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자연의 주권 회복을 소망하는 일, ‘자연국가’展

2025.03.28

자연의 주권 회복을 소망하는 일, ‘자연국가’展

최재은(b. 1953), ‘자연국가(Nature Rules)’, 2025, Silk, cotton linen and washi (foil), 155.4×122×2.7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Yasushi Ichikawa.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에서 5월 11일까지 열리는 최재은 작가의 <자연국가>는 매우 입체적인 전시입니다. 최재은 작가는 도쿄의 소게쓰 아트 센터에 설치된 이사무 노구치의 조각 ‘천국(Heaven)’을 13톤의 흙으로 덮고 씨앗을 뿌려 재해석한 작품 ‘대지(Earth)'(1985)를 선보이면서 미술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작가답게, 생명의 근원과 시간, 존재의 탄생과 소멸,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복합적인 관계 등을 깊이 사유하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국제갤러리에서 13년 만에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그간 작가의 작업 세계를 관통해온 자연과 순환에 대한 철학, 그리고 여기에서 기인해 작가의 ‘라이프워크’로 진화한 DMZ 프로젝트를 함께 만날 수 있습니다. 최재은이라는 작가를 구성하는 사유와 생각을 시적으로 풀어낸 공간, 그리고 작가의 실천과 움직임이 반영된 공간이 서로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겁니다.

K2 1층의 전시장에서는 어느 가을 숲의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작가의 오랜 관심사인 자연, 특히 숲의 색과 소리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요. 교토에서 살면서 작업 중인 최재은은 집 근처 숲을 매일 산책한다고 합니다. 숲을 거닐며 얻은 다양한 생각과 질문을 일종의 공감각적 환경으로 구현하고 있죠. 작가는 숲에서 모은 낙엽을 재료로 물감의 안료를 만들고 캔버스에 칠합니다. 인간이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자연의 색 위에, 작가는 숲속에서 들었던 바람소리, 새소리, 빗소리 등을 들리는 그대로 적어두었습니다. ‘From the Forest 숲으로부터’라는 큰 제목 아래 ‘Sar r r r r'(2025)는 늦가을 낙엽이 ‘사르르’ 떨어지는 소리를, ‘Hwiing g g'(2025)은 나뭇가지를 스치는 허공의 바람 소리를 표현합니다. 한글로 ‘쉿’이라고 적힌 작품도 있는데, 숲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인간이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는 의미로 들리는군요.

최재은(b. 1953), ‘숲으로부터(From the Forest)’, 2025, Natural dyes and charcoal pencil on canvas, 100×72.7cm each, 2 sets,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Yasushi Ichikawa.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K2 2층에서는 방금 본 숲에 대한 서사가 시적으로 펼쳐집니다. 숲의 서사는 나무를 통해서 만들어지죠. 작가는 온전히 나무의 입장이 되고, 나무를 주목합니다. 텍스트 작업 ‘나무의 독백'(2025)은 나무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조각인 ‘가을 손님'(2025)은 그 단단하고 우아한 자태를 보여주며, ‘Flows'(2010)는 후지산의 몇백 년 된 나무가 품은 숱한 시간과 세월의 흔적을 그들의 초상처럼 들여다보는 겁니다. 이 고요한 공간에 있다 보면, 나무가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참 아름답고 한결같은 생명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애정과 신의는 K3에서 펼쳐지는, 10년 전에 시작된 DMZ 프로젝트 <자연국가>의 바탕이 됩니다. 지난 2015년 최재은 작가는 <대지의 꿈>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일본 건축가 반 시게루와 시작해, 전 세계 예술가, 건축가, 과학자에게 남북을 잇는 공중 정원, 즉 꿈의 정원에 대한 상징적인 아이디어를 얻은 건데요. 이 작업은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서도 선보인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작가는 DMZ의 실제 생태를 연구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마냥 파라다이스인 줄만 알았던 이곳 생태의 상황이 예상과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죠. 파괴되어 파편화된 DMZ 일대 생태를 복원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연이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뜻을 담아 2020년부터 <자연국가> 프로젝트를 이어 시작하게 된 겁니다. 전시장에 걸린 ‘자연국가’ 텍스트가 깃발의 형태를 빌려 표현되는 이유도, 온전한 자연의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자연국가>가 이전의 <대지의 꿈>과 다른 점은, 작가가 DMZ의 상징성으로 꿈을 꾸는 걸 넘어 일대의 생태를 복원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식을 제시한다는 겁니다. DMZ 일대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무중력의 땅이 되었고, 당연히 이렇다 할 정확한 지도도 없겠지요. 하여 작가는 산림학자와 협업하고 심지어 나사(NASA)의 도움을 받아 생태 현황 분석도, 즉 생태 지도를 2년여에 걸쳐 만들어냅니다. 또 작가는 오랜 리서치로 얻은 식물들을 ‘종자 볼(Seed Bomb)’ 형태로 드론을 활용해 해당 지역에 뿌리는 계획을 세웁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작가의 계획을 웹페이지를 통해 실제로 만날 수 있는데요. ‘종자 볼’을 언제든, 누구나 기부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어 제시한 겁니다. 물론 이 계획이 언제 실현될지는 아무로 모릅니다. 하지만 그날이 오면 내가, 당신이, 우리가 DMZ 일대의 생태를 살리는 데 일조할 수 있겠지요.

최재은(b. 1953), ‘종자 볼(Seed Bomb) 매뉴얼’,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최재은(b. 1953), ‘새로운 유대(New Alliance)’, 2025, Wood structure with pressed flowers on 112 urushi lacquered wood panel, framed, 212.6×238×6.9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Yasushi Ichikawa.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그렇기에 최재은의 <자연국가>전은 여느 전시와 좀 다르게 다가옵니다. 이곳은 당연히 한 작가가 지난 수십 년 동안 해온 작업을 정제해 보여주는 전시장인 동시에 일종의 플랫폼이기도 합니다. 즉 작가가 현재까지 발전시켜온 DMZ 프로젝트의 매뉴얼과 아카이브를 시각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이 프로젝트를 함께 할 잠재적인 참여자들에게 이런 내용을 알리고, 동참하도록 하는 자리인 것이죠. 얼마나 많은 기부금이 모이는지보다 더 중요한 건 얼마나 많은 이들이 DMZ에 관심을 갖고, 뜻과 에너지를 모으는가 하는 문제일 겁니다. 동시대 많은 이들의 보편적인 공감대, 그리고 새로운 유대 관계를 형성하는 기회라는 점에서, 그래야 세상이 바뀐다고 믿는 작가의 의지와 희망이 녹아든 프로젝트인 셈입니다. 분열과 혐오로 얼룩진 세상에서 인간다운 실천을 하게끔 독려하는 것, 이것이 예술가의 역할이 아닐까 싶군요.

※ 종자 볼 기부 및 <자연국가>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웹사이트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자연국가> naturerules.net

정윤원(미술 애호가, 문화 평론가)
사진
국제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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