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 살보의 풍경화 속 ‘그곳’을 찾아서
여행은 영감이 된다. 이탈리아 미술가 살보의 풍경화는 누구나 한 번은 본 적 있을 것이다. 이국적이면서 환상적인 작품 속 그곳은 어디일까?

작가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가족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살보(Salvo, Salvatore Mangione, 1947~2015)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딸 노르마 만조네(Norma Mangione)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흥미롭다. 5월 29일부터 서울에서 열리는 아버지의 첫 전시는 그녀가 직접 준비하는 데다 작품의 주제가 여행이라니 모두의 기대가 크다. “전시는 아버지가 중동, 북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지역을 여행하며 봤던 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1988년부터 2015년까지 그린 작품으로 구성했어요. 아버지는 평생 많은 곳을 여행했고, 방문한 여러 장소가 작품 주제로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행’이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전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죠. 마침 우리 가족이 사는 토리노에서 아주 먼 도시 서울이 여행을 위한 전시를 열기에 딱 좋은 곳으로 느껴졌어요.”

그래서 이번 전시에는 살보가 그린 다양한 장소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골랐다. 토리노 주변의 골짜기부터 이집트와 아이슬란드처럼 멀고 낯선 풍경까지 고루 보여주게 된다. 노르마는 살보 재단 창립자로서 아버지의 한국 첫 전시에 감회가 새롭다. 작가가 그린 모든 장소는 그녀와 어머니에게는 아버지와 함께한 여행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가족에게는 작품 속 모든 장소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세 가지 장소만 세상에 존재한다고 자주 얘기했어요. 떠나기 전에 상상하는 곳, 지금 내가 있는 곳, 떠난 후에 기억에 남는 곳이 그것이죠. 아버지의 그림은 서로 다른 이 세 장소를 표현하려는 시도였어요. 그림 속에 현실과 상상, 기억이 자연스럽게 뒤섞여 있답니다.”

그렇다고 그의 그림이 여행 경험에만 의존한 건 아니다. 여행의 기억에 자신만의 상상을 더해 작품을 완성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어떤 상상을 했을까? 책을 좋아했던 만큼 작가는 여행에 대한 시를 비롯해 글도 여러 편 썼다. 시 ‘여행 중(In Viaggio, Traveling)’(1983)에서 작가는 상상에 대해 언급한 적 있다. “바다가 얼마나 고요한지 보라, 찬란한 달이 그에게 어떻게 비치는지를 아는구나. 저 아래에는 수많은 먼 불빛이 환영하는 해안이 있으나, 나에게는 여행의 밤이 아주 다르게 보이는구나. ··· 내 생에서 경험하고 싶지 않은 환상이 내 마음을 스쳤다.”

이런 매혹적인 풍경화를 선보인 작가가 그간 존재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의 작품은 특별하다. “노르웨이 풍경화는 그려본 적 없어. 왜냐면 가본 적이 없거든”이라고 작가는 친구들에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결국 노르웨이에 가게 되어 그곳 풍경도 그렸다. 물론 노르웨이라는 것이 너무 뚜렷이 드러나는 요소나 디테일은 자연스럽게 제외했지만 말이다. 그는 15세기 이탈리아 미술가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을 중심으로 한 작업 스타일을 이어받은 셈이다.

