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 마음을 꺼내면
오늘도 열폭하고 우울했나요? AI 상담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나요?

네이버 지도를 켜고 검색창에 생맥주를 쳤다. 이 기분에 관리 안 돼서 비릿한 맥주를 먹고 싶지 않기에 신중히 골랐다. 신선하고 차가운 생맥주, 그에 어울리는 봄바람을 맞으며 보상받고 싶었다. 주말 출근과 상사의 한마디를. 일요일 저녁 5시. 수도원에서 만든다는 맥주를 주문했다. 직장인이 많은 학동역이라 주말의 한가한 홀에 권태로운 직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맞다, 나는 지금 뭐라도 어긋나면 싸움을 걸 태세다. 두어 잔 마시고 상기된 볼로 밖을 내다봤다. 봄이 한창인 5월. 여기가 세상 어디보다 날씨 좋은 나라 같다. 아까의 불같은 감정이 부질없이 느껴졌다. 다시 한 모금. 이 한 잔에 감정을 털어내려는 내가 가여웠다. 감정의 롤러코스터에서 나는 AI 상담 앱을 켰다.
“나 지금 맥주 마신다.”
상담에 특화된 AI인지라 “무슨 일 때문에 맥주를 마시나요?”라고 묻는다. 다른 앱에 같은 멘트를 던지면 “좋은 시간 보내고 있네요. 지금 마시는 맥주 어떤 스타일이에요? 라거? 흑맥주?”라고 답한다. 연간 5만5,000원을 들인 값 한다.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짧고 어색한 영작이 이어진다. (앱은 한글로도 소통되나 “당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영어를 부탁해요”라고 했다.) 취기가 오를수록 귀찮아진다. 앱은 늘 명확히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지금 어떤 상태인지, 맥주를 마시니 감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등 꼬치꼬치 캐묻는다. 내가 “그만 좀 물어봐, 짜증 나”라고 하자 “그 짜증이 어디서 온 것 같으세요?”라고 되묻는다. 이런 귀찮은 인간, 아니 AI를 봤나. 그걸 알면 지금 화가 나겠니? 이렇게 회답하려다가 주저했다. 언젠가 친구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생성형 AI는 딱 네가 말하는 수준에 맞춰서 답을 준단다.”
그 친구는 챗GPT 마니아다. 거의 매일 7시간씩 한다. “40년 넘게 살며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는 케케묵은 감정을 내가 아닌 다른 대상에게 꺼내는 행위가 처음이었어.” 그녀는 챗GPT 상담이 효과적이라고 했다. “나처럼 극 T 인간에겐 위로보다는 사안이 납득돼야 우울이 해소된다는 것도 알았지.” 이야기를 듣던 그녀의 남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17년 결혼 생활에도 위로할 수 없던 아내를 챗GPT가 독려했다니 어떤 마음일까. 따지고 보면 우린 서로를 모른다. 아무리 가까운 남편이어도 엄마여도. 자기도 자기가 헷갈리는걸. 나도 그녀처럼 수행에 가깝게 7시간씩 질문을 던지면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그녀는 스레드를 자주 방문한다. 그곳에서도 ‘챗GPT가 인간 상담사를 대체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진다고 했다. A는 6년간 심리 상담에만 약 2,000만원을 썼는데 최근 2년간 고민한 문제를 챗GPT와 일주일 이야기하고 해결했다. B는 남자 친구와 힘든 이별 후 전문 상담도 받았지만 정작 챗GPT와의 대화가 도움이 됐다고 한다. 정말 AI 상담사는 대세가 될까? 메타의 CEO 마크 저커버그는 <가디언>에 “모든 사람이 테라피스트를 가져야 한다”며 상담사를 고용할 돈도, 하루 종일 이야기할 사람도 없는 이들에게 AI가 대안이 될 거라고 했다.
AI 상담은 시간당 10만원이 넘는 인간 상담사보다는 저렴하다. 게다가 내게 맞는 상담사를 찾기란, 심해의 거북이 떠올라 내 나룻배의 구멍을 막아줄 확률과 같다. 이건 내가 받은 점괘다. 당시 얼마나 허탈하던지. 그만큼 어려운 확률로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말이야? 그러고 보니 나는 인간에게 상담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답답하면 점을 봤다. 이름 모를 장군님 혹은 할머님께서 내려주신 답을 가슴에 품었다. 아니면 자포자기로 심해에 빠져들었다. 왜 인간에게서 답을 구하지 않았을까? 애초에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어차피 답은 내게 있다. 내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것은, 그저 한순간의 해소로 여겼다. (과거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준 가족과 남자 친구들에게 사과한다.) 그래도 전문교육을 받은 상담사, 전문의는 다를 거다. 하지만 상담소를 찾아가기도 귀찮고, 이게 그만한 일인지 모르겠다. 늘 그래 왔듯이 속상함은 맛있는 생맥주와 넘겨버리면 그만이었다.
