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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이 쟁취한 품질보증서, K-라벨에 관하여

2025.01.01

조상들이 쟁취한 품질보증서, K-라벨에 관하여

한국적인 것은 뭘까? 음악과 미술, 문학까지 세계의 공인된 주목에 으쓱하던 어깨도 잠시, 혼종 문화가 양산되는 요즘 무엇이 K 라벨이고, 언제까지 지속될까?

오제성, ‘Index#3_다보각경도(多寶閣景圖)’, 2020~2024, 철, 세라믹, 가변 크기

아! 대한민국

지난가을,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관계자들과 ‘런던적인’ 식사를 할 때였다. 피시 앤 칩스를 먹었다는 건 아니고, 식후 티타임을 건너뛰겠다는 내게 웨이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진짜?”라고 재차 물었기 때문이다. 에스프레소를 주문한 이탤리언 기자에겐 웨이터가 은근히 읊조렸다. “역시 이탤리언이군요.” 나는 티타임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홍차를 주문했다. 그 자리에서 총감독 벤 에반스(Ben Evans)는 향후 계획을 발표했는데, 런던적인 음식인 ‘빵’으로 ‘디자인 만찬’을 차리고 싶어 했다. 그가 기분 나쁠까 봐 빵이 어떻게 런던적인지 묻지 못했다.

다음 일정이 미뤄지면서 서로 할 말을 찾아야 하는 마의 시간. 영국 기자가 내게 휴대폰으로 한국 화장품 사진을 보여줬다. 난생처음 보는 제품이었다. 특정 브랜드를 모사한 용기에 ‘00 한방’이라고 조악한 서체로 써 있었다. 이런 서체를 쓴다면 미감이 확실히 떨어지는 디자이너거나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일 것 같았다. 그녀는 한국 화장품이 좋아서 비싸도 구입해 아껴 바른다고 했다. “올리브영 ‘그린 등급’인 나도 이건 처음 본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사진을 뿌듯하게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찾아간 현지 화장품 매장에도 해외용으로 제작된 낯선 K 화장품이 즐비했다.

확실히 최근 5년 사이 해외에서 ‘한국 대접’이 달라졌음을 체감한다. 20년 전 캐나다 출입국 심사에서 “당신은 결혼하려고 왔습니까?”라는 질문을 들었는데 말이다. 그가 인종차별주의자일 수 있지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어디인지 몰라 미안해하거나 “노스 코리아?”라고 되묻던 시절이다. 말하고 보니 부모 세대 같지만 나는 1982년생이다. 이제 어딜 가나 한국의 특화 상품에 열렬한 찬사를 보낸다. 내가 패션 잡지 에디터여서인지 K-팝이나 K-뷰티에 관한 것이 많다. 지난 9월 프리즈 서울. ‘삼청나이트’에서 만난 미국 큐레이터는 “K-보톡스를 맞았다”고 했다. 기술도 좋지만 “가격이 어메이징하게 저렴해, 피부과 리스트를 VIP 컬렉터들에게도 전달했다”고 덧붙였다. 2022 프리즈 서울부터 꾸준히 내한한 그녀는 작품 판매 압박을 다양한 시술로 풀고 있다.

한국 미술도 부상했다. 지난 10월 프리즈 런던에서 화랑 관계자들은 경기 침체에도 한국 작가에 대한 문의가 늘었다고 말했다. 같은 기간 이미래 작가는 테이트 모던의 터바인 홀 전시에 데뷔하고, 양혜규 작가는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20년사를 아우르는 개인전을 열었다. 그 외에도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조민석, 런던 현대미술관에서 정금형, 타데우스 로팍에서 정희민 작가를 내세웠는데, 여기까지 와서 한국 전시 위주로 보는 내가 좀 웃겼다.

물론 서구 컬렉터들에게 아직 생소한 작가가 많지만, 커지는 관심은 사실이다. 이번 겨울, 홍콩에서 시카고로 거주지를 옮긴 예술 기획자는 벌써부터 엑스포 시카고와 현지 미술관에서 한국 작가 추천을 부탁하는 전화를 받는다.

