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사랑의 열매를 그린 그림

2025.05.05

사랑의 열매를 그린 그림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 부부 샤라 휴즈와 오스틴 에디가 함께 거둔 첫 번째 수확. 첫 협업 전시 〈뿌리와 과일〉의 무대가 된 갤러리 에바 프레젠후버×P21에서 〈보그〉와 결실의 기쁨을 나눴다.

갤러리 에바 프레젠후버 초청으로 이태원동에 자리한 P21에서 5월 17일까지 생애 첫 협업 전시 <뿌리와 과일>을 선보이는 샤라 휴즈와 오스틴 에디를 만났다. 알록달록한 회화로 가득 채운 전시는 생애 주기에 대한 고찰을 최대한 가볍고, 장난스럽고, 재미있게 풀어낸다. 두 사람이 들고 있는 토마토 형태 가방은 로에베(Loewe).

시장 상인 못지않게 규칙적인 일상을 중시하는 화가 부부 샤라 휴즈(Shara Hughes)와 오스틴 에디(Austin Eddy)는 지난 4월 12일, 부지런히 서울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갤러리 에바 프레젠후버×P21에서 그들의 생애 첫 협업 전시 <뿌리와 과일(Roots n’ Fruits)>이 열리는 날이었다. 단정한 셔츠나 시크한 블랙 드레스 대신 청바지와 로퍼를 착용하고, 휴즈가 이날을 위해 손수 제작한 과일 장식 팔찌를 맞춰 낀 이들은 들뜬 마음으로 서울 관람객을 만났다. 전시에서는 휴즈의 ‘Just Peachy’(2024)와 에디의 ‘All Great and Precious Things’(2024)를 비롯해 총 5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무수한 대형 작품을 거뜬히 아우르는 이들의 브루클린 스튜디오에 비하면 매우 아담한 공간이지만 따로 또 함께 전 세계를 횡단해온 부부가 함께 여는 아시아 첫 전시이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휴즈가 느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뿌리라는 것은 삶의 시작을, 열매와 과일은 삶의 중간 혹은 끝을 의미하죠. 예술가에게 삶은 진중한 주제지만 이번만큼은 최대한 가볍고, 장난스럽고, 재미있게 접근했습니다.” 부부는 프랑스 과일 노점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록색으로 화이트 큐브에 과감한 줄무늬를 수놓았다(전시장 역시 그림을 판매하는 일종의 시장이라는 유쾌한 통찰도 담겼다). “This exhibition is a happy place!” 장난기 띤 미소를 지으며 에디가 덧붙였다. “요즘 세상이 너무 시끄러운데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잠시 떠나 휴식을 취하고 뭔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실은 그것이 우리가 예술을 하는 이유예요.” 이들의 전시는 5월 17일까지 즐길 수 있다.

“새, 꽃, 물고기 등 이제까지 내가 그려온 모든 것은 늘 삶과 인간의 여러 조건을 탐구하기 위한 매체였다.” 오스틴 에디에게 과일은 그 목적에 부합하는 새로운 은유다. Austin Eddy, Vulnerable, 2025, Watercolor, gouache, colored pencil, oil pastel, cut paper on papersheet, 38×56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erie Eva Presenhuber, Zurich / Vienna, Photo: Stan Narten, JSP Art Photography.

최근 휴즈는 2025 아트 바젤 홍콩에서 데이비드 코단스키 갤러리를 통해 대형 작품 ‘Don’t Get It Twisted’(2023)를 공개했고, 에디는 독일의 쿤스트할레 엠덴에서 개인전 <Austin Eddy. Sea Song>을 선보이고 있다. 뒤죽박죽한 시차로 인해 다소 비몽사몽할 것 같다.

오스틴 에디 13시간의 비행은 쉽진 않았지만 <뿌리와 과일>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함께 선보이는 전시이기에 모든 준비 과정이 즐거웠다. 인형의 집처럼 입체적으로 디자인한 전시 브로슈어가 예상보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조금 불안했을 뿐 큰 위기나 고난은 없었다.

