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과 낭만, 세실리에 반센의 여름
“그 애의 로맨스는 나의 로맨스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네또츠까 네즈바노바〉의 명문장처럼 패션 로맨스로 우리 시대 소녀들을 매혹하는 세실리에 반센. 한여름 오후의 낭만을 함께 나눈 그녀와 소녀들.


“이거 정말 맛있어요.” 화보 촬영 중간 점심 식사로 간단하게 시킨 김밥 하나를 입에 쏙 넣으며 세실리에 반센(Cecilie Bahnsen)이 말했다. 디자이너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예민함이지만 내가 만난 세실리에는 오히려 그녀가 만드는 드레스 같은 사람이었다. 점심으로 어떤 음식을 원하는지 물었더니, 그녀가 아주 상냥하고 사랑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채식주의자예요. 한국 음식은 아직 먹어본 적 없지만, 고기와 생선이 들어가지 않으면 뭐든 괜찮아요.” 양옆으로 기계 공장이 즐비한 영등포구 문래동의 한 카페, 그 한복판에서 얼굴만 한 볼륨의 화이트 퍼프 슬리브 드레스를 입고 한식을 먹는 디자이너는 낭만적이면서도 생경했다. 그리고 아식스와 세실리에 반센의 만남 역시 마찬가지다. 꾸뛰르 미학을 추구하는 세실리에 반센과 기능성과 퍼포먼스를 우선시하는 아식스, 어찌 보면 전혀 다른 결을 지닌 두 브랜드가 2023년부터 지금까지, 벌써 네 번째 의기투합을 이어오고 있다. 한적한 한여름 날 오후, 세실리에 반센에게 아식스와의 공통점, 그리고 그녀의 방향성에 관해 물었다.

오늘 촬영 컨셉은 <보그>가 해석한 ‘세실리에 걸즈’였다. 당신이 상상하는 ‘세실리에 걸즈’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다.
여성스러움과 강인함, 그리고 자신만의 스타일과 태도를 지닌 사람. 옷을 입은 사람의 태도에서 오는 에너지와 각자의 스타일링에서 늘 많은 영감을 받는다.
사실 이번 화보를 구상할 때 ‘세실리에 반센’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감정인 ‘사랑스러움’을 토대로 컨셉을 기획했다. 당신에게 ‘사랑스러움’이란 어떤 의미인가?
나에게 ‘사랑스러움’은 옷과 감정, 두 가지로 나뉜다. 옷에서 느껴지는 사랑스러움은 풍성한 실루엣과 부드러운 소재처럼 형태와 질감이 전하는 인상에서 비롯된다. 감정으로서의 사랑스러움은 언제나 친절함이 시작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 다정하게 다가오는 순간. 개인적으로는 우리 팀원들을 볼 때 그런 감정을 자주 느낀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 따뜻해서 나에게 ‘사랑스러움’은 그런 순간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감정이다.

방한의 이유인 아식스와의 협업이 궁금하다. 벌써 네 번째 합작인데, 이번에 선보인 스니커즈에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지금까지 아식스와 함께 쌓아온 모든 작업의 본질을 하나의 신발에 담는 것이 목표였다. 다른 때보다 더 단순하고 쉽게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요약하면, 가장 예쁘면서도 편안한 스니커즈를 만들려고 했다.
관계를 장기적으로 이어올 수 있었던 아식스와 세실리에 반센만의 공통점이 있을까?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높은 수준의 장인 정신과 기술, 여기에 창의성을 존중하는 태도까지. 우리는 서로에게 큰 자유를 주면서 함께하고 있다. 그런 신뢰와 창의성의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아식스 외에도 노스페이스, 포터 등 세실리에 반센과는 조금 다른, 다양한 브랜드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파트너를 고르는 기준이 있나?
기준은 분명하다. ‘세실리에 반센 유니버스’에는 없는 무언가를 보완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 브랜드 자체가 하나의 아이콘일 것, 그리고 우리와 비슷한 가치를 지닐 것. 장인 정신, 지속 가능성, 상업성 모두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앞으로 만나고 싶은 브랜드는?
우리가 아직 시도하지 않은 분야, 이를테면 주얼리 브랜드. 또 아직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곧 알파 인더스트리(Alpha Industries)와의 프로젝트가 예정돼 있다. 기능성의 대명사인 봄버 재킷에 세실리에 반센 특유의 볼륨을 더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이런 낯선 조합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이 탄생한다고 믿는다.
2025 가을/겨울 컬렉션을 빼놓을 수 없다. 컬렉션에서는 특히 러닝 베스트를 접목한 룩이 많았다. 아식스와의 협업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로맨틱하면서도 스포티했다.
이번 시즌은 특히 여성의 몸과 그 움직임에 집중했다. 스튜디오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도시를 달리던 여성들의 움직임에서 강한 영감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러닝 베스트는 실루엣을 변화시키면서도 편안함은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도회적인 감각, 기능성, 패션의 낭만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길 바랐다.
사랑스럽고 낭만적인 옷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2025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츠지 유키(Yuki Tsujii)’가 연주한 라이브 기타 퍼포먼스는 어딘가 거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늘 친구들과의 작업을 즐긴다. 유키 역시 오랜 친구인데, 그의 음악엔 긁히는 듯한 날것의 소리와 전자음이 공존한다. 그것이 쇼에 일종의 ‘전기’를 불어넣는다고 느꼈다. 여성스러운 실루엣과 강렬한 사운드의 균형, 그 낯선 긴장감이 쇼를 더 살아 있게 했다. 긴 시간 공들인 작업이 단 몇 분 만에 지나가는 순간, 그 안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싶었다.