한국 공예의 입지는 말 그대로 급성장했다. 2022년 말총 공예가 정다혜가 로에베 재단 공예상을 수상한 다음 해, 뉴욕 노구치 미술관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한 적 있다. 선선한 5월 저녁, 청바지에 연회색 피케 셔츠를 입은 조나단 앤더슨이 수줍은 모습으로 수상자를 발표했다. 일본 작가가 상을 받았지만, 최종 후보에 오른 대여섯 명의 한국 작가가 그 자리에 함께했다.

9월 한 달간 베니스에서 열린 공예 비엔날레 ‘호모 파베르(Homo Faber)’는 400여 참여 작가 중 영국, 프랑스에 이어서 한국 공예가가 세 번째로 많았다. 호모 파베르를 후원하는 미켈란젤로 재단의 커뮤니케이션 디렉터는 “한국 공예의 저력에 놀랐어요”라며 보는 작품마다 찬탄했다. “색색의 비단을 촘촘히 꿰맨 것 좀 보세요.” 그녀에겐 오방색의 의미가, 용포에 그려진 호랑이가, 대나무에서 뽑은 실로 만든 갓이 신선한 코드였다. 호모 파베르는 세 분야의 상을 마련하는데 그중 2개를 한국 작품이 받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입자장 박창영과 이수자 박형박이 만든 하얀색 갓, 고혜정 작가가 민들레 홀씨 금속 3,000개를 이어 붙인 항아리다.

행사마다 해외 관계자들의 호들갑으로 어깨가 많이 올라간 한 해였다. 때론 혼란스럽다. 정말 K 문화의 글로벌한 성공인가? 아니면 이국의 타인에게 환대의 의미로 1을 10으로 부풀려 감탄해준 걸까. 2023년 11월, 한 달간 머문 인도 요가원의 ‘디스코 타임’이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디스코가 맞다. 산에서 요가만 하다 보면 속세가 그립다.) 참여 멤버는 유럽권에서 온 20~60대 10여 명. 마을 전체가 금주인 만큼 딱히 갈 곳도 없어 수업 후 요가원에서 춤추며 놀기로 했다. 각자 좋아하는 노래를 틀었다. 내 차례가 되고, 그래도 만인이 아는 노래여야 분위기가 살기에 방탄소년단의 ‘Butter’를 선곡했다. “Smooth like butter~” 정국의 청량한 음성이 흐르자 이전까지 헤드뱅잉을 하던 친구들이 멈춘 채 리듬에 익숙해지려는 듯 귀를 기울였다. “서, 설마? 이 노래 몰라?” 나는 놀라서 물었고, 네덜란드에서 온 40대 간호사는 갸웃하더니 “노래는 좋은데?”라며 칭찬했고, 20대 러시아 대학생은 “들어본 적 있어!”라며 내 기를 세워주기 위해 과장되게 몸을 흔들었다. (저는 방탄소년단을 사랑합니다.) 기묘하게도 다음 날 저녁 상반된 상황을 마주했다. 시장을 걷다가 K 드라마에 푹 빠진 인도 소녀를 만났다. 그녀가 말한 10여 편 중 내가 본 드라마는 <사랑의 불시착>뿐이었다.

나보다 한국 드라마를 잘 아는 인도 소녀와 디스코 타임의 연타 후 내린 잠정 결론. 이젠 하나의 문화가 세계를 호령하는 시대가 아니라, 각각의 문화 ‘멜팅포트’가 여기저기서 끓는다. 앞서 내게 쏟아진 K 뷰티와 공예의 관심과 질문은 그들의 ‘멜팅포트’이고 누군가에겐 물음표일 수 있다. 물론 K 라벨이 붙은 멜팅포트가 급속 가열 중이긴 하다.

