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주얼리

20세기 모던 주얼리 발명의 결정적 순간

2025.06.10

20세기 모던 주얼리 발명의 결정적 순간

왜 20세기 주얼리는 덜 고귀하고, 덜 정제된 것에서 영감을 받았을까? 생활 속에서 포착된 20세기 모던 주얼리 발명의 결정적 순간에 대한 이야기.

1879년 프레데릭 부쉐론은 프랑스 화가 폴 르그랑에게 퀘스천마크의 첫 번째 드로잉을 의뢰했고, 그는 기다란 담쟁이덩굴 줄기를 그렸다. 2년 뒤인 1881년, 이 스케치는 아이코닉한 목걸이의 첫 번째 모델로 거듭났다. 프레데릭 부쉐론이 사랑한 이 모티브는 1881년부터 1889년까지 메종의 손길을 거쳐 여섯 가지 디자인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다른 주얼러들이 선호했던 일반적인 꽃 대신 첫 번째 매장이 있던 팔레 루아얄의 아치를 덮고 있던 담쟁이덩굴을 재현, 트랑블뢰르 기법을 적용해 착용자의 움직임에 따라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듯한 잎사귀를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주얼리는 신분과 권력의 표상 역할을 했다. 특히 1725년에 브라질에서 다이아몬드가 처음 발견되고 유럽에 대량 유입되면서 다면 커팅을 통해 빛을 최대한 반사하는 기술이 발전했고, 이 반짝이는 돌은 귀족은 물론 신흥 부르주아에게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고귀한 보석으로 만든 초커와 브로치, 시계, 열쇠, 지갑 등 다양한 오너먼트를 달아 화려함을 극대화한 샤틀레느(Chatelaine)도 유행했다. 한편, 이국적 취향을 좇던 유럽 상류층은 명·청 대 귀족 여성들이 착용한 호갑투(甲套), ‘네일 가드’에 매혹됐다. 금과 은, 보석으로 장식한 손톱 커버는 일상생활에 성가실 정도로 길고 화려했지만, 노동자의 짧은 손톱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지위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주얼리에 대해 더 언급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주얼리는 20세기를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호화로운 보물에 불과했던 주얼리가 개성을 드러내고 흥미진진해지는 시점.

그 서막을 연 것은 프랑스의 보석 명가 부쉐론이었다. 19세기 목걸이는 지나치게 정교한 탓에 여성이 혼자 착용하기 어려웠다. ‘하녀가 도와주는 우아함’이 당연시되던 시절, 1879년 부쉐론의 창립자인 프레데릭 부쉐론(Frédéric Boucheron)은 의문을 제기한다. “왜 혼자선 못 걸까?” 그렇게 탄생한 것이 1881년, 잠금장치 없이 목을 감싸는 구조의 부쉐론 ‘푸앙 당테로가시옹(Point d’Interrogation)’, 일명 ‘퀘스천마크 네크리스’였다. 기존 목걸이의 완벽한 대칭 공식을 과감하게 버리고 목선을 따라 흐르는 유기적 곡선을 택했으며, 내부에 스프링 블레이드를 숨겨 유려한 착용감을 완성했다. 당시 다른 주얼러들이 선호하던 꽃 문양 대신 부쉐론의 첫 매장이 있던 팔레 루아얄(Palais Royal)의 아치를 장식한 야생 담쟁이덩굴을 재현한 디자인도 매력적이다. 모든 것이 새로웠던 목걸이는 하이 주얼리의 혁신으로 평가받았고,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애초에 30개만 제작된 이 목걸이는 미국 재벌과 러시아 황실 등 유력 고객에게 추가 주문이 쇄도했고, 오늘날까지 부쉐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클레어 슈완(Claire Choisne)이 오마주를 이어가는 상징적인 피스로 남게 되었다. 퀘스천마크 목걸이는 프랑스 화가 폴 르그랑(Paul Legrand)이 그린 최초의 스케치부터 1884년 미국의 해운 및 철도 사업가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를 위한 커스텀 목걸이까지 현재 부쉐론 아카이브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데, 지금의 시선으로 봐도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조형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1930년대, 이른바 기계시대(Machine Age)로 접어들면서 독일 바우하우스 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주얼리 디자인은 더 흥미로워진다. 장 푸케(Jean Fouquet), 레몽 탕플리에(Raymond Templier), 제라르 상도즈(Gérard Sandoz) 같은 전설적인 주얼리 디자이너들은 우아함을 따랐던 기존 주얼리 디자인의 문법을 버리고 기하학적 형태와 광택에서 영감을 받은 새로운 주얼리 디자인을 선보였다. 이들은 귀금속과 비금속을 대담하게 혼합해 사용했고, 자동차 라디에이터 그릴, 탱크 트랙, 기계 톱니바퀴 등 의외의 요소를 모티브로 삼았다. 이들은 보석이 지닌 본질적인 가치를 오히려 축소해 주얼리를 진정한 예술품으로 격상시키고, 단순한 신분의 상징에서 예술적 오브제로 주얼리를 새롭게 정의했다. 플래티넘, 에나멜, 크롬 등 새로운 소재가 속속 등장했고, 다이아몬드조차 각지고 반듯한 바게트 컷이나 에메랄드 컷이 유행했다. 이들의 작품은 최근 몇 년간 컬렉터 시장에서도 재조명되고 있다. 2021년 크리스티 파리 경매에서 장 푸케가 1925~1930년경 제작한 아쿠아마린과 래커 소재 목걸이가 약 110만 달러에 낙찰되었고, 레몽 탕플리에와 제라르 상도즈의 작품 역시 소더비, 필립스, 본햄스 등 주요 경매시장에서 꾸준히 주목받으며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거리를 걷다 보면 바퀴, 자동차, 기계 등 어디서나 보석에 대한 아이디어가 보인다”는 레몽 탕플리에의 말을 통해 주얼리 디자인의 컨템퍼러리한 면모를 느낄 수 있다.