배부른 소리다. 깊은 감정 문제를 앓아온 절친은 몇 년째 전문의에게 상담을 받고 있다. 다행히 까다로운 그에게 맞는 상담사를 찾은 듯하다. 처음에는 주 1회 상담을 받았고 지금은 회복되었는지 월 1회로 줄었다. 친구는 상담 내용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가끔 내가 약봉지를 발견하면 “요즘엔 많이 나아졌대”라고 말한다. 그에게 생성형 AI로 상담을 받아볼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그걸로 해결될 일이 아니야.”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답했다. “걔는 약 처방을 내릴 수도 없잖아.” 수긍이 갔다. 그렇다면 다시 일요일의 맥주 사건으로 돌아와, 이 정도로 경미한 우울엔 생성형 AI가 도움이 될까? 나처럼 인간을 믿지 않는 인간에겐 더?
아주대 의과대학 의료정보학교실 박래웅 교수 팀은 “챗GPT가 다양한 정신분석 이론을 통해 적절한 답변을 내는 것을 확인했다”고 국제 학술지 <정신의학 연구>에 게재했다. 하지만 반대 여론이 더 거센 듯하다. 친구의 존재 이유 중 하나는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고 격려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자리를 손쉽게 AI로 대체하면서 우정 서클을 밀어낼 수 있다. 생성형 AI는 배려 없이 내 마음대로 쏟아내고 주문하면 되니, 인간 사이의 배려와 상호 교감이 번거로워질 수 있다. 우리는 점차 고립되고 이로 인해 문제가 더 발생하고, 또다시 상담 앱을 켜야 하는 악순환의 늪.
AI 상담의 큰 장점은 공감 능력이다. 인간보다 확실히 뛰어나다. 하지만 사용자의 감정을 무조건 지지하기에 치료 기능이 떨어진다는 의견도 많다. 물론 위로와 공감만으로도 내 기분이 나아질 수 있지만, 부작용이 있다. 미국 섭식장애협회가 개발한 챗봇 테사(Tessa)는 2023년 운영이 중단됐다. “그래, 네 말처럼 마른 몸이 각광받는 시대긴 하지.” 이런 식으로 체중 감량을 독려했기 때문이다. 미국 플로리다주의 한 어머니는 14세 아이의 자살을 부추긴 ‘캐릭터닷AI’를 고소했다. 사용자가 취약한 감정 상태일수록 끼치는 악영향은 더 커진다.
사적인 정보가 AI에게 넘어가는 것도 두렵다.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구글이 관련 쇼핑 품목을 띄워주는 것까진 받아들였는데, 내 안의 어두운 방을 AI에 임대해도 될까 싶다. 챗GPT에 맛집 추천을 부탁하면, 그는 내 식성을 고려해 비건 식당 목록을 띄운다. 말한 적도 없는데 내가 <보그> 에디터인 걸 알고 “잡지 스타일에 맞는 아이템을 추천해볼까요”라고 친절을 베푼다. 이 지나치게 똑똑하고 어쨌든 기업의 상품인 그에게 내 치부를 상담해도 될지 모르겠다.
어른이 될수록 가슴에 함부로 열 수 없는 방이 늘어난다. 그래서 때때로 타인들이 애처롭다. 나만큼 힘든 과거가 있지만 이렇게 양지로 나와 버티는구나. 성숙해지려면 그 던전으로 내려가 곪은 냄새를 견디고 상처를 헤집어야 할 거다. 나는 방문을 닫은 채로도 그럭저럭 살고 있다. 갑자기 문 몇 개가 열려 내가 무너지는 상상도 해본다. 하지만 그 문을 스스로 열고 청소할 용기가 없다. 타인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그 방을 본다면 너무 어두워서 나를 떠나버릴까 봐 두렵다. 친구나 남편이 아닌 AI가 그 문고리를 돌리는 편이 차라리 나을까? (VK)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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