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를 향한 단순한 열망으로 그린 작품
오늘날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는 이미지 생성이 가능해졌다. 그렇다면 가장 오래된 예술 매체인 ‘회화’는 여전히 새로운 미적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을까? 현재 가장 주목받는 회화 작가 성시경이 선보이는 작품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우선 축하합니다! 작가님이 소속된 갤러리 BB&M에서 처음 선보이는 개인전입니다. ‘시소(SEESAW)’라는 전시 제목은 놀이터의 ‘시소’에서 비롯된 건가요?
네, 놀이터의 시소가 영어로 ‘Seesaw’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시소를 타고 올라가면 ‘보인다(See)’, 내려가면 ‘보인 것(Saw)’이라는 점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사실 그건 낭설이었어요. 그래도 이번 전시에서는 그 이미지를 차용해서 표현하고 싶었어요. 작업 과정에서는 2개의 축을 오가며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See’로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해서 즉흥적으로 그리는 상태를, 다른 하나는 ‘Saw’로 이미 경험했거나 기억한 것을 바탕으로 계획적으로 작업하는 것을 의미해요. 이렇게 두 작업 스타일을 왔다 갔다 하는 과정이 마치 시소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시소’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어요. 이번 전시에서는 큰 작품이 ‘See’에 해당하고, 작은 작품이 ‘Saw’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를 들면 갤러리에 입장했을 때, 왼쪽 벽에 걸린 큰 작품이 ‘See’에 해당하고, 코너에 배치된 작은 작품이 ‘Saw’에 해당하는 것 같은데, 두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해주신다면요.
왼쪽 벽에 걸린 ‘수전증 연습’은 제가 추상 표현에 몰입하다 보면 선이 좀 이상하게 그어지는 순간을 포착한 작품인데, 웃기기도 해서 ‘수전증 연습’이라는 제목을 붙였어요. 이 작품이 ‘See’에 해당하죠. 반면 ‘개미놀이-꽉’은 예전 아이패드로 색 조합을 실험하며 다양한 방식을 시도하던 중 마음에 드는 방법을 발견했고, 그걸 캔버스에 옮겨 오렌지색 배경에 파란색으로 붉은 선을 깎아내듯 그린 작품입니다. 이 선들이 마치 개미가 굴을 파는 모습처럼 보여서 ‘개미놀이’라고 이름 붙였고, 이 작품은 과거 작업을 다시 시도한 것으로 ‘Saw’에 해당하죠.



‘See’와 ‘Saw’ 중 어떤 쪽을 더 즐겁게 작업했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See’ 쪽이 더 편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져요. 캔버스 크기도 여유 있어서 자유롭게 표현할 여지가 더 많고요. 반면 ‘Saw’를 작업할 때는 제 성미 때문에 좀 힘든 면이 있어요. 간단한 형상이나 선을 그릴 때도 순간적으로 다른 충동이 떠오르거든요. 예를 들어, 사각형을 그리기 위해 세 변까지 그었는데 다른 아이디어나 새로운 것을 덧붙이고 싶은 욕구가 계속 생겨나죠. 그래서 절제하는 게 쉽지 않아요. 하지만 그런 충동을 잘 참고 넘기며 계획한 대로 작업했을 때는 쾌감도 느껴지고, 작업 완성도에 대한 만족감이 커요.
즉흥적인 스타일과 계획적인 스타일을 번갈아가며 하는 방식을, 마치 게임처럼 룰을 정해 작업에 제약을 거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는데, 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그림을 그리는 일은 정말 즐거운데, 무엇을 그릴지 정할 때나 완성된 그림의 모습을 상상할 때 너무 막연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그럴 때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으로, 즉흥과 계획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게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2023년 d/p에서 개인전 <오랫동안, 갑자기>를 열 때도, 작가 노트에 썼듯 ‘즉흥과 계획 사이에 벽이 있다고 느꼈는데, 다시 보니 둘이 서로를 품고 있었던 것’이라는 깨달음이 있었어요. 이는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많은 작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겪는 과정인 것 같아요. 다만, 다른 작가들은 대상이나 서사를 밑바탕에 두기 때문에 그 층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별로 없지만, 저는 특정 대상이나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그 지점들을 더 깊이 들여다보며, 서로 오가며 작업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바로 그 지점에서 작가님의 작품이 특별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한편으론 그래서 어떤 작품인지, 왜 좋은지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요. 서사와 대상의 부재에 대해 왜 그런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나요?
네, 많이 생각해봤어요. 예전에는 오히려 반항하는 마음으로, ‘내가 그림을 그릴 때는 오직 이 화면, 이 순간에 몰입하는 것일 뿐이고, 완전히 일체화된 상태인데 왜 다른 의미나 내러티브가 필요하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작업에 오히려 흥미로운 심리적 요소가 깔려 있다고 느껴져요. 대상이나 서사를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결핍이 생기거나 부족하다고 느낄까 걱정도 하게 되고요. 구상에서 출발해 추상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더 에너지 넘치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친한 작가 친구도 “너, 괜찮겠어?”라고 걱정할 정도니, 결국 순수한 조형성만으로는 한계에 부딪힐 수도 있겠다는 염려인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미술 작품의 영적이고 신비로운 힘, 즉 숭고미나 고양감 같은 것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어요.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보며 ‘아 좋다!’라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죠. 작가님이 생각하는 미술의 대체 불가능한 매력은 무엇인가요?
