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소의 팔진도

“煙霞(연하)로 집을 삼고, 風月(풍월)로 벗을 사마.” 누군들 이처럼 살고 싶지 않을까. 안개와 노을, 바람과 달을 곁에 둔다는 이 문구는 퇴계 이황이 안동 도산서원에 머물며 노래한 시조의 한 구절이다.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 열리는 이강소의 전시 제목이기도 하다. 전시 개최 전날, 뿔테 안경을 쓰고 진회색 셔츠를 입은 백발의 작가가 등장했다. 그의 회화처럼 단출한 차림이다. 나는 이강소의 작품에서 서정성을 느끼곤 했는데, 실제의 그는 더 유머가 있다. “내 그림은 어벙하니 잘 그렸다고 할 수 없죠. 하지만 머리가 나쁘진 않습니다.(웃음) 덜 그린 듯한 미완성의 회화는 보는 이가 상상으로 완성할 수 있죠. 이것이 현대 회화입니다. 지난 서양 회화는 작가가 표현한 것을 관람객에게 강제로 이입하곤 했죠.” 본 전시는 이강소의 회화와 조각에 집중한다. 전시장 입구에선 ‘스스로 만들어지는 조각’이 맞이한다. 점토 덩어리를 공중에 던져 떨어뜨렸다. 작가의 개입은 최소화되고 중력과 자연이 조각을 만든 것이다.

또 인상적인 작품은 ‘팔진도’다. <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이 여덟 가지 전술 배치로 적을 교란했다는 8진에서 영감을 얻었다. “관객이 작품 사이를 저마다의 동선으로 오가며 작가의 의도보다는 지금 느끼는 것에 집중하길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이강소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슴, 오리, 배(船)의 도상을 좋아한다. 어린 딸과 함께 과천 서울대공원에 즐겨 다니던 때 작업한 것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배는 특별하다. 미술 평론가 미네무라 도시아키(Toshiaki Minemura)는 “이강소의 배는 이미지를 넘어 진정한 회화적 실재에 도달하려는 또 다른 ‘건너기’를 실현한다”고 말했다. 9월에는 타데우스 로팍 파리에서 1970년대의 퍼포먼스와 영상 등에 집중한 전시를 연다. 올해는 이강소가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당시 막걸릿집에서 소식을 들었어요. 그들이 선정한 작품 대신 내가 원하는 걸 들고 갔는데 용케도 승인됐죠. 구석에 있던 자리를 전시장 가운데로 옮겨주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이강소는 바닥에 석고 가루를 뿌리고 닭을 두었다. 닭이 걸을 때마다 ‘자연스러운 흔적’인 발자국이 남았다. “당시 파리 비엔날레는 고전적인 분위기여서 관람객이 깜짝 놀라더군요.” 2025년 9월, 파리에서 또 한 마리의 닭이 흔적을 남길 것이다.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포토
- Courtesy of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Paris·Salzburg·Milan·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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