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시작을 목격하는 설렘,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개관 특별전

2025.06.20

시작을 목격하는 설렘,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개관 특별전

누군가의, 무언가의 시작을 목격하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어떤 종류의 영광이든 처음이 있었기에 지금이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지난 5월 29일에 개관한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에서 제가 감격스러웠던 건 사진 전문 미술관의 출발과 함께 한국 사진사의 시작과 여정을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진미술관 건립 계획이 발표된 게 2015년의 일이니, 무려 10여 년 동안의 지난한 준비 끝에 드디어 완성된 셈이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수면 아래에서 조용히 진행된 수집과 연구의 결과물들, 그렇게 발굴·정리된 태초의 한국 사진을 마주하면서 시대를 초월하는 감각과 사유를 실감한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새삼 느꼈습니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전경.
‘광채 光彩: 시작의 순간들’ 전시 모습.

개관 특별전인 <광채 光彩: 시작의 순간들>은 제목처럼 지난 1880년대에 시작된 한국 사진의 역사를 톺아보는 전시입니다. 미술사 책에서나 보던, 한국 사진의 선구자인 작가 5명의 작품이 소개됩니다. 정해창, 임석제, 이형록, 조현두, 박영숙 작가가 펼쳐낸 미학적 실험과 사회적 발언에 담긴 메시지가 새로운 공간에서 공명합니다. 이들의 작품들은 한국의 사진 예술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여정을 거쳤는지 보여줍니다. 실험의 면면은 지금 봐도 놀랍습니다. 사진을 통해 드러나는 이들의 예술 언어는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자신들이 포착한 세상의 풍경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거라 생각지도 못했을 그 시대의 예술적 도전은, 그렇기에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정해창, 제목 미상, 연도 미상.
이형록, ‘구성’, 1956.
임석제, ‘소작농강노인’, 1946.

정해창은 1929년 한국인 최초로 개인 사진전을 열어 사진을 근대적 예술 제도에 진입시킨 주인공입니다. 단순한 기록을 넘어 서구적 조형 언어를 당시의 미감으로 해석해내는 솜씨가 돋보입니다. 한편 이형록은 한국전쟁 전후 도시 풍경과 서민의 삶을 리얼리즘 사진으로 담아낸 작가죠. 사회적 현실을 넘어서는 고유한 감수성이 그의 사진 전반에 표표히 깔려 있습니다. 1948년 해방 이후 한국 최초의 예술 사진 개인전을 연 임석제는 노동자의 삶과 시대 현실을 정직하게 응시했습니다. 리얼리즘 사진의 흐름을 주도한 그의 작품은 현실을 넘어서는 희망의 울림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 모더니즘 추상 사진의 선구자로 사진을 조형적 실험의 장으로 확장한 조현두의 사진은 사진 예술이 얼마나 지대한 가능성을 품은 장르인지 보여줍니다. 여성주의적 시각을 사진으로 담아낸 박영숙의 작품은 두말할 나위 없죠. 여성성에 대한 제대로 된 고찰조차 없던 시기, 박영숙의 사진은 그 자체로 훌륭한 기록이 됩니다.

조현두, ‘잔설’, 1966.
박영숙, ‘NEW MASK’, 1963~2021.

제가 목격한 선각자적 작업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둘러싼 지난한 실험과 도전의 현현입니다. 사진 예술의 가장 큰 특성은 아마도 현재성일 겁니다. 우리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어떠한 시대가,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사진적 조형 언어도, 모더니즘의 실현도, 미술사적 가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삶은 예술에 앞서 존재했고, 그렇기에 이들이 기록한 수십 년 전 현실의 풍경은 실로 존엄하고 경이롭습니다. 한국 사진의 출발을 알리는 작가들의 오래된 작업에서 저는 생생한 시대성, 삶의 보편적 아름다움을 만났습니다. 이들의 순간은, 그렇게 영원이 되었습니다. 명실상부 한국의 사진 예술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곳인 사진미술관이, 한발 더 나아가 삶의 단편과 조각난 시대성을 잇는 장소가 되길 바라는 이유입니다. 이곳이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사진이라는 매체의 본질을 우리 마음속에 각인하는 주체가 되길 바랍니다.

‘광채 光彩: 시작의 순간들’ 전시 모습.
‘광채 光彩: 시작의 순간들’ 전시 모습.
‘광채 光彩: 시작의 순간들’ 전시 모습.
정윤원(미술 애호가, 문화 평론가)
사진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제공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