1938년경 이 목걸이를 의뢰한 윈저 공작 부인(월리스 심프슨)은 반클리프 아펠의 VIP였다. 매우 세련된 취향을 지닌 그녀가 진짜 지퍼처럼 열고 닫을 수 있는 보석을 제안했다. 당시 반클리프 아펠 아트 디렉터였던 르네 퓌상(Renée Puissant)은 월리스 심프슨의 이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수년간 연구를 진행했다. 기술적 난도가 매우 높았기에 1950년에야 완성됐다.

이와 같은 새로운 주얼리 미학은 꼭 소더비 같은 경매시장까지 가지 않더라도, 로마의 주얼리 하우스 불가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불가리는 산업적 미학을 대담하게 도입했다. 1940년대 가스관에서 착안해 금속 밴드에 유연함을 부여하는가 하면 체인, 너트, 볼트 같은 기계 부품을 연상시키는 구조를 주얼리에 대담하게 끌어왔다. 시계와 주얼리에까지 지금도 다양하게 활용되는 불가리의 아이코닉한 스타일 ‘세르펜티 투보가스’가 대표작이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나면 따분하고 지루한 것을 싫어하는, 개방적 성향을 가진 친구가 왜 불가리 주얼리를 그토록 좋아했는지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한편, 지퍼에서 영감을 받은 반클리프 아펠의 ‘지프’ 목걸이 역시 흥미로운 생활의 발견이었다. 1930년대 말 당시 영국 국왕 에드워드 8세의 연인이자 유럽의 패션 아이콘으로 명성을 떨쳤던 월리스 심프슨(Wallis Simpson)은 농담처럼 “지퍼를 목에 걸 순 없을까?”라며 아이디어를 던졌고, 10여 년 뒤 진짜로 다이아몬드와 플래티넘으로 제작된 지프 목걸이가 세상에 나왔다. 고귀한 다이아몬드로 만든 지퍼 목걸이의 실착이 궁금하다면 영화 <킹스 스피치(The King’s Speech)>를 추천한다. 월리스 심프슨 역을 맡은 이브 베스트(Eve Best)는 파티 장면에서 자주색 드레스를 입고 이를 착용했다. 등이 깊이 파인 드레스의 목 뒤에서부터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지퍼 형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봤을 때의 느낌은 ‘오, 생각보다 진짜 아름답다!’. 또한 극 중 심프슨 부인의 대담하고 도발적인 캐릭터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컨템퍼러리한 주얼리 디자인의 흐름은 안전핀, 면도날 등 파격적인 것까지 이어지며 다양한 취향을 충족시켰다. 하지만 결국은 대중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까르띠에 ‘러브 브레이슬릿’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도 너무나 유명한 까르띠에 러브 팔찌는 ‘전쟁이 아닌 사랑을(Make Love, Not War)’ 정신이 흐르던 1969년에 탄생했다. 우주 경쟁과 과학적 탐구로 대표되던 1960년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주얼리 디자이너 중 한 명인 이탈리아 나폴리 태생의 알도 치풀로(Aldo Cipullo)는 개인적인 실연의 아픔에 고통스러운 불면증으로 뒤척였다고 회상한다. “정말 슬펐습니다. 아무도 제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무언가를 원했습니다. 