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세대가 등장했다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다고 단정하지 말길. 온라인 광야에서 이미지 시대를 이끈 디지털 네이티브들이 새로운 독서 흐름을 만들고 있다. 이들에게 텍스트는 힙이고 시는 숏폼이다.
“Reading is so sexy.” <가디언>이 새로운 아이콘인 2001년생 모델 카이아 거버의 북 클럽을 소개하며 뽑은 헤드 카피다. 카이아는 자신의 북 클럽 ‘라이브러리 사이언스(Library Science)’를 이렇게 설명했다. “책을 공유하고 새로운 작가를 주선하고 선망하는 예술가들과 대화하면서, 나만큼 문학에 흥미를 가진 이들을 위한 커뮤니티 플랫폼이죠. (중략) 책은 언제나 내 인생의 사랑이었고, 독서는 너무 섹시해요.” 그녀의 북 클럽 사이트에 접속해본다. “젊은 목소리에 초점을 맞춘다”고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구찌의 성평등 캠페인 연사로도 참여한 활동가인 작가 클레오 웨이드(Cleo Wade)와 카이아가 나눈 32분짜리 대화 영상이 올라와 있다. 카이아는 오프라인 모임을 열어 직접 사회도 본다. 최근 LA의 장미 정원에서 열린 모임은 소피아 코폴라 영화의 피크닉 장면 같았다. 하프가 연주되고 소설 낭독이 이어진다. 하얀 양산을 쓴 젊은이들이 각자의 자세로 널브러져 책을 펼치기도, 잠들기도 한다. 녹음, 햇살, 젊음, 책이라니. 이런 독서회라면 나도 끼고 싶었다. 역시 뭐든 아름다워야 한다.
독서회를 찾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10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솔로였던 나와 친구는 외로움에 시위하듯 ‘특별한’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번화가의 술집이나 클럽은 심신을 허하게 만들 뿐이라며 찾은 것은 밤샘 독서회였다. 일몰부터 일출까지 책을 읽으며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컨셉이었다. 친구의 차를 타고 도착한 파주출판도시. 모두가 퇴근한 그곳은 템플스테이의 밤처럼 어둡고 고요했다. 행사를 주최한 민음사 사옥에 들어서니 천장까지 책이 가득했다. 그때까지는 설렜던 것 같다. 뭘 읽을지 한참 고르다가 문학 전집에서 몇 권을 빼 들고 나무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딱딱해서였을까. 엉덩이가 아파왔다. 난방을 너무 틀었을까. 눈이 뻐근해졌다. 그냥 졸리고 지루했던 거다. 이거 언제까지라고? 심야 영화 보는 거랑은 다르네. 친구와 이런 대화를 나누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차를 빼러 갔다. 기분 탓인지 주차장이 아까보다 한산한 것 같았다.
낭독회도 몇 번 갔다. 후배 프랑스어 번역가가 주최한 행사인데, 꼭 불문학이 아니라도 좋아하는 글귀를 낭독하고 이야기 나누는 모임이라고 했다. 퇴근하고 밤 8시, 연남동의 작은 책방 문을 열었다. 주최자 빼고는 모두 여성이었다. 우리는 동그랗게 의자에 모여 앉아 돌아가며 낭독했다. 나는 <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에서 ‘모험’을 묘사한 문구를 읽었다. 그런 이미지를 추구하던 시절이었다. 자신이 쓴 글을 낭독한 참가자도 있었다. 우린 너무 좋았다, 인상적이었다 정도의 감상을 주고받은뒤 마무리했다. 밤 10시. 집에 가기 아쉬운 나는 주최자와 닭강정에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피곤하게 이런 걸 왜 해?” 그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글과 대화”라고 대답했다. 지금 돌아보면 10년 전 그는 이미 요즘 독서의 키워드를 예견한 셈이다.
카이아 거버 같은 Z세대에게 독서, 낭독회, 북 클럽 등이 떠오르고 있다. 여전히 독서량은 OECD 최하위라지만, 20대 독서율은 74.5%로 성인 독서율 중 가장 높았다.(2023년 국민독서실태조사) 동네 책방을 운영하는 친구 J도 처음 책방을 연 8년 전과 달리 이젠 20대 독자가 매출의 70%를 차지한다고 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Z세대의 움직임은 분명 더 있다. 참고로 Z세대란 단어가 식상하지만,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특정 세대를 일컫기에 사용한다. 이들은 인터넷이 없던 시절을 한 번도 겪지 않은 디지털 원주민이다. Z세대가 대하는 독서는 내가 했던 독서와 분명 다르다.
이들은 ‘텍스트 힙’이란 신조어를 만들었다. 독서, 기록 등을 힙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귀하니까 힙하지.” 출판계는 언제나 불황이라고 자조하는 출판 팀장 J가 말했다. 영상과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텍스트는 카세트테이프나 인생네컷의 유행과 비슷하다고. 이들은 밀레니얼의 복귀가 아니다. Z세대에겐 없던 문화이고 그래서 신선하고 힙하다. ‘텍스트’도 신선한 문화일 확률이 높다. 물론 책이 새롭다는 것이 아니라 영상과 이미지의 풍요 속에서 고사 직전이던 텍스트에 다시 집중하는 것이 흥미로운 경험이라는 것.
