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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의 세계로 가는 통로, 디자이너 해리스 리드의 집

2025.06.04

오스카 와일드의 세계로 가는 통로, 디자이너 해리스 리드의 집

패션 디자이너 해리스 리드의 런던 아파트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와 오스카 와일드의 우아한 세계관이 맞닿은 완벽한 이상을 조준한다.

올리비아 본 할(Olivia von Halle)의 샛노란 로브를 입고 새 보금자리의 뒤쪽 정원에 선 해리스 리드.

‘당당하게(Unapologetic)’. 필요 이상으로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요구할 것은 요구하는 태도를 강조하는 이 단어는 요즘 들어 자주 눈에 띄는 표현이다. 선구적 패션 디자이너 해리스 리드(Harris Reed) 역시 삶과 디자인을 이야기할 때 이 단어를 즐겨 썼다. 오버사이즈 재킷, 배기 팬츠, 유니섹스 티셔츠 등 젠더 구분을 흐리는 ‘플루이드 패션’의 리더로 불리는 리드(지난해 그가 출판한 책은 <플루이드: 패션 혁명(Fluid: A Fashion Revolution)>이었다)와 그의 작품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다. 그는 옷을 통해 젠더의 개념에 정면으로 도전했고, 정체성과 소속감에 대한 유의미한 대화를 이끌어냈다. 193cm의 인상적인 큰 키에 찰랑이는 붉은 머리칼의 리드는 불과 24세의 나이에 턱시도와 볼 가운 드레스를 조합한 의상을 해리 스타일스에게 입혀 2020년 <보그> 커버를 장식한 것으로 유명하다. 리드는 아델, 슈퍼모델 이만, 샘 스미스, 릴 나스 엑스, 비욘세 등 많은 스타에게도 자신의 화려한 작품을 입혔다. 일찍부터 패션계에서 비상한 재능을 발휘한 리드가 2022년에 니나 리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새송이버섯을 빼닮은 포르타 로마나(Porta Romana)의 벽 조명이 동화 같은 분위기를 더한다.

리드는 화려하고 ‘당당한’ 방식으로 집의 개념도 확장했다. 그는 공간 혁신을 연구하는 스페이셜 이노베이션 랩(Spatial Innovation Lab)의 창시자인 남편 에이탄 세네르만(Eitan Senerman)과 함께 런던 서부의 집을 영국 특유의 개성으로 가득 채웠고, 그가 표현하길 “웨스 앤더슨과 오스카 와일드의 만남”이라고 묘사하는 판타지 세계로 완벽하게 바꿔놓았다. 다채로운 조명, 실크 자수 벽지, 대리석 바닥, 잔뜩 꾸민 천장 등이 아늑한 조화를 이루는 아파트는 69.68m²에 불과하지만, 눈길을 사로잡는 디자인 요소가 공간의 한계를 매력적으로 보완한다. “처음 이 집을 샀을 때 에이탄이 한 말이 기억나요. ‘제발 스칸디나비아 스타일로 미니멀하게 인테리어 한다고 약속해줘’라고 했죠.” 리드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행히 세네르만은 리드의 실험적인 접근 방식을 빠르게 수용한 듯하다. “우리는 집에 관한 온갖 인테리어 요소를 시각적으로 탐구했고, 그 과정에서 예측 가능한 방식과 개념에 틀어박히지 않으려 애썼어요.”

아기자기한 차양을 드리운 발코니에선 정원이 바로 보인다.

리드와 세네르만 부부는 그 전까지는 임대주택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대료가 지나치게 오르자 ‘내 집 마련’에 투자해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갔다. (“유일한 전제 조건은 어느 정도 녹지를 갖춘 집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라고 세네르만은 이야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드는 원래 살던 집과 가까운 곳에 스투코(Stucco, 골재나 분말, 물 등을 섞어 건물 벽면에 바르는 마감재의 총칭)로 마감한 1층 건물이 매물로 나온 것을 알게 됐다. “남편은 보자마자 ‘안 돼, 여긴 우리와 맞지 않는 것 같아’라고 했어요.” 물론 세네르만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이 집은 전면 개조가 필요해 보였고, 야외 공간이 넓었지만 잡초가 무성한 데다 모기가 들끓는 지독한 늪이 골칫덩어리였다. 그런데도 리드는 이곳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어두컴컴하고, 온통 회색과 기분 나쁜 흰색투성이였죠. 그런데 음울한 빛깔과 상태가 최악인 세간살이조차 저를 들뜨게 하더군요.” 리드가 계속 비하인드 스토리를 쏟아냈다. “컬렉션을 디자인할 때 특히 좋아하는 작업인 ‘투알(Toile, 가봉)’ 과정과 비슷하게 느껴졌어요. 전부 하얀색 캔버스 소재로 되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대단하게 보이지 않지만, 사실 모든 건축과 형태, 실루엣과 비전이 탄생하는 과정이죠.”

