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디자인이 공존하는 갤러리스트 티나 킴의 집
갤러리스트 티나 킴의 맨해튼 타운 하우스에는 예술과 디자인이 공존한다. 다이닝 룸 천장에서 빛을 발하는 양혜규의 작품 아래, 오랜 기간 티나 킴이 수집해온 명가의 가구가 자리한다. 무엇보다 이곳에 정착한 이유는 아이들에게 해사한 유년의 기억을 선사하기 위해서다.

부슬비가 내리던 어느 날, 뉴욕 센트럴 파크를 지나 차분히 정돈된 거리에 자리한 티나 킴의 타운 하우스를 찾았다. 티나 킴은 단색화부터 이미래에 이르는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한 흐름과 아시아 디아스포라 작가까지 조명해온 티나 킴 갤러리 대표다. 브라운스톤과 베이 윈도우 등 빅토리아 시대 건축양식은 어퍼웨스트사이드에서 흔히 보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기류가 바뀌었다. 따뜻한 기운에 빗소리가 멀어진다. 고개를 들면 현관에서 계단, 파우더 룸에 이르기까지 집 안 곳곳에 유명 작가들의 작품과 빈티지 가구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이들의 아우라는 위압감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곁을 내주는 공간이라는 인상을 가질 무렵, 뉴욕 첼시에서 한국 작가들을 비롯해 탄탄한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지켜온 티나 킴의 환대가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녀의 안목과 태도가 고스란히 이 집에 스며들어 있었다.

여러 아트 페어와 전시로 늘 바쁘게 활동한다. 올해는 어떤가?
연초에 프리즈 로스앤젤레스, 아트 바젤 홍콩 등 아트 페어가 연이어 있었다. 특히 2월에는 인도 찬디가르에 다녀왔다.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도시계획과 주요 건축물 설계에 참여한 도시다. 현재 티나 킴 갤러리에서 열리는 <Design for Living> 전시와 관련된 방문이었다. 고(故) 정재웅의 유럽 미드 센추리 가구에 중점을 둔 디자인 사무소 빈티지20(Vintage20)은 전시 기획을 통해 디자인과 예술을 접목하는 노력을 해왔다. 특히 2016년 서울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르 코르뷔지에, 피에르 잔느레: 인도 찬디가르 1951–66>은 이들의 이상적인 건축 철학을 살필 수 있는 디자인을 소개하고자 실제 가구가 쓰이던 건축물의 기둥이나 현지에서 보이는 원색의 색감을 적극적으로 디자인에 활용한 전시다. 이때를 기억하며 꼭 찬디가르를 방문해보고 싶었다. 이제 잠시 숨을 돌리고, 봄에는 뉴욕 집에서 시간을 보내려 한다.
수많은 뉴욕 집 중에서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자랐다. 말 그대로 바다 앞에 있는 집이었다. 늘 자연이 가까이 있었고 반려견도 키웠다. 1995년 뉴욕대 대학원에 진학하며 이 도시로 오게 되었고, 10여 년을 아파트에서 지내다 보니 조금 답답했다.(웃음) 특히 아이들이 커서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 정원과 반려견이 있는 장면을 떠올렸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래서 이 집을 고를 때 우리 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적합한지가 가장 중요했다. 센트럴 파크와 자연사 박물관이 가까워 걸어갈 수 있고 당시 아이들 학교와도 가까웠다. 무엇보다 과시하기 위한 거창한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 설계할 때도 어른과 아이가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지향했다. 아래층에서 손님들과 식사하는 동안 아이들은 위층에서 친구들과 놀거나 공부할 수 있도록 공간을 자연스럽게 나눴다.
이 타운 하우스의 설계도는 <Design for Living>을 기획한 건축가 애덤 찰랩 하이먼(Adam Charlap Hyman)이 맡았다. 인연이 깊다고 들었다.
미술계에 있다 보니 건축가의 작업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프랭크 게리(Frank Gehry)의 빌바오 구겐하임이나 장 누벨(Jean Nouvel)의 루브르 아부다비는 개관을 손꼽아 기다렸다가 직접 찾아갔을 정도다. 많은 건축가 중 애덤과의 인연은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 둘째가 생기며 아이 방이 필요해 아파트 리노베이션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학교를 막 졸업한 젊은 건축가였지만 매우 성실했고,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을 신속하게 공간 디자인에 반영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 후 롱아일랜드 벨포트의 컨트리 스타일 별장, 첼시 갤러리 공간도 함께 작업했다. 갤러리의 파사드는 현대적인 감각의 플로리안 아이덴버그(Florian Idenburg)가 맡았지만, 내부 사무실과 뉴욕 체류 작가들을 위한 아티스트 아파트는 애덤과 함께 설계했다. 이 집을 처음 구입했을 때는 건물 구조를 완전히 바꾸려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설계와 공사에 수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 곧 계획을 바꿨다.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해 집을 떠난 후 완공된다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애덤에게 기존 구조를 유지하면서 공간을 최대한 넓혀, 아이들이 편하게 머물며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집을 설계해달라고 부탁했다.