그렇다면 무엇에 K 라벨을 붙일 수 있을까? 스웨덴의 작곡가, 미국의 안무가, 영국의 비주얼 디렉터가 만든 한국 가수의 앨범은 K-팝일까? 대중음악 평론가 김윤하, 미묘, 박준우가 쓴 <케이팝 씬의 순간들>은 K-팝이 인적 자원의 출처에 집중했다고 짚는다. 기획자, 작곡가, 연행자의 한국 여권을 따지는 것이다. K-팝 자체가 국적이라는 우산을 씌우면서 시작된 용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하고 있다. “한때는 K-팝이 하나의 문화 기술로서 해외에 수출되는 게 허황되게 들렸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현실화되고 있다. 성공적이라면, ‘한국에서 나온 특정한 유명의 음악 콘텐츠’라는 의미로서 ‘케이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고에는 전환점이 찾아올 수 있다. ‘한국에서 비롯된 음악 콘텐츠 방법론’이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이를 ‘K-Pop Influenced(케이팝의 영향을 받은)’라 수식하거나 혹은 다른 용어를 찾아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용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실체가 좋든 싫든 지금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눈을 감고 한국적인 것을 떠올려본다. 경복궁의 살짝 들어 올려진 처마, 댕기 머리와 저고리··· 이것은 전통적인 것이지 한국적인 것은 아니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 : 1989년 이후, 한국현대미술과 사진>의 서문에 객원 큐레이터가 ‘코리아니즘’에 관한 글을 썼다. “특히 <보그 코리아>는 ‘코리아니즘(Koreanism)’이란 표제 아래 한국적인 미감을 통해 영감을 줄 수 있는 실험적 비주얼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왔고, 이러한 시도는 글로벌한 환경 속에서 역설적으로 우리만의 문화적 정체성을 찾으려는 적극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17~18세기 유럽 귀족에게 유행한 중국 문화에 대한 동경을 담은 ‘시누아즈리(Chinoiserie)’나 인상주의에 영향을 준 일본 문화에 대한 동경인 ‘자포니즘(Japonism)’처럼 한국의 미감이 글로벌한 미적 취향으로 승화되기를 꿈꾸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내가 집중한 대목은 한국적 미감에서 영감을 받아 실험적 비주얼을 시도했다는 것. <보그 코리아>는 30년 가까이 한복 화보를 꾸준히 선보였는데, 전통 방식을 단순히 재현하지 않고 지금 패션과 혼합해 현대의 코리아니즘을 제안했다. 젊은 ‘할매니얼’에게 사랑받으며 재포장된 약과와 떡, 국립중앙박물관의 히트 상품이 된 반가사유상 미니어처도 전통이 아니라 새롭게 만든 코리아니즘이다.

그래도 여전히 혼란스럽다. 글로벌한 문화와 한국 전통문화의 혼용을 모두 K 문화라 부를 수 없다. 그중 하나가 경복궁 근처에 자리한 한복 대여점의 국적 불명의 조악한 개량 한복이다. 그 대답을 RM의 명언에서 찾고 싶다. 그는 “K 수식어가 지겹지 않느냐”는 유럽 언론의 질문에 “K 라벨은 우리 조상들이 싸워 쟁취한 품질보증서”라고 말했다. 그는 K의 의미를 ‘정신’에서 찾은 듯 보인다.

지난 주말 그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가수의 응원봉을 들고 거리에 나왔다. 내가 광화문에 나섰을 때의 키워드가 ‘촛불’이었다면 이들은 ‘응원봉’이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빛으로 시국에 항거하는 이들 사이로 민중가요 대신 K-팝이 흘러나온다. 너머로 ‘전국 집에누워있기 연합’의 깃발이 나부낀다. ‘제발 그냥 누워 있게 해줘라. 우리가 집에서 나와서 일어나야겠냐.’ 인터넷에는 영화 <서울의 봄> 패러디가 여러 버전으로 올라온다.

슬픔과 분노를 해학으로 승화하며 시대를 바꾸고자 하는 친구들. 이 정신이 K 라벨의 핵심이다. 아주 한국적인 풍경이 매일 펼쳐지고 있다. (VK)

피처 디렉터
김나랑
작품
오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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