리드는 2023년 10월 부동산을 매입하자마자 자신의 대부이자 포코너스 디자인(4Corners Design)에 근무하는 해리 해리스(Harry Harris)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그에게서 런던의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인 스튜디오 클레멘타인(Studio Clementine)의 설립자 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지나 우드(Georgina Wood)를 소개받았다. “조지나는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잘 참고 견뎠지만, 예산 같은 현실적인 부분에서도 지혜로운 조언을 건넸어요. 게다가 좁은 공간을 더 넓어 보이도록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었는데 그 점이 제 마음에 꼭 들었죠.” 우드에게도 이 프로젝트는 꿈의 한계를 뛰어넘는 작업이었다. 우드는 설명했다. “컬러를 좋아하는데, 해리스는 그런 단순한 취향을 넘어서는 아주 창의적인 걸 원했어요. 그렇지만 말도 안 되거나 이상한 아이디어는 없었죠. 모든 면에서 개방적인 예술가니까요.”

프로멘탈의 벽지로 도배한 거실 벽과 천장. 도배는 웰스 인테리어스(Wells Interiors)가 도맡았다. 고급스러운 칼라카타 비올라 대리석으로 만든 벽난로 장식은 르네상스 런던(Renaissance London) 제품. 천장에 매단 오브제는 알렉상드르 로제(Alexandre Logé), ‘카말레온다(Camaleonda)’ 소파는 비앤비 이탈리아(B&B Italia), 러그는 지안카를로 발레(Giancarlo Valle)가 노르딕 노츠(Nordic Knots)를 위해 디자인한 것이다.
덴마크 디자이너 헬레 마르달(Helle Mardahl)의 유리 오브제를 얹어 매력을 더한 책 선반.

세상을 초월한 듯한 리드의 패션 디자인에서 단서를 얻은 우드는 고급 벽지 전문 업체인 프로멘탈(Fromental)이 최고의 파트너가 될 거라 확신했다. 거실이 “자연의 연장선에 있으면 좋겠다”는 리드의 요청에 따라 부드러운 녹색 실크 바탕에 자작나무를 수작업으로 새긴 벽지로 거실 벽을 도배했고, 천장에는 복잡한 깃털에서 영감을 받은 벽지를 전면적으로 사용했다. 리드가 설명했다. “학창 시절에 수업 시간마다 꿈을 꾸고, 늘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런저런 상상을 하던 소년에게서 나온 멋진 아이디어죠.” 꽃, 새, 곤충 등을 수놓은 침실 실크 벽지에는 무아레(Moiré, 물결무늬가 있는 비단)를 향한 리드의 사랑이 녹아 있고, 세네르만의 제비와 별 타투를 본떠 새겨 넣은 문양도 있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부터 있었던 스테인리스 스틸 주방 설비 위에 칼라카타 비올라 대리석을 올려 분위기가 우아하다. 스메그(Smeg)의 가스레인지와 엘리카(Elica)의 주방 후드를 설치했다.
토비아스 킨(Tobias Keene)이 그린 리드의 아버지 초상화는 주방 선반에 전시했다.

세로로 정교한 홈을 새긴 주방 선반, 바닥에 깔린 새빨간 카펫과 색을 맞춘 침구 패턴 등 꾸뛰르 스타일을 가미한 요소는 커플의 취향이 일치한 결과다. 침대에 대해 우드가 설명했다. “침대는 방 안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않았으면 했고, 침대 뒤쪽으로 카펫을 넉넉히 끌어 올려서 헤드보드 역할을 하도록 연출했어요.”

