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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 ‘미지의 서울’

2025.05.30

어른이 된다는 것 ‘미지의 서울’

드라마 <미지의 서울>(tvN, 티빙, 넷플릭스)은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멜로무비>를 잇는 박보영표 힐링 성장 드라마다. 앞선 두 작품은 사회에서 자존감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영 어덜트’의 투쟁을 전면으로 다뤘다. 그중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 박보영이 연기한 ‘정다은’은 정신병동 간호사로 헌신하다가 그 자신이 병을 얻게 된 인물이었다. <멜로무비>의 ‘김무비’는 주변인들의 꿈을 대신 이루었으나 정작 자신은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시니컬한 독립 영화 감독이었다. <미지의 서울>에서 박보영이 연기하는 일인이역은 아직 사회에 굳은살이 박이지 않아 아픈 곳이 많은 다은, 그리고 청춘의 진통을 심하게 앓는 남주인공을 덤덤하게 붙잡아주던 훌륭한 조력자 무비를 모아둔 듯하다.

tvN ‘미지의 서울’ 스틸 컷

<미지의 서울> 주인공 유미래와 유미지는 쌍둥이다. 어머니조차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닮았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성적과 성격은 달랐다. 모범생 미래는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공사에 취직해 집안의 캐시카우가 되었다. 천방지축인 미지는 프리터로 지내며 어머니의 구박을 받는다. 그런데 모범생 미래에게 탈이 생겼다. 회사에서 극심한 괴롭힘을 당하고 있지만 문제 제기가 어렵고, 대출 때문에 그만둘 수도 없으며, 이직도 요원하다. 미래의 정신 상태가 위태로운 걸 알아본 미지는 잠시 삶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tvN '미지의 서울' 스틸 컷
tvN '미지의 서울' 스틸 컷

직장 내 괴롭힘은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비롯해 최근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다루는 문제다. <미지의 서울>은 이것을 상세하고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미래는 삭막한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자기를 챙겨주던 선배가 관리자의 부정을 고발한 후 왕따를 당하자 갈등에 휩싸인다. 미래는 윤리적으로 옳은 결정을 내리지만 믿었던 선배는 회사를 떠나버리고 미래가 다음 왕따가 된다. 평생 여러 경쟁과 시험을 거쳐 샐러리맨치고 가장 안정적이고 돈 잘 버는 자리를 차지한 미래의 동료들은 윤리가 아니라 철저하게 생존의 법칙을 따른다. 물의를 빚지 않고 다수의 편에 서는 것이다.

미래는 책상도 일도 없이 여러 달을 버텼다. 동료들은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밥 먹으러 갈 때, 음료를 돌릴 때, 회의할 때, 당연한 듯 그를 배제한다. 미래가 미지에게 차마 털어놓지 못한 더 심한 괴롭힘도 있었던 듯하다.

tvN ‘미지의 서울’ 스틸 컷
tvN '미지의 서울' 스틸 컷
tvN '미지의 서울' 스틸 컷

직장 생활을 안 해본 미지는 미래가 답답하다. 당장 죽을 것처럼 굴면서 싸울 수도, 그만둘 수도, 재취업을 할 수도 없다는 미래에게, ‘뭐가 그렇게 다 안 된다는 거냐’ 화를 낸다. 바로 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폐쇄감이 괴롭힘의 가장 고약한 폐해임을, 미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다행히 미래에게는 미지가 있다.

<미지의 서울>은 나의 아바타를 만들어서 대신 출근시키고 싶다는 직장인의 흔한 상상을 비튼 듯한 아이디어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가 아니어도, 양심의 가책이나 후환 없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상상은 누구나 한다. 일확천금을 해서 멋지게 사표를 던진다거나,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거나 천재지변을 당해서 당면 과제가 사라진다거나, 회복 가능한 수준의 질병에 걸려서 당장의 책임을 모면하거나, 엄마가 전화해서 “우리 애 회사 못 가요”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본 직장인은 없을 것이다. 그런 회피 욕구와 무수히 싸우면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칭찬이든 비난이든 결과를 책임지는 것이야말로 어른이 된다는 것 그리고 사회인이 된다는 것의 핵심이다. 그러니 <미지의 서울>은 불가능한 환상이고, 그 달콤함이 이 드라마가 먹히는 지점이다.

극 중 미지는 아직 미래처럼 기진맥진하지 않았고, 이 정체성을 무한히 지속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 진짜 미래가 아니기 때문에 미래를 향한 괴롭힘에도 내상을 덜 입는다. 그래서 같은 직장, 같은 대우라 해도 진짜 미래보다는 미래를 연기하는 미지에게 이 상황이 더 수월하다. 그리하여 미지가 미래의 상황을 통쾌하게 반전시키리라는 기대가 생긴다.

tvN ‘미지의 서울’ 스틸 컷
tvN ‘미지의 서울’ 스틸 컷

어찌 보면 이 드라마의 설정은 의미심장한 비유 같다. 사실 모든 인간은 연기자다.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상황에 따라 다른 가면을 쓰고,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며 산다. 사적 자아와 공적 자아를 분리하는 건 직장 스트레스를 줄이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유한한 공적 정체성에 과몰입해 무한한 사적 정체성을 망가뜨리는 건 위험한 일이다. 극 중 미래와 미지는 서로의 공적 정체성을 교환 수행함으로써 각자의 자아상에 대한 과몰입 상태를 벗어나 좀 더 실천적 삶을 살게 된다.

나 대신 출근해줄, 일란성쌍둥이치고도 심하게 닮은 데다 성격 좋고 시간 많고 만만한 쌍둥이 자매가 없는 우리에게도, 미래의 미지 혹은 미지의 미래 같은 존재를 내 안에 만드는 일은 가능할지 모른다. 내 인생 내가 아닌 것처럼 살아보기, 이 드라마가 주는 ‘힐링’의 힌트가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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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미지의 서울'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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