휴즈는 나무를 즐겨 그리고, 에디는 최근 과일을 자주 그리기에 맨 처음 전시명을 접했을 때 휴즈의 그림이 ‘뿌리’를, 에디의 그림이 ‘과일’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예상했다.

샤라 휴즈 꼭 그런 건 아니다. 전시는 아주 큰 틀에서 삶에서 죽음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의 그림은 그 생애 주기를 시각적이거나 추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스위스 갤러리 에바 프레젠후버 초청으로 기획된 전시로 학술적이고 철학적인 접근보다는 생을 기리고, 나아가 찬미하는 일에 더 집중하고 싶었다.

나무를 그린 휴즈의 ‘Just Peachy’(2024)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푸른 잎사귀 사이로 다소 모호하게 채색한 복숭아 열매가 눈에 들어온다.

샤라 휴즈 조지아 남부 출신이다. 복숭아는 조지아를 상징하는 과일이기에 이 그림은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은 브루클린에 거주하며 스스로 뉴요커로 여기며 살아가지만 말이다. 나무뿌리 부분을 추상적이지만 두드러지도록 묘사한 데는 내가 여전히 어딘가에 남겨놓은 것, 동시에 나의 기반이 되는 무언가에 대한 애착이 담겨 있다.

에디는 지난해부터 과일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화가로서 주목한 과일의 특성은?

오스틴 에디 과일은 껍질과 과육으로 이루어져 있고, 싱그러움이 자연스럽게 사그라드는 노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 어쩐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새, 꽃, 물고기 등 이제까지 내가 그려온 모든 것은 늘 삶과 인간의 여러 조건을 탐구하기 위한 매체였다. 그 목적에 부합하는 새로운 은유로서 과일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의도는 동일하지만 파스텔 컬러를 많이 사용하거나 여백을 살리는 식으로 과일을 미학적으로 더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 고심했다.

휴즈는 지난해 ‘Don’t Be Ugly’(2024), ‘Be a Good Girl’(2024) 등의 작품을 통해 세상을 향한 분노를 나무 이미지로 승화했다. 그 시기를 거친 후 당신에겐 무엇이 남았나?

샤라 휴즈 분노의 일부는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지만 지금은 그로부터 많이 벗어난 상태다. 당시 경험한 감정은 강렬해서 2~3주 만에 회화 작품 8점을 완성할 정도였다. 예술에서 길을 찾지 못했다면 싸움과 폭력에 휘말리거나 약물 복용을 시도했을지도 모르기에 내가 예술가라는 사실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나처럼 예술에서 돌파구를 찾은 다른 이들은 같은 시기를 관통하며 어떤 작품을 탄생시켰을지 기대된다.

두 사람이 주로 그리는 풍경과 정물은 인물을 대신해 다양한 감정을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오스틴 에디 예술가에게 모든 작업의 시작은 늘 자전적이다. 하지만 작업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사적인 경험은 매몰되고, 관람객이 그림에서 자기만의 서사를 건설할 수 있는 새로운 터전이 마련된다. 예를 들어 반려견의 죽음을 다룬 작품은 사람들이 우리의 아픔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슬픈 경험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보편적인 공감을 일으키고, 그럼으로써 세상과 연결되게 하는 것이 휴즈와 내가 예술을 통해 추구하는 목표다.

구성 면에서 두 사람의 그림은 완전히 다르다. 휴즈의 그림은 훨씬 즉흥적이고, 맹렬하게 느껴지고, 에디의 그림은 그에 비해 훨씬 정돈되어 있다.

샤라 휴즈 오스틴은 형태를 매우 단순화해서 표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고, 나보다 훨씬 더 세밀한 계획을 갖고 작업에 착수하는 편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어디 한번 놀아볼까?’ 하는 태도로 캔버스를 마주한다.

