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전시, 제주
기억을 잃는다면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하지만 지난날의 기억이 삶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제주 포도뮤지엄에서 ‘기억’ ‘정체성’ ‘가족’ ‘추억’를 다루는 전시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이 내년 3월 20일까지 열립니다.
전시는 인지 저하증(치매)을 매개로 기억과 정체성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이 주제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죠. 국내외 작가 10여 명(알란 벨처, 루이스 부르주아, 셰릴 세인트 온지, 정연두, 민예은, 로버트 테리엔, 더 케어테이커 & 이반 실, 데이비드 벅스, 시오타 치하루, 천경우 등)이 참여했습니다. 작가들은 기억상실과 혼란이 꼭 처참한 결론은 아니라고,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생명력이 넘쳐나는 여름이지만, 포도뮤지엄의 전시로 숨 고르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듯합니다.
셰릴 세인트 온지의 어머니는 예술가이자 조류 관찰자였습니다. 하지만 2015년 혈관성 치매를 진단받았죠. 상심하던 작가는 어느 날 햇살 아래 어머니의 모습에서 명랑하고 밝은 순간을 발견해내고, 이를 카메라에 담기로 합니다. 이 작품은 노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태도를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1970년대생 아티스트 더 케어테이커와 이반 실이 합작해 꾸민 이 공간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새벽처럼 짙푸른 공간에 들어서니 독특한 선율이 흐릅니다. 더 케어테이커가 알츠하이머로 기억이 상실되는 과정을 음악으로 구현한 것이지요. 본래 6시간의 곡을 전시를 위해 22분 정도로 편집했습니다. 노이즈가 섞이고 음이 무너지면서 음악이라기보다는 그저 소리에 가까웠는데요. 뒤섞이고 잃어가는 기억 때문에 혼란스러운 상태를 표현하는 것 같아 애잔해집니다. 이반 실 역시 형체를 잘 알아보기 힘든 정물화를 그렸습니다. 누군가에겐 같은 물건도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것이죠. 인지 저하증을 지닌 이들의 시각과 청각을 한 번쯤 그려보는 시간으로,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아름다움일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국내에 처음 선보입니다. 작은 방 안 낡은 가구 곳곳에서 작가가 직접 쓴 글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I need my memories. They are my documents(나에겐 기억이 필요하다. 그것은 나의 기록이다)”입니다. 오래 투병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정연두 작가의 ‘수공기억’은 관람객에게 크게 호응을 얻은 작품으로 꼽힙니다. 두 채널의 비디오 작품으로 왼쪽 화면에는 여섯 명의 노인이 과거 기억을 회상하고, 오른쪽 화면에는 붉은 작업복을 입은 크루들이 그 이야기 속 장면을 재연합니다. 안국동, 종묘, 탑골공원에서 만난 노인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품고 늙어갈까요?
- 사진
- 포도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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