텍스트 소비는 종이책이나 전자책에 국한하지 않는다. 단적인 예가 인스타그램 매거진이다. 인스타그램 매거진이라니, 나도 처음엔 무엇인가 했더니,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운영되는 잡지를 일컫는다. 기존 카드 뉴스보다는 글이 많고, 잡지 기사처럼 특정 인물 인터뷰, 시의성 있는 칼럼 등이 실린다. 종이 잡지 안 사 보는 친구들이 이건 보는구나 싶어 약간은 질투하며 스크롤을 오르내렸다. 그런데 재미있다. 내가 Z세대라면 더 재밌을 것 같다.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발행인도 대부분 Z세대다. 나는 늘 다양한 분야의 전문지가 많아야 잡지계가 산다고 믿어왔다. 폐간의 홍수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매체가 고군분투하는 지금 더욱 그런 희망을 품는다. 이들 인스타그램 잡지는 Z세대 전문지다.
Z세대 독서의 핵심은 자신들이 주체라는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보다 카이아 거버의 북 클럽이 지금 회자되는 이유는 그들 말마따나 ‘영 보이스’를 내기 때문이다. Z세대가 책을 선택하는 기준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2016년 발간된 한야 야나기하라의 소설 <리틀 라이프>가 틱톡에서 화제가 되며 역주행했다. 젊은 친구들이 “이렇게 슬프기는 처음이야” “도저히 이 책을 감당할 수 없어”라고 오열하는 숏폼은 내 유튜브에도 자주 뜬다. 소설은 끔찍한 학대와 폭력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이야기로, 출간 8년 만에 한국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내 또래들이 이렇게 통곡하다니, 대체 무슨 책인데? 숏폼 마케팅일 뿐일 수 있지만, 어쨌든 동시대 친구들이 공감하는 소설이라는 점이 통했다. 나는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나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을 참고했는데, 많이 변했다. 그만큼 믿을 만한 어른이 없다는 방증이기도.
혹자는 Z세대의 독서 유행이 보여주기 식이라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기성세대의 매스미디어에서 벗어나 SNS, 숏폼 등 자신들의 이미지 왕국을 세운 세대가 이제 텍스트를 통해 목소리를 내려 한다. 또한 점점 고독해지는 그곳에서 벗어나 물질성을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들의 독서는 오프라인 체험으로 향한다.
지난 4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미우미우가 처음 주최한 ‘문학 클럽’을 방문했다. 앤티크한 도서관 같은 홀에는 푹신한 소파, 샴페인 그리고 젊은이로 가득했다. 테이블에는 기념비적이지만 다소 낯선 여성 작가들의 책이 놓여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탈리아 최초의 페미니스트 소설로 평가되는 <여성(A Woman)>이었다. 누가 봐도 프레피 룩으로 ‘TPO’를 결정한 남성이 그 책을 집어 들었다. 그에게 <죽은 시인의 사회> 속 토드(앳된 시절의 에단 호크)를 닮았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5분이 채 되지 않아 그는 책을 놓고 다른 게스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고 보니 그곳은 문학 패션 클럽 같기도 했다. “도서관에 갈 때 특정 스타일을 연출해요. 해리 포터가 되었다가 가십걸이 되기도 하죠. 내게 독서는 경험이거든요”라던 틱토커의 말이 생각난다. 책을 이야기하든, 그냥 잡담이든 성황리에 웅성이던 문학 클럽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시 낭송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편집된 영화가 상영되고 퓰리처상 수상자와의 대담도 열렸다. 이 클럽은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영화로 보고 낭송으로 듣고 샴페인을 들고 서로 대화했다. 한마디로 경험하고 소통했다.
지난 6월 7~8일엔 서울을 비롯해 밀라노, 도쿄, 뉴욕 등에서 ‘미우미우 서머 리즈(Miu Miu Summer Reads)’ 행사가 열렸다. 여성 작가들의 책과 아이스크림을 ‘미우미우 스타일’로 포장해 나눴다. 지난해 문학동네가 연 팝업 스토어 ‘무라카미 하루키 스테이션’, 지난 4월 창비가 500호 시선집 출간을 맞아 마련한 ‘시크닉’도 호응이 괜찮았다. 관계자들은 시크닉을 준비하며 이런 대화를 나눴다. “망리단길에 오는 2030 여성을 사로잡아야 해요.” 이곳에선 시를 읽기만 하지 않는다. 시와 관련된 향기를 맡고 작시했다. 비슷한 시기 뉴욕에서는 ‘북 파티’가 열렸다. 이들은 북 클럽이 아니라 파티라고 강조한다. 독서하기엔 낮은 조도에 술도 지나치게 많이 마련됐지만, 분명 책이 주인공이었다. 이곳의 규칙은 단 하나, 한 장이라도 읽고 다른 참석자들과 관련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것.
내가 방구석에서 탐독한 독서는 단편일 뿐이다. 새로운 텍스트의 세계를 경험하고자 10년 만에 다시 낭독회를 신청해본다. 그나저나 이제 <보그>의 텍스트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VK)
- 사진
- Marianna Rot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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