그 긴 준비 과정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은 언제였나?
피팅에서 레이어링을 쌓고, 실루엣을 하나씩 만들어갈 때. 이전보다 더 몸에 밀착된 옷이 많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볼륨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스러웠다. 특히 뒷모습에 포인트를 준 스커트는 오래된 역사에서 끌어온 아이디어였는데, 전통적인 구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이 무척 흥미로웠다.
반대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기술적인 요소를 어떤 방식으로 디자인에 반영할지 결정하는 데 꽤 오래 걸렸다. 명확한 방향이 보이지 않을 때는 늘 불안이 따라오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이거다’ 싶은 순간이 있다. 가장 짜릿하다.
그렇다면 ‘이거다’ 싶었던 컬렉션이 있나?
가장 애정하는 두 번의 컬렉션이 떠오른다. 하나는 코펜하겐 항구 옆에서 열린 2020 봄/여름 컬렉션. 물과 자연, 모든 것이 노력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다른 하나는 거대한 사과를 배경으로 파리에서 열린 2024 가을/겨울 컬렉션. 좀 더 성장한, 성숙한 태도가 담겨 있었다. 여성스러움은 여전했지만, 어딘가 더 강인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 무드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세실리에 반센의 스타일은 아주 분명하다.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평소에 본인 브랜드 외에 다른 브랜드는 입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정말 세실리에 반센만 입는다.(웃음) 입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브랜드를 콕 집어 말하자면 꼼데가르송, 이세이 미야케, 1950년대 올드 발렌시아가. 그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원단과 텍스타일에 대한 집착은 그 시대의 꾸뛰르 정신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르겠다.
꼼데가르송, 이세이 미야케, 발렌시아가. 언급한 브랜드 모두 이제 꽤 오랜 역사를 지녔다. 요즘 새롭게 주목하는 디자이너가 있나?
코펜하겐에서 활동 중인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관심이 많다. 그중 니클라스 스코우고르(Nicklas Skovgaard)는 흥미로운 실루엣으로 늘 눈길을 끈다. 그리고 오랜 친구이기도 한 소피 빌 브라헤(Sophie Bille Brahe)의 주얼리. 디자이너로서 함께 자라서, 그녀가 만들어가는 세계를 지켜보는 일은 매우 감동적이다.
당신에게 ‘소피 빌 브라헤’가 감동을 안겨주는 브랜드인 것처럼, 누군가에게 ‘세실리에 반센’은 어떤 브랜드이길 바라나?
설렘과 사랑을 느꼈으면 좋겠다. 우리의 옷을 보고 ‘입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이 이어져, 누군가에게 따뜻한 기억이 시작되거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결국 그 옷에 그 사람만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기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세실리에 반센의 미래는 어떨까?
우리가 만든 세계를 더 넓고 깊게 확장하고 싶다. 언젠가는 자체 제작한 가방과 신발 라인을 본격적으로 선보이며 완전한 ‘세실리에 반센 옷장’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그리고 코펜하겐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고 싶다. 그 공간은 단순히 옷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가 품고 있는 미학과 철학, 예술과 디자인의 세계를 온전히 담아냈으면 한다. 하나의 완전한 세계처럼.
마지막으로 재밌는 질문 하나 해보겠다. 세실리에 반센이 <보그> 에디터였다면 오늘 화보를 어떻게 찍었을까?
와우, 너무 재밌는 상상이다. 런던에 기반을 둔 한국인 사진가 한나 문(Hanna Moon)의 사진을 정말 좋아한다. 아주 일상적인 공간에서 룩을 고급스럽게 풀어내는 감각이 비범하다. 그녀가 세실리에 반센의 세계를 담아낸다면 꽤 흥미로운 작업물이 나올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촬영한 <보그> 팀이 덴마크의 ‘세실리에 반센 유니버스’에서 작업한다면, 또 다른 멋진 시너지가 나올 것 같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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