영원한 사랑의 상징을 찾고 있었죠.” 그의 일대기를 다룬 책 <치풀로: 메이킹 주얼리 모던(Cipullo: Making Jewelry Modern)>에는 당시 그가 ‘영원한 사랑의 상징’을 찾고 있었음이 기술되어 있다. 알도 치풀로의 실연의 고통 속에서 탄생한 까르띠에 러브 팔찌는 연인이 서로의 팔목에 직접 채워야만 완성되는 구조였고, 벗을 때도 전용 드라이버가 필요했다. 기계적 낭만이 깃든 디자인은 치풀로가 형과 함께 즐겨 찾던 뉴욕의 한 철물점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더 놀라운 이야기는, 이 디자인은 처음엔 까르띠에의 것이 아니었다. 당시 티파니와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던 알도 치풀로는 러브 팔찌를 먼저 티파니에 제안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파리 본사와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까르띠에 뉴욕의 CEO 마이클 토머스(Michael Thomas)가 가능성을 알아보고 치풀로의 제안을 즉시 수락했다. 까르띠에는 이미 1904년부터 산토스 드 까르띠에 시계에 나사를 노출했고, 러브 팔찌에도 마찬가지로 ‘기능의 미학’을 밀어붙였다. 이로써 러브 팔찌는 전통적인 주얼리의 경계를 넘는, 역사상 가장 기발한 하이 주얼리가 되었다. 러브 팔찌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 소피아 로렌과 카를로 폰테, 낸시와 프랭크 시나트라, 윈저 공작 부부 등 세계적인 커플 25쌍에게 헌정하며 단숨에 상징적인 아이템이 되었다. 배우 알리 맥그로우는 남편 로버트 에반스에게 선물 받은 러브 팔찌를 1972년 영화 <겟어웨이(The Gataway)> 촬영 내내 손목에 감고 등장했다.

까르띠에 러브 팔찌를 디자인한 알도 치풀로는 “귀중하고 격식 있는 보석에서 시대정신을 담은 일상의 부적으로의 전환”이라고 정의했다. <치풀로: 메이킹 주얼리 모던>의 저자 비비안 베커(Vivienne Becker)는 “이 브레이슬릿은 성 해방과 캐주얼한 사치가 대두되던 시대의 정신을 품었다.” 지위와 부의 상징이던 전통적 주얼리 개념에 도전하며, 남녀 모두가 매일 착용할 수 있는 유니섹스 디자인을 완성한 것이다.

이처럼 위대한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와 심미안에서 비롯된 20세기의 위대한 발명 덕분에 주얼리는 다채로운 매력을 지닐 수 있었다. 필자와 같은 컨템퍼러리한 취향을 가진 사람까지 즐겁게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흥미로운 스토리와 가치를 지녔음에도 ‘어포더블’한 까르띠에 러브 팔찌에 대한 욕망이 다시 또 슬슬 올라오는 중인데 여러분은 어떤가. 단, 전용 드라이버 없이는 절대 풀 수 없는 ‘사랑의 족쇄’를 선택했다면, 공항 검색대를 통과할 때 울리는 요란한 경고음에 대비하길 바란다. (VK)

    패션 디렉터
    손은영
    명수진
    사진
    COURTESY OF BOUCHERON, VAN CLEEF & ARP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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