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새로운 문화 공간, 산마르코 아트센터


지난 5월 10일 개막한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을 방문하고 다음 날, 산마르코 광장으로 향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조경가 정영선의 전시가 산마르코 아트센터(San Marco Art Centre)에서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마르코 아트센터는 5월 개관한 문화 공간이자 전시장으로, 산마르코 광장의 옛 행정관청 건물 내부에 자리한다. 본래 사무실로 활용될 뻔했는데 문화 공간이 되었다니 다행이었다. 2023년 프리츠커상을 받은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가 리모델링했는데, 들어서면 거대한 화이트 큐브라기보다는 복도를 따라 전시장이 칸칸이 이어지는 식이었다. 8칸 공간에 정영선의 조경 도면과 모형, 사진과 영상 자료 등이 자리했다. “데이비드 치퍼필드 역시 정영선의 전시에 무척 감동받았죠.” 산마르코 아트센터의 공동 설립자 데이비드 란코비크(David Hrankovic)가 말했다. 먼 이국에서 온 나를 위해 그가 아침 일찍 나와주었다. “지난해에 프리즈 서울을 위해 방한했을 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정영선의 전시를 보고 감명받았어요. 서울 어디를 가든 그녀의 조경이 있다는 사실도 인상적이었고요. 50여 년간 일해온 진정한 개척자죠. 그 여정을 건축전 기간에 보여줄 수 있어 기쁩니다.“


한편에서는 건축가 해리 자이들러(Harry Seidler)의 건축 생애를 다루는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해리 자이들러는 유대인으로 빈에서 태어났다. 1938년 나치가 습격하자 영국으로 망명했으나, 유대인임에도 독일어 사용자였기에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전시에는 그가 착용한 셔츠, 수감 중 간직한 일기와 소지품이 있었다.

그는 포로수용소를 벗어나기 위해 캐나다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하버드에 지원해 건축가이자 바우하우스 설립자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의 제자가 된다. 해리는 블랙마운틴 칼리지에서 아티스트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 밑에서 공부했으며,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와 오스카 니마이어(Oscar Niemeyer)를 위해 일하기도 했다. 그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이 스승들의 이야기도 전시에 함께한다.

해리는 호주로 망명한 부모의 부름을 받아 이주한다. 본인은 원치 않았으나 부모가 집을 지어달라고 부탁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지은 ‘로즈 자이들러 하우스(Rose Seilder House)’는 당시 혁신적인 건축물이었다. 호주 최초의 모더니즘 건축물이다. 완공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 이후 시드니의 ‘블루스 포인트 타워(Blues Point Tower)’를 비롯해 대규모 프로젝트에 임한다.

전시에서 감동적인 부분 중 하나는 건축을 공부한 아내 페넬로페 자이들러(Penelope Seidler)와 함께 지은 집이었다. 시드니 킬라라에 있는 ‘페넬로페와 해리 자이들러 하우스(Penelope and Harry Seidler House)’의 구석구석과 예술 수집가와 후원가로서 활약한 면모도 조명한다. 아내 페넬로페는 산마르코 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 개막식에도 참석했다. 이 전시는 산마르코 아트센터의 공동 설립자인 데이비드 그라마치오(David Gramazio)가 홍콩 방문 당시 해리가 설계한 ‘홍콩 클럽 빌딩(Hong Kong Club Building)’에 압도되었고, 이틀 후 우연히 현지에서 페넬로페를 만나면서 성사됐다.
페넬로페는 87세, 조경가 정영선은 84세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지만 다른 시대와 장소에 머문 여성들이 예술이라는 연결 고리로 2025년 산마르코 광장에서 재회했다는 게 뭔가 뭉클했다.

그 후 해리의 프로젝트는 규모가 더 커졌다. 이탈리아의 유명 엔지니어 피에르 루이지 네르비(Pier Luigi Nervi)와 함께 시드니를 대표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스퀘어(Australia Square)’와 ‘MLC 타워(MLC Tower)’를 건립한다. 콘크리트 고층 건물이지만 아주 가볍고, 정교하다. 해리는 공공 예술에도 매우 관심이 많았다. 그는 누구나 관람할 수 있도록 건물 외부에 요제프 알베르스에게 거대한 벽화,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에게 조각을 의뢰해 설치했다. 건물만큼 큰 규모의 작품이다.
마지막 전시실은 ‘빈으로의 귀환’이라고 쓰여 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해리에게 은장 공로 훈장을 수여했다. 정부가 국가에 공헌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데이비드 란코비크는 “유럽에 잘 알려지지 않은 건축가를 집중 조명하는 이 전시에서 모더니즘 건축의 정수를 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산마르코 아트센터가 지향하는 것은 뭘까. “작품성과 중요성에 비해 간과되어온 작업을 다루고 싶습니다. 미술, 건축, 디자인, 패션 등 문화 전반을 아우를 거예요. 베니스의 문화에 새로운 것을 더하고 싶어요. 베니스에는 수많은 문화 현장이 있지만 비엔날레나 공공 박물관, 특정 개인에게 좌우되는 사설 재단 위주의 전시를 선보입니다. 우리는 그보다 더 중립적이고 역동적인 플랫폼을 지향해요.”
산마르코 아트센터는 이들의 전시를 7월 중순까지 마무리하고, 8월 말 베니스국제영화제 시즌에 맞춰 큐레이터 다니엘 비른바움(Daniel Birnbaum)과 재키 데이비스(Jacqui Davies)가 기획한 양자물리학 관련 전시를 연다. 양자물리학과 예술이라니,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가늠이 안 되지만 그래서 더 기대가 크다.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포토
- San Marco Art Cen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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