니나 리치(Nina Ricci)의 톱과 빈티지 구찌(Gucci) 팬츠를 입은 리드와 세네르만이 침실에서 평소처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클레오(Cleo)’ 샹들리에는 보테가 베네치아나(Bottega Veneziana) 제품. 프로멘탈의 ‘폴리(Folly)’ 벽지가 벽을 감싸고, 시리미리(Sirimiri)에서 맞춤 제작한 침구가 같은 색으로 어우러진다.

리드는 각각의 방을 디자인하는 과정이 “각기 다른 의상을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증언하며 서로 다른 공간에서 완전히 다른 분위기와 경험을 누릴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복도와 클라리지스(Claridge’s) 호텔 복도에서 영감을 받은 흑백 체크무늬 대리석 바닥에는 아르데코 스타일로 퇴폐미를 살렸고, 욕실 역시 빨강과 초록 등 강렬한 색상을 과감하게 활용해 시각적으로 독특하고 기발한 세계를 건축했다. 가구는 앤티크부터 현대적인 제품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다. 침실의 생기 넘치는 무라노 유리 샹들리에와 거실의 1950년대 오버사이즈 이탤리언 벽 조명(원래 영화관에 있던 것을 가져왔다)에서 느껴지듯, 크고 작은 조명 설비와 오브제가 구석구석에서 예기치 않은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흉물스럽고 불안하게 경사진 복도 천장은 광택이 나는 진녹색의 근사한 석고 천장으로 변모했고, 주방으로 가면 연분홍색 벽이 스테인리스 스틸 주방 설비와 현대적인 조화를 이룬다. 서재 겸 TV 룸으로 뒤바뀐 작은방은 광택을 넣어 마감한 패로우앤볼(Farrow&Ball)의 분위기 있는 헤이그 블루 컬러 페인트로 덮었다.

니나 캠벨(Nina Campbell)의 은은한 줄무늬 벽지와 패로우앤볼의 붉은색 페인트가 욕실의 개성을 드러낸다. 촛대는 엘스테드 라이팅(Elstead Lighting), 세면대와 스탠드는 C.P. 하트(C.P. Hart)의 제품이다.
바다 깊숙한 곳에 들어선 듯 푸른빛이 돋보이는 서재. 프로멘탈의 트래버틴 실크 벽지가 제대로 활약한다. 18세기 프랑스 목재 액자로 감싼 티무르 드바츠(Timur D’vatz)의 그림이 스튜디오 클레멘타인에 주문 제작한 청동색 데이베드 소파 위에 걸려 있다. 소파에는 사무엘앤선스(Samuel&Sons)의 테두리 장식을 덧댄 프로멘탈 벨벳 커버를 씌웠고, 크리스티나 룬스텐(Christina Lundsteen)의 쿠션을 매치했다.

영국 다큐멘터리 감독 닉 리드(Nick Reed)와 예술가이자 일룸(Illume) 캔들 회사의 창업자인 미국 모델 리넷 리드(Lynette Reed) 사이에서 태어난 리드는 로스앤젤레스 태생이다. 리드는 9년 전 런던으로 이사했고, 현재는 니나 리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업무를 위해 한 달에 두 번씩 파리로 출퇴근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 칠레 출신인 세네르만은 마이애미에서 자랐고, 런던에 자리 잡기 전까지 로스앤젤레스와 파리를 오가며 생활했다. 긴 시간 방랑자처럼 살아온 리드와 세네르만은 계속 보금자리로 남을 이곳에서 보내는 일상에 푹 빠져 있다. 이곳이야말로 서로에게 절실히 필요하던 안식처다. “주변 친구들이 이곳을 자기 집처럼 느낄 때 우리도 행복을 느낍니다. 우리가 만든 건 ‘진짜’ 안식처니까요. 하나의 꿈으로 다른 사람도 꿈꾸게 된다는 건 정말 근사한 일이에요. 그건 아주 특별한 도전이었죠.” (VL)

    피처 에디터
    류가영
    Busola Evans
    사진
    Miguel Flores-Vianna
    아트
    ©Tobias Keene, ©Faye Wei Wei
    스타일리스트
    Joan Hecktermann
    메이크업
    Joey Ch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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