오스틴 에디에 비해 훨씬 즉흥적이고, 맹렬한 붓 터치가 느껴지는 샤라 휴즈의 그림. 휴즈는 스케치 작업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Shara Hughes, Fruit Trees, 2025, Mixed media on paper, 56×38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erie Eva Presenhuber, Zurich / Vienna, Photo: Stan Narten, JSP Art Photography.

색채를 다루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나?

샤라 휴즈 오스틴은 그리기 전에 믹싱 작업을 많이 한다. 반면 나는 정말 흘러가는 대로 색을 사용하며 캔버스 위에서 즉석으로 색을 섞을 때도 많다. 평소 서로의 스튜디오를 자주 오가며 색채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에디는 최근 ‘The Mermaid’(2024)나 ‘Mother and Child’(2024) 등 샤갈과 피카소가 연상되는 아름다운 인물화를 그렸다. 이런 변화를 시도한 이유는?

오스틴 에디 사실 대학(시카고예술대학)을 졸업한 후엔 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자전적 이야기를 흑백의 단순한 형태로, 큐비즘에 가깝게 표현했다. 그러다 예술계에 백인 남성을 앞세우는 것이 거의 금기시되다시피 한 시대가 찾아왔고, 좀 더 큰 규모의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새와 과일 등을 그리게 됐다. 성경 같은 이미지가 풍기는 엄마와 아이, 인어라는 신화적 존재는 그런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탐색하게 된 즐거운 ‘스핀오프’다. 전부 다른 그림이지만 내게는 결국 평행선을 그리며 같은 주제 의식을 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휴즈는 어떤가? 앞으로 인물화를 그려볼 생각은 없나?

샤라 휴즈 결코 없다.(웃음) 한 번 시도해본 적 있는데 많은 책임감이 느껴졌다. 어떤 인종과 국적이어야 하는지, 나이는 어느 정도인지, 젠더는 무엇인지 등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요소를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관람객이 주도적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더 민주적인 환경을 만드는 일이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휴즈는 레이디 디올 백을 새롭게 디자인한 적 있고(그는 또 다른 세계의 입구를 상징하는 두 개의 풍경을 가방에 그려 넣었다), 에디도 옷에 관심이 많다. 패션은 당신에게 어떤 이슈인가?

오스틴 에디 디자이너 에밀리 아담스 보디가 만든 브랜드 보디(Bode)를 좋아한다. 디자이너들이 평범한 신발을 어떻게 하면 더 새롭고 흥미롭게 재구성할지 고민하는 일이 내가 회화를 대하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샤라 휴즈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아티스트 중에 패션에 관심이 없고, 그렇다는 사실에 전혀 괘념치 않는 사람도 많지만, 패션에 대한 자기만의 관점이 있고 나아가 이를 통해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건 좋다고 본다.

당신의 그림이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가치는?

샤라 휴즈 나 자신. 그림을 그릴 때 딱히 계획이라는 것을 세우지 않기 때문에 작업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상수는 바로 나다. 무엇을 그리든 내가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가 제일 중요하다. 그 모든 고민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일에 작업의 성패가 달려 있다. 오스틴 에디 동의한다.

휴즈는 여러 인터뷰에서 프리다 칼로, 브리짓 라일리, 폴 고갱, 오스틴 에디 등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가장 꾸준히 좋아한 아티스트는?

샤라 휴즈 마티스. 관람객이 채워 넣을 수 있는 많은 여지를 주는 그의 그림이 좋다. 게다가 그가 활동하던 때는 그런 선택이 몹시 과감한 것이었다는 걸 안다. 그런 담대함도 멋지다. 오스틴 에디 알렉산더 칼더. 그의 작품에는 늘 기쁨과 즐거움이 넘친다. 칼더와 모리스 루이스를 고민했는데 그래도 칼더인 것 같다.

간결한 정물화를 자주 그리는 오스틴 에디가 주목한 과일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과일은 껍질과 과육으로 이루어져 있고, 싱그러움이 자연스럽게 사그라드는 노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 어쩐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Austin Eddy, All Great and Precious Things, 2024, Oil, pastel on canvas, 152.5×91.5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erie Eva Presenhuber, Zurich / Vienna, Photo: Stan Narten, JSP Art Photography.