제게 미술은 보는 이와 작품을 만드는 이 모두에게 하나의 구체적인 장소 같은 느낌이에요. 어떤 일이든 오랜 시간 몰두하다 보면, 그 내부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순간들이 있잖아요. 그림을 그릴 때는 그 안에서 움직이고 도전하며, 표현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흔적이 돼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요. 인류가 오랜 세월 미술이라는 장르를 발전시켜오면서, 서로 그림을 보고 이야기하는 문화와 역사가 쌓인 것 자체만으로도, 저는 엄청난 힘을 느껴요. 그 자체가 일종의 경외감으로 다가오기도 하고요. 그리고 저만의 개인적인 매력은, 이 긴 역사 속에서 당연하게 여기던 규칙이나 룰을 누군가가 깨뜨리는 순간이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해요. 결국 그것이 미술이 지닌 가장 큰 힘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 미술의 힘을 처음 느낀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언제부터 미술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셨나요?
어릴 때부터 그림을 늘 곁에 두고 살았어요. 축구를 정말 좋아하던 시절에는 경기하는 모습을 그렸고, 게임에 빠졌을 때는 게임 캐릭터를 그리기도 했어요. 입시 미술을 시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인데, 사실 축구 선수나 게임 개발자가 되는 건 어려울 것 같아서, 미술대학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죠.
특히 좋아했던 화가가 있나요?
네, 저는 엘 그레코와 빌럼 더 코닝을 좋아해요. 미술사 책을 볼 때, 책장을 넘기다 보면 꼭 엘 그레코 작품 앞에서 멈추게 되는데, 너무 이상하고 독특해서예요. 몸이 비틀어지고 형태가 이상하게 구부러진 모습, 그리고 색감도 매우 특이하거든요. 엘 그레코만의 운동감과 초월성도 멋지지만, 저를 끌어당기는 건 바로 그 비틀어진 자극적 요소예요. 그래서 고화질 이미지를 다운로드해 확대해서 보기도 하죠. 예를 들어, 하늘을 그릴 때 어두운 파랑에 자주색을 겹치는 과감한 색채 조합은 정말 인상적이에요. 빌럼 더 코닝도 폭력적이라고 할 정도로 강렬한 느낌이 있는데, 특히 그가 물감을 다루는 방식에 감탄하게 돼요. 붓 끝에서 물감이 흐르며 만들어내는 궤적에는, 디지털로는 쉽게 재현할 수 없는 자연스럽고 불규칙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해요. 때로는 이상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매우 자연스럽고, 그 자체로 강렬한 예술적 쾌감을 주는 것 같아요.



1991년생으로 디지털 네이티브인 작가님께서 이미지보다 회화의 물질성에서 쾌감을 느끼신다는 게 인상적이에요. 요즘은 AI와 협업하는 작가가 늘어나는 반면, 관람객이 직접 작품과 ‘촉각’을 통해 대면해야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중요하다고 하는 의견도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촉각성을 스크린과 반대되는 것으로 보는 경우도 많지만, 저는 꼭 촉각성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예를 들어, 평면 회화의 평평함이나 작품의 크기 같은 것도 충분히 감각을 자극할 수 있는 요소라고 봐요. 저 역시 그림을 그리면서 물감을 겹겹이 쌓아 두꺼운 임페스토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좋아하는데,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촉각적 감각이 있거든요. 그렇지만 촉각성은 작업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나타나야지 의도로 전제될 경우 작품의 힘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릴 때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여러 요소가 각각의 출발점에서 시작해 다른 방향으로 가다가, 어느 순간 별다른 약속 없이도 자연스럽게 만날 때, 그때 큰 희열을 느껴요.
그런 순간이 자주 반복된다면, 좋은 작품이 나올 가능성도 높아지겠네요?
맞아요. 그런데 그게 쉽지만은 않아서 들쭉날쭉한 편이에요. 작품이 좋아 보였는데 예상과 달리 만족스럽지 않을 때도 있고, 반대로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올 때도 있어요. 항상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변화와 예측 불가능성이 회화 작업의 묘미이자 즐거움이기도 하죠.
- 글과 인터뷰
- 안동선(미술 칼럼니스트)
- 사진
- 진소연
추천기사
-
아트
책을 펼치게 만드는 책갈피 8
2025.04.23by 조영경
-
아트
읽지도 않는 책이 점점 쌓여가고 있다면? 당신은 '츤도쿠'
2025.04.23by 안건호, María Quiles
-
아트
내 안으로 꽃과 새가 날아들었다, ‘화조미감’展
2025.05.13by 황혜원
-
아트
라 스칼라 극장 최초의 아시아 음악감독, 정명훈
2025.05.13by 오기쁨
-
아트
틱톡에 불어온 독서 열풍, '#북톡'
2025.04.23by 하솔휘, María Quiles
-
아트
2025 밀라노 디자인 위크, 패션·주얼리·뷰티 브랜드가 그리는 리빙
2025.05.22by 김나랑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