먼저 이 집으로 들어와 살면서 설계와 공사를 진행한 셈이다. 어려운 점은 없었나?
오히려 실제 생활하면서 공간의 동선이나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오랜 시간 고민할 수 있었다. 특히 디자인과 미술 컬렉션은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것들이라 어떤 작품을 어디에 걸지 먼저 정하고 공간을 꾸미는 방식이었다. 지인들 집에 가보면 그 집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있지 않나. 이 집에서는 다이닝 룸이 그런 공간이 됐으면 했다. 여기 흰 벽에는 이우환 작가의 벽화가 걸려 있다. 2015년 베니스 팔라초 콘타리니 폴리냐크(Palazzo Contarini Polignac)에서 열린 <단색화> 전시 출품작 중 하나다. 이 작품의 크기에 맞춰 벽을 구획했고, 여백을 고려해 장 프루베(Jean Prouvé)의 패널을 설치했다. 이 패널 외에도 오랜 시간에 걸쳐 모은 가구가 많은데, 미드 센추리 가구의 비중이 높다. 장 프루베, 피에르 잔느레, 르 코르뷔지에처럼 건축가로도 활동한 이들의 가구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보다는 엔지니어링이 구현되는 방식 자체에 중점을 두며 미술품과 흥미로운 조화를 이룬다.

다이닝 룸 천장에는 양혜규 작가의 작업도 눈에 띈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조명을 설치하려 했지만, 우연히 베를린 킨들(Kindl)에서 본 양혜규 작가의 설치 작품 ‘침묵의 저장고-클릭된 속심’(2017)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약 17m 높이로 옛 양조장이라는 공간을 채운 블라인드의 움직임을 이 집에서도 보고 싶었다. 물론 이 공간에 맞게 작업 크기는 많이 줄였다. 시중의 블라인드 중에서도 가장 작은 사이즈를 사용했다고 알고 있다.(웃음) 양혜규 작가가 직접 이 공간을 방문해 벽에 걸린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회화 등 가까이 있는 작품과 한 공간에서 어우러지도록 특별히 색을 골랐다.


갤러리에서 선보이는 작품과 개인적으로 소장한 작품은 어떤 점이 다른가?
일과 완전히 분리되진 않지만 이 집의 작품은 사적인 기억과 연결된 경우가 많다. 친분이 있는 작가들의 작업도 있고, 내가 기획한 전시 출품작도 있다.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와는 2000년대 초부터 몇 차례 전시를 함께했다. 첫 전시를 준비할 무렵, 그녀의 뉴욕 집을 찾았을 때 허름한 공간에서 건넨, 나를 당황시킨 첫마디 “Tea or whiskey?”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이후 매년 보내온 연하장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 옆에는 최근 테이트 모던 터바인 홀에서 한국인 최초이자 최연소로 개인전을 연 이미래 작가의 조각이 함께 놓여 있다. 작가가 뉴욕을 방문했을 때 그녀의 요청으로 함께 루이즈 부르주아 재단을 방문할 만큼 부르주아의 작업 세계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배치라고 여긴다.

최근 개인 컬렉션에 더한 작품이 있다면?
다이닝 룸에 걸린 이신자 작가의 태피스트리다. 많은 이들이 단색화 작가들처럼 오랜 시간 활발히 활동한 여성 작가는 없는지 물었고, 내게도 오랫동안 숙제로 남은 질문이었다. 그러던 중 2023년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전시를 위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방문했을 때, 맞은편에서 열린 이신자 작가의 개인전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품은 질문에 하나의 답 같은 작가였다. 지난해 6월 작가의 활동을 해외에 알리고 싶은 마음에 티나 킴 갤러리 소속 작가로 모시게 되었고,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내년 여름 BAMPFA(Berkeley Art Museum and Pacific Film Archive)에서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다.
‘갤러리스트’ 티나 킴에게 이 집은 어떤 공간인가? 특별히 애정을 갖거나 활용하는 곳이 있나?
시차가 나는 프로젝트가 많다 보니 보통 아침은 화상 미팅으로 시작한다. 지금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이 책상에 커피와 노트북을 가져다놓고 하루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화려하진 않지만 창밖 정원으로 반려견들이 오가는 모습이 사람 사는 집 같아서 좋다. 위층에는 요가를 위한 작은 방이 있다. 10년 넘게 함께해온 요가 선생님의 목소리에 집중하면서 동작을 따라 하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렇게 요가로 아침을 시작하거나 때로는 강아지들과 함께 동네를 걷는다. 그런 평범한 아침에 애정이 간다.