과거 휴즈는 딱 1점의 작품만 소유할 수 있다면 앙리 마티스의 ‘The Red Studio’(1911)를 소장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면 에디는?

오스틴 에디 셀 수 없이 많은 인물이 그려진 제임스 앙소르의 대형 회화 ‘Christ’s Entry into Brussels in 1889(1889년 브뤼셀에 입성한 그리스도)’(1888).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장 폴 게티 미술관에 영구 소장된 작품으로 보는 사람마다 다른 대상에 주목하는 것이 흥미롭다. 샤라 휴즈 정말 매력적인 작품이다.

에디의 첫 번째 인스타그램 게시물이 2012년 10월 15일 업로드한 휴즈와의 ‘첫 데이트’ 사진이다. 10년 넘게 이어진 두 사람의 관계는 각자의 작업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오스틴 에디 서로의 시선이 작업의 방향성과 지침이 될 때가 많다. 나만의 생각에 지나치게 몰두하다 보면 막다른 길에 처할 때가 있는데 이 같은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예술계에서는 주기적으로 다른 예술가 동료를 스튜디오에 초대해 피드백을 받는 일이 관례처럼 벌어진다. 우린 그 과정을 매일같이 겪는 셈이다. 샤라 휴즈 오스틴과 뭔가를 바라보는 방식이 비슷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렇기에 언제나 서로의 의견을 믿고 들을 수 있다.

상대에게 지나치게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예술가로서 껄끄럽진 않나?

샤라 휴즈 서로를 만나기 전에 이미 아티스트로서 각자의 정체성이 확고했다. 내가 그림을 통해 분노를 표현한다고 해서 오스틴이 같은 주제와 방식을 택하는 것은 아니기에 서로의 영향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술가로서 우리의 교류는 언제나 상호 존중과 이해를 기반으로 이뤄진다.

당신의 상상력이 작품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요소는?

오스틴 에디 시간. 작업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프닝 행사에 참석해야 하고, 브루클린으로 돌아가면 다시 일상을 영위해야 한다. 사회생활도 해야 하고, 남편 역할에도 충실해야 한다. 시간이 언제나 부족하다. 샤라 휴즈 우리가 일중독인 면이 있다. 그러느라 삶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늘 의식한다. 자신의 작업을 진지하게 여기고 본격적으로 몰두하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아직 인생작은 탄생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갈 거다. ‘나의 다음 작품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기대감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중요하지만 삶의 목표를 그것에 국한하지 않는 열린 시선도 필요하다.

작업과 업무, 운동과 휴식으로 빼곡한 브루클린의 일상은 무척 규칙적으로 흘러간다고 들었다. 서로 남몰래 배려하는 부분이 있다면?

오스틴 에디 요리와 청소를 담당한다. 단백질과 채소를 중심으로 최대한 건강한 요리를 점심때마다 만든다. 김치와 연어로 만든 요리도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메뉴다. 샤라 휴즈 작업을 끝내고 집에 가면 어떤 것에도 신경을 쏟고 싶지 않아서 코트와 신발을 제멋대로 벗어둘 때가 많다. 나를 대신해 오스틴이 세세한 집안일까지 신경 써줘서 늘 고맙게 여긴다. 대신 젤리빈스(Jellybeans)를 산책시키는 것은 내 몫이다.

삶에서 예술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샤라 휴즈 젤리빈스?(웃음) 어젯밤에 오스틴과 이 얘기를 나눴는데 아무래도 다정함(Kindness)인 것 같다.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에는 더더욱.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존재는 동물이다. 오스틴 에디 예술은 사람을 다정하게 변화시킬 순 없지만, 다정한 세상과 연결되는 첫 번째 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VK)

    포토그래퍼
    김형상
    피처 에디터
    류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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