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장 7곳의 겨울과 봄, 그 생생한 기록
“시장에 가면, 떡도 있고, 옷도 있고, 청춘도 있고!” 동묘 벼룩시장부터 신당 서울중앙시장까지, 〈보그〉가 밀착 취재한 서울 시장 7곳의 겨울과 봄. 자기만의 스타일로 무장한 채 거침없이 인파를 헤치는 청춘들의 가장 생생한 기록이 덤으로 딸려왔다.


해방촌 신흥시장


남산 아래 해방촌은 1945년 해방 직후 실향민과 피난민이 모여 살며 이룬 마을이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인근 남대문시장에 납품하기 위해 집집마다 스웨터를 만들기 시작해 한때 한국 니트 생산의 주축이 됐다. 해방촌 높은 곳에 자리한 신흥시장은 1980년대까지 동네 주민으로 북적이던 재래시장이었으나 서울 내 제조업이 침체하면서 절반 이상의 상점이 폐점했다. 새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 예술가들이 해방촌에 모여들며 와인 바, 레스토랑, 카페 등이 시장을 채웠고 젊은 세대가 자주 찾았다. 신흥시장에는 서울의 현대사가 모두 담긴 셈이다. ‘굿니스클럽’은 해방촌 신흥시장에서 가장 유쾌한 바이브를 뿜어내는 곳이다. 빨간 머리칼과 유쾌한 웃음이 인상적인 김하나 대표가 이곳 리더로 비건 및 글루텐 프리 베이커리를 만들어 판매한다. 그렇다고 얌전하고 뻔한 카페는 아니다. 상점보다는 공동체 분위기가 강한 이곳에서는 건강한 디저트를 맛보기 위해 찾아온 방문객이 주인의 리더십 아래 금세 친구가 된다. “요즘 사람들은 지나치게 화려한 것보다 진정성 있고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뭐가 됐든 ‘진짜’를 찾아다니는 게 요즘 문화인 것 같달까요. 그런 흐름 속에서 ‘핫플’ 카페로 즐비한 거리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다양한 개성을 포용하는 시장에 자리 잡는 게 더 좋겠다고 판단했죠.” 김하나 대표의 예상은 적중했고, 긍정적이고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펼쳐지는 굿니스클럽의 모든 도전은 매번 단골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카페 로고가 박힌 후디를 디자인하거나 커스텀 케이크를 제작해주는 식이다. 해가 지면 반전 매력까지 뿜어낸다. 해방촌에 어둠이 깔리자 간단히 즐길 수 있는 칵테일과 뱅쇼 등을 내놓는 배드니스클럽에 이곳의 도전을 응원하는 이들이 한가득 모여들었다. (공간의 매력을 알아본 <보그>의 합류로 분위기는 한층 뜨거워졌다.) 비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배드니스클럽의 발칙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는 그 누구라도 매료되기 십상이다. 유승현 프리랜스 에디터


마포공덕시장

시간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 조선 시대 한양의 교통 요지로 활약했던 마포나루. 쉴 새 없이 드나드는 나룻배로 붐비는 나루터는 6·25 전쟁 이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고, 마침내 마포공덕시장의 역사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없는 것 빼고 다 있다”고 회자될 만큼 인근 주민의 절대적인 애정을 받았지만 일대에 아파트 대단지와 오피스 지구가 형성되고 대형 마트가 들어서면서 시장의 입지는 이전과 다소 달라졌다. 그럼에도 관광지보다는 일상적 분위기가 흐르는 마포공덕시장은 여전히 지역 주민의 삶의 기반이 되고 있다. 귀여운 간판으로 시선을 사로잡은 옷 가게 메리제인의 주인은 2년 전 충무로에서 이곳으로 베이스캠프를 옮겼다. “다양한 직업과 연령대의 손님을 마주하는 게 삶의 낙이죠!”

마포공덕시장에는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오가는 직장인들을 겨냥해 점심시간부터 문을 여는 식당이 많다. 정오가 되자 원하는 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발걸음을 보채는 직장인들 틈에서 메리제인의 간판과 똑같은 핫 핑크 볼캡을 눌러쓴 홍정욱이 <보그> 카메라에 포착됐다.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며 공간 브랜딩과 아트 디렉팅을 담당하는 그는 일주일에 최소 세 번은 마포공덕시장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쌀국수, 생선구이, 김치찜까지 시장에 워낙 맛집이 많으니까요. 식사를 하러 나올 때면 시장 어르신들의 옷차림을 유심히 관찰합니다. 트렌드보다 직업적 특성이 짙게 느껴지는 고유의 스타일과 세월이 느껴지는 아이템이 무척 설득력 있게 느껴지거든요. 멋있어요.” 유승현 프리랜스 에디터
신당 서울중앙시장


