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람에서 무덤까지, 베니스의 국제 공예 비엔날레 ‘호모 파베르’
공예는 우리 인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영화감독 루카 구아다니노와 건축가 니콜로 로스마리니가 예술감독을 맡은 ‘호모 파베르’는 이 명제를 따른다. 베니스의 옛 수도원에서 열린 국제 공예 비엔날레 호모 파베르는 출품작 800여 점을 통해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의 여정을 표현했다.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의 선착장에선 사람들이 산조르조마조레(San Giorgio Maggiore)섬으로 가는 수상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에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프린트된 색색의 깃발이 나부꼈다. 호모 파베르는 산조르조마조레섬에 있는 옛 베네딕트 수도원 폰다치오네 조르조 치니(Fondazione Giorgio Cini)에서 9월 한 달간 열렸다.
호모 파베르는 올해로 3회를 맞은 국제 공예 비엔날레로, 스위스에 자리한 미켈란젤로 재단(Michelangelo Foundation for Creativity and Craftsmanship)의 주관 아래 베니스에서 개최된다. 올해는 70여 개국 400여 명의 작가가 800여 점을 출품했다. 전시 기간에는 평상시 낯을 가리던 부라노와 무라노의 공방에서도 각종 워크숍을 마련해 누구든 참여할 수 있다.
호모 파베르 오픈 시간인 오전 10시. 미켈란젤로 재단의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코린 파제 블랑(Corinne Paget-Blanc)을 만났다. 아름다운 은발의 그녀는 올해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한국에서 가장 많은 공예가가 참여했다고 말했다. “한국 공예의 저력에 새삼 놀랐어요. 이건 비밀인데, 올해 호모 파베르의 수상자 역시 한국인이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호모 파베르는 관람객과 기자, 관람을 보조하는 예술 디자인 전공 학생들이 영 앰배서더(Young Ambassadors)로 투표해 세 분야에 걸쳐 상을 수여한다. 그중 민들레 홀씨 모양 금속 3,000여 개를 하나하나 이어 붙인 비정형 항아리 ‘소원(The Wishes)’을 출품한 고혜정 작가가 최우수 작가로 선정됐다. 황동으로 제작해 은도금한 50×40×50cm 크기의 작품으로, 가까이 두고 볼수록 정교한 디테일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손과 눈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만큼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집념을 느낄 수 있는 경이로운 작품이다.
기자들 투표에서는 60년 넘게 갓을 만들어온 박창영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입자장과 그의 큰아들 박형박 이수자가 선정됐다. 박창영은 조선 철종의 1861년 초상화를 기반으로 옛 갓을 재현하고, 챙 너비가 75cm에 달하는 갓을 만든 적 있다. 전시에 출품된 백갓(White Gat)은 왕이나 부모의 장례를 치른 후 2년 동안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 착용하는 것으로, 대나무에서 뽑은 실과 모시로 완성했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삶의 여정(The Journey of Life)’. 미켈란젤로 재단 부회장 하넬리 루퍼트(Hanneli Rupert)와 공동 예술감독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 젊은 건축가 니콜로 로스마리니(Nicolò Rosmarini)가 함께 고민해 정했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영화 <아이 엠 러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등을 통해 알려진 감독으로, 건축과 인테리어 디자인에 빠져 2017년 디자인 사무소 스튜디오루카구아다니노(Studiolucaguadagnino)를 설립했다. 그의 스케줄을 보면 디자인에 대한 애정 없이는 예술감독직을 수락하기 힘들어 보인다. 8월 중순에 줄리아 로버츠와 영화를 마무리하고,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의 영화 <퀴어>로 베니스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여러 시사회에 참석했다. 그는 호모 파베르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한 번도 다룬 적 없는 것을 접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구아다니노는 호모 파베르를 앞두고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부터 카를로 스카르파(Carlo Scarpa)까지 전설적인 이탈리아 건축가의 작품을 살폈다. “위대한 과거를 고찰하면 건축과 인테리어에 엄청난 영감을 받을 것 같았죠. 그럼으로써 호모 파베르를 통해 공예의 미래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삶의 여정’이란 주제처럼 전시는 ‘탄생’부터 ‘사망’까지 10단계로 구성된다. 탄생(Birth), 유년기(Childhood), 축하(Celebration), 유산(Inheritance), 사랑(Love), 여행(Journeys), 자연(Nature), 꿈 (Dreams), 대화(Dialogues), 사후 세계(Afterlife)가 그것으로, 공예가 인간의 일생에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고자 선택한 테마다.
