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투라는 기욤 앙리의 ‘미션’
기욤 앙리는 빠투에서의 자기 역할을 ‘미션’이라고 표현했다. 그 겸손한 단어에서 브랜드에 대한 존경과 사랑, 열정과 포부를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그냥 블랙 티셔츠가 나은 것 같죠?” <보그> 촬영 시간보다 20분이나 일찍 스튜디오에 온 기욤 앙리(Guillaume Henry)는 도착하자마자 직접 준비해온 ‘촬영용’ 의상을 나에게 보여줬다. 두 가지 색 셔츠를 꺼내려다 다시 넣고는, 입고 온 청바지 대신 로에베 하이 웨이스트 진과 흰색 컨버스로 갈아 신었다. “이 드레스 한 벌 때문에 이틀 전 본사에서 한 명이 비행기를 타고 왔어요. 이렇게 쓰이니 뿌듯하군요.” 바다 건너온 빠투(Patou)의 도트 무늬 드레스를 입은 모델과 나란히 선 기욤은 카메라가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에너지가 흘러넘쳐요. 우아하면서도 즐거운 분위기가 나는 게 굉장히 ‘빠투’스럽군요!” 촬영은 순식간에 끝났다. 잠깐의 휴식 후 바로 이어진 인터뷰 시간, 브랜드 담당자는 그가 서울을 떠나기 전 하고 싶은 것이 많다고 귀띔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려 했지만, 기욤은 무엇이든 분명하길 원했다. 어떤 질문이든 허투루 답하지 않았고, 답변이 부족하다 싶으면 설명을 추가했다. 결국 예상 시간을 훨씬 넘겼다.
일정이 빠듯했다. 피곤하지 않나?
괜찮다. 시차 적응을 하려고 비행기에서 한숨도 안 잤다. 이번에는 적응이 수월했다.
서울은 세 번째 방문이다.
서울은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다. 서울의 공기, 길거리에서 느낄 수 있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있다. 일정이 짧긴 했지만, 그런 힘을 느끼는 데 반드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아니다. 오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은 패션, 음식, 영화,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항상 새로움을 보여주며 세계를 놀라게 한다.
빠투의 첫 번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첫 출근 날이 기억나나?
물론이다. 그날은 정말 혼자였기 때문이다.(웃음) 빠투가 새로 시작한 것은 아주 기적적인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1986년 크리스찬 라크로와를 마지막으로 장 빠투(Jean Patou)라는 유서 깊은 브랜드가 문을 닫은 지 30년이나 지난 뒤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름만 존재할 뿐 새롭게 창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본사도 없이 출근한 나는 새로운 CEO와 함께 빠투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새로운 전략을 세우며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벌써 5년이 되었다. 기욤의 빠투는 무엇이 다른가?
가장 큰 차이라고 한다면 이름 자체가 ‘장 빠투’에서 지금의 ‘빠투’로 바뀐 것. 조금 더 일반적인 느낌의 브랜드이길 원했다. 빠투 안에는 지금까지의 유산이 분명 남아 있다. 창립자 장 빠투는 여성복에 스포츠웨어를 처음 도입했고, 1950년대 칼 라거펠트는 옷의 실루엣을 강조했고, 1980년대 크리스찬 라크로와는 판타지를 실현했다. 이 모든 것이 빠투다. 하지만 빠투를 굉장히 젊고 트렌디한 브랜드로 알고 있는 사람도, 이렇게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오랫동안 침묵한 채 활동하지 않던 브랜드였기 때문에 초반에는 새롭고 신선한 에너지를 불어넣는 게 중요하다고 여겼다.
지금 세대가 빠투의 역사를 모르는 건 사실이다.
아쉽거나 서운하지는 않다. 패션은 계속 변하는 것이 아닌가. 중요한 건 장 빠투의 철학을 지금 빠투에 녹여내는 것이다. 그게 나의 미션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앞서 언급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의 공통점도 있다. ‘삶을 살아가는 즐거움’이다. 이것은 빠투 디자이너 모두를 관통하는 철학이다.
컬렉션을 구상할 때 여러 대상이 아니라 단 한 명의 여성을 선정한다고 들었다.