티나 킴 갤러리가 첼시 21가에 문을 연 지 10년이 흘렀다. 감회가 새롭겠다.
2015년은 정말 정신없는 해였다. 왜냐하면 베니스에서 <단색화>전이 열린 해였고, 같은 해 5월 첼시 공간에서 첫 전시 <Happy Together>를 열었기 때문이다. 베니스와 뉴욕을 오가며 전시를 준비하던 시기였다. 당시 전시 기획은 지금은 MoCA 수석 큐레이터로 활동 중인 클라라 킴(Clara Kim)이 맡았고, 아시아의 정치적 긴장을 다루는 작가들을 소개하는 전시였다. 박찬경, 임민욱, 김범 등 한국 작가뿐 아니라 홍콩, 싱가포르, 태국 출신 작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순히 한국 작가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시안 디아스포라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구축해나가겠다는 갤러리의 의지를 담았다. 최근 몇 년간 박찬경 작가의 스미스소니언 개인전, 임민욱 작가의 아시아 소사이어티 트리엔날레 참여, 미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정서영과 강서경 작가 등을 볼 때 지난 10년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하다.

올해 5월부터 열리는 전시 <The Making of Modern Korean Art>는 김창열, 김환기, 이우환, 박서보 간의 서신을 다룬다. 어떤 맥락에서 기획했나?
단색화가 처음 국제 무대에 소개될 당시에는 한국의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채 미니멀리즘과 연관 지어 해석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베니스 <단색화>전 이후 활발한 연구가 이어졌고 지금은 거의 모든 현대미술사 책에서 단색화가 하나의 챕터를 차지할 만큼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한국 근현대 미술의 다양성을 조명하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예컨대 1960~1970년대 실험 미술을 다룬 구겐하임 미술관의 <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 전시는 하종현 작가의 실험적 초기작을 비롯해 당시 한국 작가들이 회화에 국한하지 않고 설치, 퍼포먼스, 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를 다뤘다는 점을 짚었다. 이번 전시는 김창열, 김환기, 이우환, 박서보라는 서로 절친했던 네 작가가 주고받은 서신을 바탕으로 그들의 작업을 새로운 맥락에서 조망하려는 시도다. 프로젝트는 김창열 작가가 1969년 뉴욕에 머물며 김환기, 백남준과 교류하고, 아방가르드 페스티벌(Avant Garde Festival)에 참여했다는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다 김창열 작가가 주고받은 편지를 정리하게 되었고, 프로젝트가 확장되면서 박서보, 이우환, 김환기 작가가 소장했던 편지도 함께 모을 수 있었다. 대부분 한자로 쓴 편지여서 홍익대학교 정연심 교수의 도움으로 현대 한국어로 번역한 후, 박서보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편지 배경을 파악하고 다시 영어로 번역하는 데까지 5년 정도가 걸렸다. 한국 작가들이 1980년대 비엔날레를 통해 해외에 알려진 것보다 더 이른 시기부터 이루어진 활동이 있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관련 자료가 향후 연구자들에게 요긴하게 활용되길 바란다.
갤러리스트이자 가족의 일원, 한 개인으로서 요즘 가장 설레는 일은 뭔가?
우리 가족만의 특징이 있다면, 미술 행사가 있을 때 할머니부터 손주들까지 모두 함께 움직인다는 점이다. 올해는 아트 바젤이 끝나고 나면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의 샤토 라 코스트(Château La Coste)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건축, 디자인,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꼭 가봐야 할 와이너리인데, 그곳 전시 공간에서 하종현 작가의 개인전을 연다. 이우환 작가와 더불어 가족과 동료, 친구들이 예술과 함께할 이번 여름이 가장 설렌다. (VL)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글
- 정하영(독립 큐레이터)
- 사진
- 이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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