과거 즉석 떡볶이의 성지였던 신당동이 ‘힙당동’으로 일컬어지며 새로운 만남의 장소로 부상했다. 오래된 노포 사이에 개성 있는 인테리어와 메뉴를 앞세운 카페와 레스토랑, 바(Bar)가 들어서며 주변 상권도 덩달아 활기를 띤다. 오랜만에 거닌 서울중앙시장 일대는 전통 시장과 젊은 소비 트렌드가 충돌하며 일으키는 이질적 조화로 가득했다. ‘고사리 익스프레스 신당’은 서울중앙시장의 축소판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김제은 대표가 이끄는 고사리를 주재료로 활용한 비건 누들 숍으로 시장 안에서도 금세 찾을 수 있는 너그러운 입지와 개성이 뾰족한 메뉴로 평일과 주말 상관없이 긴 웨이팅 행렬을 거느린다. “채식 식당이라는 걸 내세우지 않으려 했어요. 그냥 맛있는 음식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길 바랐거든요. 가장 중요한 것은 신선한 식재료인데, 제철 식재료는 전부 서울중앙시장에서 조달하고 있어요.”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남녀노소 공평하게 오가는 시장에서 채식의 대중성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였다. “우리 세대보다 어르신들은 외식 경험이 별로 없어요. 새로운 메뉴를 맛볼 기회가 많지 않죠. 계절마다 제철 식재료를 활용한 메뉴를 내놓고 초대하니 주위 상인들도 좋아하더라고요. 최근에는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채식 맛집으로 소문난 모양이에요. 나이, 연령, 국적을 초월해 식당을 찾아오는 손님들께 새로운 맛의 즐거움을 알려줄 수 있어 행복합니다.” 유승현 프리랜스 에디터


동대문종합시장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영역을 대관절 가늠할 수 없는 동대문종합시장의 첫인상은 ‘북적북적’ 그 자체였다. 대형 원단을 실은 오토바이와 상인들의 바쁜 발걸음 사이 시장에서 일하는 패션 전공자 최세정이 따릉이를 타고 쏜살같이 지나갔다. 자신만의 패션 아이템을 직접 만들려는 젊은 층이 몰리며 시장 분위기가 한층 명랑해진 것은 몇 해 전. “패션을 전공해 과제나 개인 작업을 위해 이곳을 자주 찾아요. 휴대폰에 단어 몇 개만 검색하면 뭐든 구입할 수 있지만 원단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시장을 익숙하게 드나드는 건 소중한 경험이죠. 어른들의 멋진 옷차림에서 영감도 받을 수 있고요.” 인파를 헤치고 겨우 말을 건넨 대학생 홍석진이 온갖 재료를 둘러보며 말했다. “가장 붐비는 곳은 부자재 상가예요.” 키 링이나 휴대폰 케이스처럼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아이템의 재료를 취급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수십 개 웹사이트를 들락날락할 필요 없이 비즈, 체인, 천, 모루 등 다양한 부자재를 모두 한곳에서 해결할 수 있다. 유승현 프리랜스 에디터

창신동 문구완구시장

형형색색 다양한 장난감 박스가 끝없이 늘어선 핑크빛 판타지. 1970년대에 문을 연 창신동 문구완구시장은 50여 년의 긴 역사를 자랑한다. 시중보다 20~30% 저렴한 가격에 문구와 완구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장소지만 온라인 쇼핑의 확대와 저출산으로 한동안 침체기를 맞았다. 그러던 창신동 문구완구시장에 최근 봄바람이 불고 있다. 산리오를 중심으로 일본 캐릭터 제품을 수입·판매하는 숍이 늘면서 10~20대 손님과 외국인 관광객의 방문이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이다. 연보라색 머리에 호피 무늬 모자와 부츠로 한파에도 개성을 드러낸 중국인 클로이(Chloe) 역시 귀여운 캐릭터 아이템을 찾아 헤맨 끝에 창신동 문구완구시장에 당도했다. “SNS를 통해 저렴하면서 품질 좋은 장난감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남자 친구와 서울 여행 중 제일 먼저 방문하고 싶은 곳이었죠! 산리오, 나가노 등 유명 캐릭터 아이템과 한국 장난감을 한가득 샀어요.” 유승현 프리랜스 에디터
동묘 벼룩시장