한 사람에게서 여러 가지 느낌과 분위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다양한 면이 있다. 그것을 표현하면서 컬렉션이 다채로워진다. 그 순간의 에너지를 캐치해내는 것이 디자이너로서 내 신념이다. 지난 시즌에는 새롭고 팝적인 것에 집중하다 보니 춤을 추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디자이너가 그런 컬렉션을 선보이면, 관객도 같이 즐길 것이라 간주했다. 2024 S/S 컬렉션에는 ‘댄싱 다이어리(Dancing Diaries)’라는 이름을 붙였다.
2024 F/W 컬렉션은 ‘Hiver 24(겨울 24)’다.
더 이상 춤추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웃음) 실용주의에 입각한 작명이다. 물론 이번 컬렉션은 우아하고, 품위 있고, 영원한 것에 초점을 맞췄다. 동시에 즉각적이고 단순한 성격을 담고 싶었다. 역사적 순간을 표현하는 기호를 사용해 역사적 사건처럼 보이기 위한 시도도 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표면적이라고 여겼다. 그 안에서 굉장히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최대한 간결하게 지었다.
전반적으로 유니폼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처음 듣는 감상 평이다. 그런데 유니폼은 내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개념이라 굉장히 신기하다. 유니폼은 유니폼이되, 긍정적인 의미다. 빠투의 큰 철학 중 하나가 ‘즐거움’이지 않은가. 이번 컬렉션을 위해 떠올린 여성은 품위 있으면서도 의지가 강하고 진취적이다. 의상을 보면 어깨가 크거나 주머니가 많다. 옷에 달리는 장식 요소를 대체하는 거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컬렉션을 대표하는 룩을 하나 꼽자면?
컬렉션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완성품이라 하나만 선택하기는 어렵다. 대신 대표적인 아이템은 고를 수 있다. 오프닝 룩에 나온 카멜색 코트다. 외부에서 활동하는 여성이 실제로 입을 만한 옷이기 때문이다. 안전한 느낌을 주는 코쿤 실루엣 코트는 소재 역시 따뜻하고 부드럽다. 오버사이즈라서 레이어드도 가능하고, 단독으로 드레스처럼 입을 수도 있다.
아쉽게도 오늘 촬영에 그 코트가 빠졌다.
대신 이브닝 드레스가 있어 기쁘다. 사실 빠투가 강조하는 것은 당장 일상에서 입을 수 있는 옷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이브닝 드레스를 만든 것이 빠투로서는 첫 시도였다. 품위 있고, 열정적이고, 진실성 있는 여성이 특별한 순간에 입을 수 있는 옷을 선물하고 싶었다. 빠투가 실용적인 옷을 주로 만들긴 하지만, 그 안에 있는 판타지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의상이 이번 이브닝 드레스였는데, 오늘 촬영에 함께해서 만족한다.
재고 가죽으로 가방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에는 전 컬렉션을 100% 리사이클링 소재로 만들었다.
빠투 팀의 다양한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늘날 패션계는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이 쏟아져 나오기에 환경을 의식하는것이 중요하다. 나 역시 환경 문제에 대해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더 가속화하지 않는 것에 중점을 두고 컬렉션을 전개하는 것이다. 패션 역시 내가 가진 열정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가치 있는 소비를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모든 소재를 재활용 혹은 유기농 소재를 사용하는 빠투 컬렉션이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빠투를 세 가지 키워드로 정의한다면?
신선함, 우아함, 영원함.
요즘 가장 큰 관심사는?
패션을 제외하면 정치 문제다. 정치에 대해서는 궁금해야 할 의무가 있다. 사회가 점점 세계적으로 엮이는 양상이다 보니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반면, 표면적이고 가벼운 것을 통해 머리를 비우는 시간도 갖는다. 그중 하나가 넷플릭스 시리즈 <피지컬: 100>이다. 최근 완전히 빠졌다. 아직 보지 않았다면, 강력하게 추천한다.
무엇이든 빨리 변하는 시대다. 영원히 변치 않길 바라는 것이 있다면?
‘즐거움’이라는 가치!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것을 할 때 느끼는 기쁨.
인터뷰가 끝나면 무엇을 할 예정인가?
쇼핑!
특별히 갖고 싶은 것이 있나?
그것도 있지만, 궁금해서다. 사람들의 욕구가 발현되는 모습을 실제로 보고 느끼고 싶다.
일의 연장선이 아닌가?
일과 여가의 조합이라 괜찮다. 오전에 탬버린즈에 다녀왔다. 단순한 쇼핑이 아니라 경험이 담긴 쇼핑이었다. 이런 것을 빠투에 도입하고 싶은 거다. 그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빠투를 통해서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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