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에는 자연으로 그린 입체적인 추상화가 있다

2024.05.14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에는 자연으로 그린 입체적인 추상화가 있다

저는 천을 묶고 실로 꿰어 만들어내는 조각, 즉 ‘부드러운 조각’을 좋아합니다. 예컨대 루이즈 부르주아 같은 여성 작가들이 텍스타일과 바느질 등을 활용한 부드러운 조각 작업을 선보이곤 했죠. 일상적이며 여성적인 작업은 바로 그 이유로 주류 미술계의 인정을 온전히 받는 데까지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습니다. 예술과 가사 노동, 공예와 미술의 모든 특성을 두루 겸비했다는 태생적 장점이 현대미술계에서 오히려 약점이 된 거죠. 그런 면에서 또 다른 예로,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 섬유공예가 이신자 작가의 개인전 연계 강연 제목이 ‘시대를 직조한 섬유공예가’였던 건 우연이 아닌 듯하군요.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에서 만난 셰일라 힉스의 전시(9월 8일까지)가 반가웠던 이유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순수 예술과 응용 예술의 장벽을 허물어온 그녀가 선보여온 일명 ‘텍스타일 아트’는 묵묵히 자기 역할을 다하며 가치 있는 작업을 탄생시키기 위해 고투한 ‘여성 미술사’의 증거와 같기 때문입니다.

셰일라 힉스, ‘착륙’,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전시 전경.
셰일라 힉스, ‘착륙’,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전시 전경.

1950년대 후반, 예일 대학교에서 예술학을 전공한 셰일라 힉스는 이후 더 흥미로운 행보를 보입니다. 장학금을 받아 다름 아닌 칠레로 유학을 떠났고, 안데스산맥 곳곳의 유적지와 위빙을 하는 원주민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으며, 졸업 논문을 쓰기 위해 잉카 시대 이전 텍스타일 전문가인 라울 다르쿠르를 만났습니다. 멕시코와 프랑스 등에 살면서 예술, 디자인, 장식 분야를 넘나드는 예술적 연구를 이어가기도 했죠. 그래서인지 셰일라 힉스의 작업에는 대륙을 넘나드는 다양한 문화적 에너지가 담겨 있습니다. 작가가 경험으로 발견한 전통과 장인 정신은 자기 작업에 깊이 전제된 모더니즘, 추상화, 서양화 같은 주류 미술사의 한 부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듭니다.

‘착륙’, 2014, 색소, 아크릴 섬유, 가변 형태, ©Sheila Hicks / Adagp, 2024, 사진: ©Kwa Yong Lee / Louis Vuitton
‘벽 속의 또 다른 틈’, 2016, 나뭇가지, 면, 리넨, 색소 아크릴 섬유, 가변 형태, ©Sheila Hicks / Adagp, 2024, 사진: ©Kwa Yong Lee / Louis Vuitton

남미의 위빙 전통뿐 아니라 건축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진 작가답게, 프랭크 게리가 건축한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의 꼭대기 전시장을 채운 힉스의 작업은 건축적 묘미까지 잘 살리고 있습니다. 전시 제목이자 대표작 ‘착륙(Atterrissage)’은 이 공간을 수평, 수직으로 연결하는 동시에 확장합니다. 섬유 덩어리가 똬리를 틀고 있고, 그 위로 폭포나 무지개 혹은 덩굴처럼 색색의 실이 쏟아져 내려오는 형상입니다. 동물적인 동시에 식물적인 작업이 서울 도심 한가운데 ‘착륙’해 또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진입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그 너머로는 커다란 섬유 덩어리를 쌓은 작품 ‘벽 속의 또 다른 틈(Another Break in the Wall)’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양모로 만든 입체적인 추상화 같은 튜브 작업은 또 어떤가요. 이렇게 풍부한 색감이 회화의 영역이라면 부피는 거대한 조각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회화적인 동시에 조각적으로 생생히 살아 있는 작업을 펼쳐냅니다.

‘토킹 스틱’, 2016, 색소 아크릴 섬유, 면, 리넨, 스틱, 점판암, 가죽, 가변 형태, ©Sheila Hicks / Adagp, 2024, 사진: ©Kwa Yong Lee / Louis Vuitton
‘토킹 스틱’, 2016, 색소 아크릴 섬유, 면, 리넨, 스틱, 점판암, 가죽, 가변 형태, ©Sheila Hicks / Adagp, 2024, 사진: ©Kwa Yong Lee / Louis Vuitton
셰일라 힉스, ‘착륙’,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전시 전경.

“자연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기후와 빛은 공간에 영향을 미친다. 나의 모든 작품은 특정 장소에 거주하며 역사, 온도, 건축물을 존중한다.” 전시장에 비치된 책을 뒤적이다 발견한 작가가 직접 쓴 문장입니다. 실제 셰일라 힉스가 주로 사용하는 양모, 리넨 같은 재료는 그 자체로 자연이 주는 선물이나 다름없고, 그래서 그녀의 작업은 자연의 손길을 빌린 추상화와 같습니다. 힉스는 낯선 이국의 리넨 공장에 방문했을 때도, 남미의 이름 모를 장인들을 만났을 때도, 자연이 선사한 재료를 대할 때도 존중의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시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힉스의 작업이 품은 유연하고도 자유로운 실험 정신은 바로 그만의 인류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날 전시장을 나올 때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상쾌했던 이유가 단순히 활기찬 원색 때문만은 아니었던 겁니다.

정윤원(미술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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