살보 그림의 트레이드마크는 신비로운 첨탑, 고대 기둥과 고고학 유적지, 계곡, 지중해 풍경이다. 그는 어떤 장소가 미술사에서 얼마나 많이 다뤄졌는지에 관심이 많았고, 그런 장소는 그에게 ‘전형적인’ 곳이었다. ‘오토마티나(Automatina)’는 작가가 창조한 신조어로, 주로 시칠리아, 노르만, 아랍 양식이 결합된 교회 건축물이 묘사된 시리즈를 뜻한다. 작가의 여행은 1990년대에도 이어졌는데, 유럽은 물론이고 오만, 시리아, 티베트, 네팔 등을 방문하며 다양한 작품을 그렸다. 살보 부부는 여행을 자주 다녔고, 노르마 역시 어릴 적부터 함께한 적이 많았다. 작가는 특히 자동차 여행을 좋아했다. 농담처럼 “내가 화가가 아니었다면 트럭 운전사가 됐을지도 몰라!”라고 말했을 정도다. 이들 가족은 차를 타고 포르투갈, 튀르키예, 아이슬란드 같은 먼 나라까지 갔다. 어떤 때는 전시 때문이었고, 또 어떤 때는 단순히 궁금해서였다. 하지만 노르마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은 작은 기념비나 교회 안의 그림을 보기 위해 집 근처 이름 없는 마을에 함께 갔던 짧은 순간이다. 그런 시간이야말로 가족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기 때문. “우리 가족은 여전히 아버지가 많은 시간을 보냈던 토리노에서 살고 있어요. 아버지의 작업실을 살보 재단으로 만들어 어머니 크리스티나 투아리볼리, 디렉터 클라라 다고스타와 함께 아버지의 작품을 보존하고 알리는 일을 하죠. 아버지는 토리노 풍경과 도시의 상징인 독특한 건물 몰레 안토넬리아나를 여러 번 그렸어요. 하지만 이번 전시에는 여행이라는 주제와 조금 거리가 있다고 여겨서 그 작품은 포함하지 않았어요.”
토리노는 작가에게 특별하다. 작가가 생애의 많은 시간을 보냈을 뿐 아니라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전위미술 운동)에 참여하며 작가로서 영향을 받았던 곳이다. 아르테 포베라는 노마드 같은 여행하는 자아를 칭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까지 살보는 아르테 포베라 미술가들과 친구였고,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노르마는 아버지의 여행 욕구는 무엇보다 그가 읽은 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1960~1970년대는 서구의 젊은이들이 동양에 특히 매력을 느낀 시기였어요. 아버지는 스물두 살 때인 1969년 단돈 1달러를 가지고 처음 아프가니스탄을 다녀왔고, 말년에는 우즈베키스탄의 도시 히바(Khiva)를 방문했습니다.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죠. 나이가 들고는 좀 더 편안한 방식으로 여행을 다녔어요.”
작가는 여행지를 정하기 전에 소설 같은 책을 먼저 읽었다. 독서를 유난히 좋아해서 어느 정도 목적지가 정해지고 나면 그곳과 관련된 여행책을 전부 찾아서 읽었다. 그래서 어느 특별한 도시가 중심이 되었다기보다는 그가 여러 번 찾았던 장소가 작품 세계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잠시 별장을 두기도 했던 토리노 근처의 산악 지대나 이탈리아 남부 지중해 연안이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이유다. 그렇다고 그가 영감을 받기 위해 일부러 여행을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적이 만약 있었다면 그것은 그 찰나뿐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노르마는 여행은 작가의 주요 소재지만, 작가의 작품 세계를 변화시켰다고 간주하진 않는다.

“여행에 대해 논하자면, 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의 화가가 아니란다. 여행을 다녀왔다고 해서 내 세계가 뒤흔들리거나 바뀐다면, 그건 화가가 아니라 기자나 삽화가지. 만약 조르조 모란디가 여행을 많이 다녔다면, 아마 그가 그리던 병의 모습이 조금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게 전부였을 거야. 좋은 미술가는 유리잔 하나, 병 하나쯤은 언제든 그릴 수 있어. 중요한 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고, 어떤 형태로 재해석해서 그리느냐는 것이란다.”
노르마는 작가가 생전에 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살보의 초기 작품은 회화뿐 아니라 몽타주, 퍼포먼스 기반의 사진, 개념 미술을 바탕으로 하는 텍스트 등 다채로웠다. 하지만 미술사나 문학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는 후기 회화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여전히 ‘화가 살보’이기 전에 ‘개념 미술가 살보’”라고 작가가 말한 적도 있었다. 작가는 초창기에 개념 미술에 전념하며 실험을 하다 1973년을 기점으로 구상 회화로 작업 방향을 전환했고, 1976년부터 풍경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풍경화를 시작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어요. 우리 재단이 소장한 가장 오래된 그림은 아버지가 열네 살이던 1961년에 그린 작품이에요. 1960년대 후반에는 다른 매체를 탐색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지만 몇 년 뒤에는 다시 회화로 돌아왔고, 그 후로는 계속 회화 작업을 이어갔죠. 풍경화는 아버지가 중요하게 여긴 장르였지만, 동시에 초상화나 정물화도 그렸어요. ‘자연은 예술품의 근본인가? 그러나 왜 하필 예술에만 해당되는가? 자연은 모든 것의 근본이 될 순 없을까?’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그의 풍경화가 실제 자연에서 유래한 만큼 “어딘가에서 살보의 그림을 닮은 풍경을 봤어”라고 작가나 노르마에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때로는 예술이 자연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는 일종의 개념적 전복이라는 발상이 재미있게 느껴진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예술가들이 살보에게서 영감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노르마는 부친이 유머러스했고 역설적 발언을 즐겼기 때문에, 아마 누군가 여행에 대해 말을 건다면 특유의 우스갯소리를 했을 거라고 단언한다. “여행을 많이 해보니, 결국 집에 돌아오는 게 좋은 일이었다”고 말이다. (VL)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글
- 이소영
- 사진
- Courtesy of Archivio Salvo, Gladstone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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