빈티지와 트렌드가 멋의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는 동묘시장. 레트로 컬처와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방문했을 법한 곳으로 발길이 좀체 끊기는 법이 없다. <보그> 촬영 날에도 20대 대학생부터 80대 노신사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물건을 구경하고 있었고, 시린 겨울바람에 백금발을 휘날리며 ‘좋은 물건’을 찾아 헤매던 모델 마리아 카르나우코바(Maria Karnaukhova)도 그중 하나였다. 유럽과 러시아,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그는 빈티지 애호가로서 서울에 머물 때면 일주일에 몇 번씩 동묘시장을 방문한다. “빈티지 아이템을 나만의 방식대로 스타일링하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장 디테일하게 표현하는 방법이에요. 새로운 나라에 가면 늘 현지인 친구들에게 빈티지 마켓부터 추천해달라고 하죠.” 그렇게 입문한 동묘시장은 ‘한국적’ 빈티지로 가득했을 뿐 아니라 오래된 시장에서 느낄 수 있는 날것의 분위기, 걷기에 편안한 환경을 모두 갖춘 기대 이상의 플리 마켓이었다. “동묘엔 스타일리시한 사람들이 참 많아요. 모두 개방적인 데다 친절해서 올 때마다 기분이 좋죠. 세상에서 가장 많은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장소고요.(웃음) 서울과 동묘는 저에겐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기억이에요.” 유승현 프리랜스 에디터
망원시장



망원역에 도착한 거의 모든 이들의 발걸음이 일사불란하게 2번 출구로 향한다. 목적지는 망원시장. 대학 생활을 만끽하던 10년 전쯤 나도 망원시장을 꽤 자주 드나들었다. 가장 빈번하게 방문한 곳은 희소성 높은 세계 맥주를 발 빠르게 공수하던 보틀 숍 ‘위트위트’였는데 홍대와 합정에 이어 망원이 핫 플레이스로 급부상하는 타이밍에 짧고 강렬한 입소문이 난 후 2020년 영업을 종료했다. 그러나 50년 전통을 간직한 망원시장은 여전히 최신 세대의 발길로 붐빈다. “연남동과 연희동도 좋지만 망원시장만의 복잡하면서도 한적한 느낌이 좋아요. 한강에 가기 전 망원시장에 들러 떡볶이와 김밥을 사가는 게 우리만의 코스죠.” 꼼데가르송과 콜리나 스트라다를 각자의 ‘최애’ 브랜드로 꼽는 두 패션 꿈나무가 망원시장을 제집처럼 익숙하게 거닐었다(이 기사의 시작 페이지를 장식한 두 소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의 귀띔에 따르면 미마, 태스크포스, 파예 등 곳곳에 포진한 빈티지 숍을 방문하는 것도 망원시장을 만끽하는 또 하나의 방법. 서강대학교 어학당에 재학 중인 대만인 두 여학생은 먹거리에 집중했다. ‘과잠’을 맞춰 입고 어글리 베이커리의 맘모스빵을 먹으며 거리를 구경하던 이들은 고추튀김을 먹고, 짬뽕을 먹으러 가는 길에 <보그> 카메라에 담겼다. 시장 안에서 그릇 장사를 하다가 최근 조금 한적한 곳으로 옮겨 과일 장사를 시작한 상인의 증언처럼, 최근 점점 더 많은 외국인이 서울 시장의 서로 다른 매력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트레이드마크인 새까만 입술로 시선을 사로잡은 화제의 래퍼 몰리 얌, 웻보이, 키드밀리는 망원시장에서 함께 쇼츠를 찍다가 <보그>와 마주쳤다. 망원시장과 망원월드컵시장 사이를 가로지르는 거리의 횡단보도가 이날 이들의 촬영 무대였다. 같은 세대도 완전히 다른 즐거움을 추구하는 광경이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망원시장은 나의 놀이터였던 10년 전과 변함없이 여전한 청춘들의 놀이터로 사랑받는다.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추천기사
-
엔터테인먼트
폭력의 수위가 아니라 액션의 다양성으로 승부를 낸다 ‘굿보이’
2025.06.09by 이숙명
-
아트
“크게 짓는 것이 아니라 크게 느껴지는 것이 중요하다“ - 박진희 건축가
2025.07.01by 김나랑
-
웰니스
식사 전 물 한잔, 살이 빠질까? 하버드 전문의에게 물어봤습니다
2025.06.13by 김초롱, Laura Solla
-
패션 화보
건축 무한 테일러링의 멋
2025.06.30by 송선민
-
아트
시작을 목격하는 설렘,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개관 특별전
2025.06.20by 하솔휘
-
아트
이탈리아 아티스트 10명이 완성한 2026 동계 올림픽 포스터
2025.06.23by 오기쁨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