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그 공간이 거기에 있었을 뿐’, 칸디다 회퍼가 담는 르네상스

2025.05.29

‘그 공간이 거기에 있었을 뿐’, 칸디다 회퍼가 담는 르네상스

독일 사진작가 칸디다 회퍼의 기자 간담회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사진에 자주 드러나는 빨간색에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그러자 작가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극장이나 공연장에는 원래 레드 카펫이 많습니다.” 여기저기서 맥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많은 이를 실망시킨 이 대답이야말로 수많은 역사적 공간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대변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인 작업을 휘황찬란하게 포장하거나 거창하게 의미 부여하는 법을 모르는 회퍼는 매번 정직하게 자신이 원하는 공간에 카메라를 가져다 놓고, 시공간의 초상을 담담히 포착할 뿐입니다. 지난 50여 년 동안 사진이라는 매체를 활용해 도서관, 박물관, 공연장 등 인류의 문화 활동을 가능케 한 공적 공간을 정밀한 구도와 고유한 시선으로 담아온 작가가 지키는 단 하나의 원칙은 이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그 공간이 거기에 있었다.’

칸디다 회퍼 개인전 ‘르네상스’ 모습.
칸디다 회퍼 개인전 ‘르네상스’ 모습.

국제갤러리 서울점에서 오는 7월 28일까지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 <르네상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어쩌면 전형적인 회퍼 스타일로 알려진 대형 사진 작품을 소개합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들의 느낌이 조금 다른 이유는 아마도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즉 팬데믹 때 촬영한 작업이기 때문일 겁니다. 팬데믹 초기에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카메라를 들 수 없었던’ 작가는 어느 시점에 몸과 정신을 일으켜 작업을 지속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팬데믹 전후로 레노베이션한 건축물, 그리고 작가가 과거에 작업한 장소를 재방문해 다시 작업한 곳을 중점적으로 선보입니다. ‘르네상스’의 원래 뜻인 ‘다시 태어나다’라는 의미에 충실한 큐레이션인 셈이죠.

회퍼의 작품 속, 각각의 공간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저마다 다른 전략과 방식을 취합니다. 파리 역사 박물관 격인 카르나발레 박물관은 레노베이션 후 현대적인 철제 계단을 추가했습니다. 베를린의 3대 오페라 극장 중 하나인 코미셰 극장은 레노베이션 전 모습을 사진으로 박제함으로써 그 이후 미래를 기대하게 만듭니다. 베를린의 대표적 모더니즘 랜드마크인 신국립미술관 건물은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엄청난 존재감을 후배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자의적 해석 없이 그대로 복원한 경우로 유명하죠. 회퍼의 사진들은 이렇듯 변화를 앞두거나 변화한 후의 공간을 뷰파인더에 담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저마다의 방식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애쓴 시공간을 통해 이를 지켜온 인류의 수많은 보이지 않는 헌신을 기록합니다.

칸디다 회퍼

그중 스위스 장크트갈렌 수도원의 부속 도서관 사진은 회퍼가 2001년에 작업한 이후 20년 만에 재방문해서 다시 촬영한 결과물입니다. 스위스에서 가장 유명하고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도 정평이 나 있는 곳이죠. 이번 신작은 전작에 담겨 있던 사람들의 존재만 없을 뿐, 모든 것이 그대로입니다. 천장의 웅장한 프레스코화도, 구불구불한 나무 난간도, 공간을 꽉 채운 17만 권에 이르는 장서도 말이죠. 단순히 이 도서관이 명성에 걸맞도록 엄격하게 스스로를 관리하기에 이 형태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걸까요.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이 도서관이 존재해온 시간, 길게는 1,000년, 짧게는 수백 년의 시간에 비해 지난 20년은 턱없이 짧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회퍼의 사진 속 공간이 담아내는 시간성은 감히 재단할 수 없을 정도로 도저(到底)하기에, 이를 보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영원성에 가닿습니다. 예술이 오랫동안 그토록 염원하고 갈망하던 영원성의 정수를 발견할 때마다, 회퍼의 사진 속 공간은 매번 다시 태어납니다. 매 순간이 르네상스입니다.

정윤원(미술 애호가, 문화 평론가)
사진
국제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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