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웨이 아웃 : 더 룰렛’ 거를 타선이 없는 연기 열전
디즈니+ 화제작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노 웨이 아웃)>은 여러 익숙한 소재가 결합된 이야기다. 소셜 미디어의 자극과 선동, 거기 생각 없이 휩쓸리는 팔로워들, 게임처럼 행해지는 사적 제재, 타락한 정치인과 형사 등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소재의 익숙함을 만회하는 독특한 리듬감과 강렬한 에너지가 있다.
작품은 윤창재(이광수)가 친구에게 쫓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고깃덩어리가 걸린 어둑한 창고, 냉각 파이프에 들러붙은 얼굴, 코앞에서 돌아가는 절단기 따위가 섬뜩하다. 이 소동은 유튜버 ‘가면남’의 지령 때문에 벌어졌다. 가면남은 룰렛으로 타깃, 처벌 방법, 현상금을 정한다. 강간범 윤창재의 귀를 자르면 현상금 10억원을 준다는 식이다.
투자 사기를 당해서 빚더미에 앉은 형사 백중식(조진웅)은 윤창재 사건에 투입됐다가 10억원이 든 돈가방을 손에 넣는다. 이를 알게 된 윤창재가 중식의 뒤를 쫓는다.
가면남은 허공에 거액의 돈을 뿌려서 팔로워들의 신뢰를 얻은 후 판을 키운다. 곧 출소하는 강간 살해범 김국호(유재명)를 죽이는 사람에게 200억원을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백중식과 윤창재의 싸움, 가면남 추적이 <노 웨이 아웃>의 핵심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내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김국호의 출소 후 그의 집 앞에 시민과 유튜버들이 모여들고 소란이 벌어지는 상황은 조두순 출소 때의 광경을 연상시킨다. 재선을 앞두고 소속 정당에서 버림받은 시장 안명자(염정아)는 김국호를 시에서 추방함으로써 여론을 반전시키려 한다. 부동산 개발 사업에 관여했다가 곤경에 처한 변호사 이상봉(김무열)은 안명자의 재선을 막으면 사업을 재개시켜준다는 당의 제안을 받고 김국호를 변호하기 시작한다. 김국호는 이 상황을 이용해 실속을 챙기려 하고, 김국호의 목숨을 노리는 도전자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1~2회의 메인 캐릭터였던 백중식과 윤창재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3~4회의 무게중심이 김국호, 이상봉, 안명자에게로 넘어가고 장르가 정치 풍자극으로 바뀌는 상황은 얼핏 당혹스럽다. 이 드라마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누구의 서사에 집중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매회 완결성 있는 에피소드를 하나씩 제시하거나 선명하게 시점을 전환하면서 주제를 이어나가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럽다. 이야기가 절반까지 왔는데 김국호를 살해하러 오는 전문 킬러 역의 허광한은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고, 김성철의 역할도 미스터리다. 그런데 이 오리무중의 전개는 연출의 실수가 아니다.
1회에서 배우 이광수는 관객이 그에게 기대해본 적 없을 법한 거칠고 비릿한 표정을 선보인다. 그의 활약으로 인해 윤창재라는 캐릭터에 뚜렷한 존재감이 생겼다. 가면남의 타깃이 된 김국호도 만만치 않다. 김국호는 범행을 저지를 때는 차분하고, 감옥에서는 공손하고, 아내에게 쌍욕을 퍼부을 때는 난폭하고, 형사들을 대할 때는 뻔뻔하다. 타인을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는 교활하고 징그러운 인물이다. 배우 유재명은 이 배역을 풍성한 뉘앙스로 소화하며 화면을 장악한다.
안명자 시장은 배포가 두둑한 인물이다. 정당 고위층, 자기 비리를 수사하는 검사, 거래 상대인 김국호와 이상봉, 시정 관계자 등과 대화할 때면 의외성과 상스러움으로 기선을 제압한다. 뻔할 수 있는 역이지만 염정아의 카리스마, 변칙적인 호흡과 타이밍, 풍부한 표정이 어우러져 대단히 역동적인 캐릭터가 되었다. 이상봉 역의 김무열도 재미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그의 부드러운 말투와 의뭉스러운 미소가 블랙코미디 파트에 고급스러움을 더해준다. 염정아, 유재명, 김무열이 등장하는 장면은 대사도 재치가 있거니와 배우들의 노련함 덕분에 특히 말맛이 좋다.
말하자면 <노 웨이 아웃>에는 거를 타선이 없다. 지구대 순경 역 오우리, 김국호를 죽이러 온 피해자 어머니 역 안소영처럼 의외도 신 스틸러도 있다. 출연진 대개가 비정형의 연기를 하는데 밸런스가 탄탄하다. 이건 결국 연출의 승리다. 강렬한 캐릭터가 계속 튀어나오고 저마다의 서사가 설득력이 있어서 어느 한 인물을 따라가다 보면 ‘아차 이게 아닌가’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관습적인 시청 방식을 버리고 장면 장면의 에너지에 집중하면 대단한 쾌감을 얻을 수 있는 드라마다. 물론 이 긴 빌드업 끝에 캐릭터들과 서사가 수렴할 지점도 기대가 된다.
조진웅이 연기하는 백중식은 잠시 주변부로 물러나 있었지만 작품 후반부에 다시 방향키를 쥐게 될 듯하다. 4회에서 경찰은 가면남 수사의 실마리를 찾았고, 현상금을 노린 폭발로 후배가 다치면서 돈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중식에게도 새로운 동기가 생겼다. 김국호의 아들이 등장한다는 것으로 보아 반성 없는 악인에 대한 분노와 사적 단죄의 부작용이라는 화두도 본격적으로 제기될 듯하다.
인터넷과 군중심리를 이용한 사적 제재는 최근 드라마 <국민사형투표>에서 적극 다뤄지기도 했고, 집단 강간 가해자 신상 유포로 현실화되기도 했다. 그만큼 익숙하지만 가볍게 다룰 수 있는 소재는 아니다. 폭력물의 통쾌함, 대중의 광기와 경솔함,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춰도 선정적으로 보이기 쉽다. 각 잡고 사적 제재를 비판하자면 양형 기준 개선을 요구하는 국민 정서에 답답함만 더해줄 수도 있다. <노 웨이 아웃>은 배우들의 유려한 연기로 다양한 군상에 설득력을 더하고 힘 있는 연출로 극적 재미를 확보했다. 모처럼 세공력이 좋은 드라마라 주제에 대해서는 어떤 결론을 보여줄지가 더욱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은 총 8부작으로, 7월 31일부터 디즈니+에서 매주 수요일 오후 4시에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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