회랑에 들어서자 ‘탄생’ 공간이 펼쳐졌다. 천장에는 베니스 가정집에 널린 빨래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 브랜드 루벨리(Rubelli)의 패브릭이 걸려 있었다. 탄생에는 ‘거위의 게임(Game of the Goose)’이라는 오래된 보드게임을 주제로 20여 개국 작가가 참여했다. 이 게임을 탄생과 연결시킨 이유는 주사위를 던졌을 때 어떤 숫자가 나올지 알 수 없듯, 탄생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운명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국 작가 조희화는 새끼줄과 오방색 실로 수를 놓고, 임금의 옷 곤룡포 속 호랑이 눈을 본떠 거위 눈에 적용했다. 그녀의 작품을 세세히 뜯어보던 코린이 설명했다. “이 작가는 하루 20시간씩 작품을 만들어요. 공예가들의 위대한 점이죠. 신념을 이루기 위해 일상을 바칩니다.” 그녀는 전시된 작품에 깃든 이야기도 들여다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성의 독립과 자유는 경제력이 기반이 돼야 한다며 공방을 운영 중인 아프가니스탄의 한 작가는 그곳에서 만든 작품을 보내왔죠. 튀르키예 소년의 노동력을 착취해 명품 가방을 만든다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아름다움이란 진정성 있는 이야기가 담겨야죠.”
무엇보다 ‘축하’ 전시장이 가장 아름다웠다. 이 공간은 수도원이던 시절에도 식당이었는데, 당시 보유하던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의 ‘가나의 혼인 잔치’를 재현해 걸어놓았다. 원본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23m 길이의 테이블에는 메탈, 세라믹, 크리스털, 유리 등으로 만든 갖가지 음식 모형과 식기, 촛대 등이 놓였다. 코린은 개막 직후 오프라 윈프리를 비롯해 여러 셀러브리티가 많은 제품을 구입했다고 밝혔다.
가장 로맨틱한 공간은 ‘사랑’이었다. 랑콤이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만든 분홍색 꽃다발 너머로 공예가들이 제작한 로맨틱한 꽃 작품이 펼쳐졌다. 고혜정 작가의 작품 ‘소원’도 이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박창영·박형박 장인의 갓은 ‘유산’ 전시장에 놓였다. 이 공간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갓 공예를 전수했듯이 계승의 의미가 담긴 작품을 전시했고, 천장에선 루카 구아다니노가 직접 편집한 영상이 상영됐다.
‘꿈’ 공간에는 관람객이 들어서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어두컴컴한 폐수영장에 20년 만에 물을 채운 다음 알라이아의 니트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 30개를 세웠다. 세계 각지의 가면 50여 개가 벽을 둘러싸고 있었다. “꿈에서 새로운 내가 되듯, 마스크를 쓰면 누구든 될 수 있다는 의미죠.” ‘꿈’ 전시장을 지키던 영 앰배서더가 설명했다. 그녀는 파리에서 예술대학에 다니는 학생으로, 영 앰배서더 활동을 위해 한 달간 베니스에 머물고 있었다. 호모 파베르는 공예가 외에도 젊은 예술 학도들과의 교류를 지향한다.
호모 파베르는 역사적이지만 현재는 소외된 곳을 소환한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본래 수도원 식당에 걸려 있었으나 도난당한 그림 ‘가나의 혼인 잔치’를 재현하고, 폐수영장에 물을 다시 채우고, 곤돌라 제작 학교였던 공간에 도피아 피르마(Doppia Firma)를 전시했다. ‘이중 서명’이라는 뜻의 도피아 피르마는 유럽의 전통 장인과 혁신적인 여러 나라의 디자이너들과 함께 하는 프로젝트로 미켈란젤로 재단이 진행한다. 밀라노 살로네 델 모빌레에서도 꾸준히 결과물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 말미에는 장인들이 꽃병, 레이스, 지구본, 시계, 보석, 신발, 필기구 등의 제작 과정을 시연했으며, 관람객도 참여할 수 있었다. 몽블랑은 대표 만년필 마이스터스튁(Meisterstück)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관람객과 필기 시간을 가졌다.
전시장 내 레스토랑에서는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 ‘로컬(Local)’의 수석 셰프 살바토레 소다노(Salvatore Sodano)가 베니스 파인다이닝을 선보였다. 레스토랑에 자리한 가구 하나하나 공들여 준비했다. 드 고네(de Gournay)의 수제 벽지, 크리스토플(Christofle)의 식기, 단테 네그로(Dante Negro)의 맞춤 가구로 꾸몄다. 미처 예약하지 못한 이들은 카페에서 카펠리니(Cappellini) 의자에 앉아 베니스 치케티(한 입 크기의 간식)와 글라스 와인을 즐겼다.
예술감독 니콜로는 이번 전시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대형 설치 작품으로 관람객을 놀라게 하기보단 탄생부터 사후 세계까지 모든 전시장이 조화로운 여정이길 바랐습니다.” 사람은 일단 태어나면 보드게임의 주사위처럼 계속 운명에 내던져지지만, 삶은 공예화하고 싶다. 전시장의 장인들처럼 사력을 다해 만들어갈 것은 무엇인지 그것부터 찾아야 했다. 영화로 일가를 이룬 루카 구아다니노가 뒤늦게 인테리어 분야에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듯 ‘늦은 때’란 없으니까. (VL)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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