의 주체성을 담는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름에는 또 누가 포함될 수 있을까?

    퐁텐은 브루스 나우먼의 ‘샘(Fontaine)’이기도 하다. 1970년에 프린트된 ‘샘으로서의 자화상(Self-portrait as a Fountain)’에서 브루스 나우먼은 두 팔을 벌린 채 입에서 물을 내뿜는다. 여기에서 그는 ‘레디메이드’의 위치에서 자신의 작품은 물론 그 스스로를 ‘레디메이드’로 지칭한다.

    두 사람은 클레어 퐁텐의 조수임을 자청한다. 예술 비평가이자 페미니스트 운동가인 카를라 론치(Carla Lonzi)의 선언문이 클레어 퐁텐의 결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들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우리의 하루는 조수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매일 각자 자신의 비서로서 메일을 보내고 잡무를 처리한다. 그와 동시에 작업을 하고, 아이도 돌본다.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건 창작 과정을 돕는 일이고, 작가는 일종의 안내자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산파로 불린 건 그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지만 미처 깨닫지 못한 진실을 그들로부터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클레어 퐁텐은 항상 잔인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유혹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오, 아름다워’와 같은 말로 사람들을 유린하거나 아름다운 몸짓으로 억압하지 않는다. 언제나 예술가로서 그리고 관객으로서 우리가 처한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예술이 천부적인 재능이라도 되는 것처럼 관객이 우리를 우러러보게 하거나, 작품 뒤에 숨고 싶지도 않다. 그건 정직하지 못하고, 가부장적인 방식이다. 카를라 론치는 그런 점을 비판했고, 이 같은 논지는 우리의 레퍼런스 중 하나다. 조
    수가 된다는 건 그런 위계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그런 관계에서 작가와 관객은 진정한 협업을 통해 창작 과정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클레어 퐁텐은 에두아르 마네, 칼 안드레 같은 예술사에서 중요한 작가들의 그림이나 표현 방식의 일부를 가져와 현대적인 레디메이드 재료와 함께 당신들만의 개념으로 재생산한다. 전시에선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의 벽화, 조토(Giotto)의 프레스코화 같은 중세의 그림이 LED 라이트박스로 전시되었다. 당신들이 과거로부터 가져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적인 순간이나 작가의 이름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보다는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들은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불가사의한 면모가 있다. 예를 들어 ‘새들을 위한 설교’ 원작의 일부를 선택한 이미지 속엔 사람은 없고 성 프란체스코의 손만 보인다. 자유롭고 일할 필요도 없는 새들의 삶에 대한 성인의 찬사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인간 본위의 서사에서 소외돼 있던 인간 외의 생명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아름답고 흥미롭다. 이 작업은 우리의 삶을 바꿔놓기도 했다. 1년여 전쯤 우리 아들이 새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고 지금은 세 마리의 앵무새, 고양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덕분에 새들이 놀라운 유머 감각을 지녔다는 것도 알았다. 아마 성 프란체스코는 우리가 알지 못한 새들에 대한 무언가를 정말로 이해했던 것 같다.

    라이트박스 작품에는 금이 간 자국이 보인다. 의도한 것인가?

    액정 화면이 깨진 휴대폰으로 찍었기 때문이다. 사진의 해상도는 낮은데 금이 간 부분은 매우 선명하게 보여 이상한 대비를 이룬다. 내 생각엔 표준이란 건 우리가 뭔가를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더 잘 보기 위해 크게 부풀려 보더라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여기에는 판독이 불가한 파손된 부분을 보이는데, 이 작업들은 모두 회복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린 이 망가진 휴대폰을 어디든 가지고 다니는데, 휴대폰 화면을 통해 관찰되는 다른 점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우린 여전히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예를 들면 지구온난화 문제나 페미니즘 같은 것. 보호란 이런 이미지에 사용되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의미의 재생산 과정을 설명할 때 ‘전유(專有, Appropriation)’가 아니라 ‘수용(收用, Expropriation)’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데리다의 맥락에서 수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몰수와는 조금 뜻이 다르다. 어떤 의미인가?

    수용의 개념은 회복과 복구를 강조하는 것이지 뭔가를 빼앗는 게 아니다. 우린 항상 재산과 소유권의 개념에 대해 논의하는데, 이는 과거의 것 혹은 다른 맥락에서 새롭게 재개될 수 있다고 본다. 레디메이드의 경우처럼 다른 맥락에서부터 온 것들은 또 다른 힘을 부여한다. 역사 속에서 의미를 추출하려 애쓰는 건 오늘날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이건 중요한 자세다.

    예술 작품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도 수용의 대상이 된다. 한국 같은 아시아 문화권의 무언가가 클레어 퐁텐의 작업 소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서구 중심의 주류 예술사에서 아시아는 늘 변방에 위치했다.

    현대미술이 특정한 표현 방식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럴 것이다. 서구적인 현상이고 미국, 특히 추상미술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서구 전체는 아니다. 이탈리아엔 아르테 포베라가 있지만 현대미술의 주류를 비판하던 거대한 예술적 아방가르드 같은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모든 나라가 현대미술을 창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현대미술이 무엇인지,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규범이 없다면 환상적일 것이다. 이런 규범을 해체하는 연구가 더 있을 거라 믿는다. 오히려 현대미술의 창조에 참여하지 않았던 나라들이 오늘날 새로운 실험의 장에서 현대미술에 대해 다른 것을 가르쳐줄 수 있길 바란다. 아마 이것이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의 목표일 것이다. 예술감독인 아드리아누 페드로자(Adriano Pedrosa)는 서구의 스타 작가들을 불러 모으는 대신 다른 관점에서 다른 서사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부분일 것이다. 다른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건 그들과 함께 뭔가 다른 것을 하기 위해서다. (VK)

    이미혜
    사진
    이우정, 김상태 ©에르메스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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