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커닝햄이 포착한 전설의 ‘베르사유의 전투’
파리 패션 위크가 50주년을 맞은 지금, 전설의 사진가 빌 커닝햄의 소중한 이야기보따리 〈베르사유의 전투: 1973년에 펼쳐진 패션계의 결전〉은 큰 의미를 지닌다. 프랑스와 미국은 물론 다국적 디자이너들의 각축전, 파리 패션 위크 발원의 기록일지도 모르니까.
1770년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와 루이 16세의 결혼 피로연이 베르사유 궁전 내 금빛 루아얄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렸다. 프랑스에서 가장 큰 공연장이며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그 공간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였다. 비록 프랑스 왕정 몰락의 시작점이나 다름없는 파티였지만 말이다.
200여 년이 지난 후, 사진가 빌 커닝햄(Bill Cunningham)이 자신의 다이어리에 “오페라 하우스의 블루, 골드, 핑크 컬러 목조 미니어처”라 표현했던 곳이 화려함의 극치였던 패션쇼의 무대가 되었다. 이곳은 인종과 계급에 관한 관념에 의문을 던지게 했던 문화적 변화의 장이기도 했으며, 상당수가 사진으로 기록되었다. 이 사진은 리졸리(Rizzoli) 출판사의 <베르사유의 전투: 1973년에 펼쳐진 패션계의 결전(The Battle of Versailles: The Fashion Showdown of 1973)>을 통해 공개되었다. 마크 보젝(Mark Bozek)은 2018년 장편 다큐멘터리 <타임즈 오브 빌 커닝햄(The Times of Bill Cunningham)>을 제작하며 그의 아카이브를 알게 되었고, 결국 이 책을 편집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에는 패션계를 꾸준히 기록해온 이 사랑받는 사진가의 수많은 비공개 사진을 비롯해, 그의 프랑스 동료이자 친구 장 뤼스 위레(Jean-Luce Huré)의 사진도 함께 실렸다. 모델 팻 클리블랜드가 이 사진집의 소개 글에 “미국인들이 파리에서 패션 리더십을 쟁취했다”고 썼듯, 이 책은 그 순간을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며 다각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클리블랜드는 그 행사에 참석한 모델 36명 중 하나로, 프랑스 디자이너 5명과 미국 디자이너 5명이 겨루는 화려한 자선 패션쇼에 설 각오를 다지며 11월 24일 일요일 아침 JFK에서 출발해 상큼한 얼굴로 활기차게 프랑스 오를리 공항에 도착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이브 생 로랑, 피에르 가르뎅, 엠마누엘 웅가로, 크리스챤 디올의 마르크 보앙 그리고 위베르 드 지방시가 참여했고 루돌프 누레예프, 제인 버킨, 조세핀 베이커가 공연했다. 미국 팀에서는 라이자 미넬리가 공연했고, 오스카 드 라 렌타, 스티븐 버로우즈, 빌 블라스, 앤 클라인과 변덕쟁이 홀스턴이 대표 디자이너로 참석했다(평론가 로빈 기브한(Robin Givhan)이 2015년 출간한 다채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한 책에서 이 일을 회상한 바에 따르면, 그는 행사 얼마 전부터 자신을 3인칭으로 칭하기 시작했고 리허설 도중 갑자기 “홀스턴은 이제 가볼게요!”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커닝햄이 보기에 화려함과 독특한 분위기가 충만했다. 클리블랜드는 그를 “스틸 카메라를 든 영화계의 거장 펠리니(Fellini) 감독 같았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사진가가 아니라 패션 역사가라고 칭했다. 미넬리는 책 서문에 “빌은 당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사진 찍히고 싶게 만들 수 있었다. 그의 사진은 야회의 비밀스러운 속삭임과 스트리트가 조화로운 교향곡을 노래하며, 몸짓으로 표현한 시다”라고 썼다.
정말 근사한 속삭임이다! 커닝햄은 스캔한 다이어리를 이 책에 실었고, 그 안에는 모델들의 도착부터(빌 커닝햄은 “모델들이 누가 최종 승자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적었다) 맥심에서 열린 식전 축하 오찬과 베르사유 거울의 방에서 열린 만찬까지 며칠간 이어진 행사가 잘 묘사되어 있다. 특히 그 거울의 방의 근사한 쪽매널 마루에는 특별히 짠 로열 블루 천 2,000야드와 백합 문장(Fleur-de-lis)으로 장식한 테이블과 나폴레옹 인장 여왕벌 그림이 새겨진 벌집 모양 버터가 세팅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게스트들은 18세기 전통 그대로 가발과 옷을 착용한 종업원으로부터 시중을 받았다. “저는 음식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꼭 끼는 타이츠를 입은 남자들을 보느라 정신없었거든요”라고 클리블랜드가 말한다. “귀부인들이 새벽 3시 30분에 그 쪽매널 마루 위를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보였죠”라고 나중에 덧붙였다.
“사람들의 기억이 화려한 이벤트를 거치며 바뀌기는 했지만, 그 패션쇼는 오래도록 뇌리에 남은 패션 승리의 장면(그 작은 금빛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린 그 패션쇼)이었습니 다.” 커닝햄은 프랑스 디자이너들이 선보였던 동화를 열망했지만 ‘메이시스 백화점의 추수감사절 퍼레이드를 허접스럽게 흉내 낸 꼴이 되고 말았던’ 세트 디자인과 더불어 과잉 생산된 옷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살짝 넌더리 쳤다. “로켓이 천장으로 날아오르자 스파크와 연기 구름이 아름다운 객석을 가득 채웠고, 멋쟁이들의 말문이 딱 막히고 말았어요.”
프랑스 대표단도 미국 디자이너들의 절제된 현대성과 비슷하게 가는 게 더 나을 뻔했다. 그들은 거의 텅 빈 스테이지에서 작품을 선보였던 것이다. 미넬리의 ‘봉주르 파리’ 공연으로 시작된 무대에서 모델들과 댄서들이 미국 디자이너 5명이 탄생시킨 베이지와 브라운 평상복을 입고 빙글빙글 돌면서 객석과 무대를 오가며 낭만적인 열정을 폭발시켰다. 커닝햄은 모델들이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해!”라고 외치며 무대에서 내려갔다고 책에 기록했다. 전조 좋은 오프닝부터 과거에 치열하게 경쟁하던 미국 디자이너들은 ‘가족 같은 협동 정신’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모델 1/4 이상이 흑인이었다는 사실. 클리블랜드가 클라인의 작품을, 빌리 블레어(Billie Blair)가 드 라 렌타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리고 베단 하디슨(Bethann Hardison)은 버로우즈의 우아하고 독특한 작품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특히 이 브랜드의 몸에 꼭 맞는 저지 드레스와 타조 깃털 머릿수건이 이 패션 하우스의 특징을 그대로 살려주었다. 그리고 커닝햄은 이렇게 적었다. “관중 모두가 그간 본 적 없는 것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VK)
- 에디터
- 안건호
- 글
- KEZIAH WEIR
- 사진
- BILL CUNNING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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