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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후’, 인류는 퇴보했고 좀비는 진화했다

2025.06.23

’28년 후’, 인류는 퇴보했고 좀비는 진화했다

2002년, 대니 보일 감독의 <28일 후>가 등장했을 때, 좀비는 다시 태어났다. 재난에 매몰된 인간성, 황폐한 도시의 정서 등 오늘날 흔해진 좀비 장르의 공식이 <28일 후>에서 시작되어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속편 <28주 후>(2007)는 바이러스를 유럽 전역으로 확산시키며 더 넓은 세계관을 암시했다. 그런데 18년 만에 공개된 <28년 후>는 방향을 돌려, ‘섬’이라는 더 좁고 밀도 높은 무대로 돌아간다. 이전 시리즈를 기준으로 <28년 후>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설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28년 후>는 인간과 좀비를 더 명확하게 대비시키며, 동시에 총 3부작으로 기획된 새로운 이야기의 출발점으로서 흥미로운 문제의식을 제시한다.

영화 ‘28년 후’ 스틸 컷

바이러스 감염자들이 영국에 격리된 채 28년이 지났다. <28년 후>의 배경은 ‘홀리 아일랜드’라는 작은 섬이다. 썰물 때만 육지와 연결되는 지형 덕분에 사람들은 그동안 감염자들의 접근을 피할 수 있었다. 영화 속 생존자들의 삶은 언뜻 목가적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역할을 분담해 가축과 작물을 기르고, 활과 화살을 만들며 살아간다. 12년 인생 전부를 이 섬에서만 살았던 소년 스파이크는 어느 날 아버지 제이미와 함께 생애 첫 정찰 임무를 떠난다. 영화의 초반 30분은 이들이 감염자들의 위협을 피해 다시 섬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사이 아이는 질문을 갖게 되고, 이 질문은 그를 다시 섬 밖의 세상으로 이끈다.

영화 ‘28년 후’ 스틸 컷

영화 초반, 스파이크와 그의 아버지가 정찰을 떠나는 장면에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 ‘Boots’가 삽입된다. ‘발, 발, 발, 발. 군화, 군화, 군화, 군화.’ 1903년에 발표된 이 시는 20세기 초 영국 군인이 남아프리카 전장을 행군하며 느낀 감각을 담고 있다. 대니 보일은 이 시의 1915년 낭송 버전을 그대로 사용한다. 불편하고 거슬리는 사운드는 의도적이다. <28년 후>에서 이 시는 생존자를 둘러싼 공동체의 감성을 드러낸다. 모든 활동은 생존을 위한 것이고, 평화와 안전 외의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시는 섬으로 돌아온 스파이크가 느끼는 불편함과도 대비된다.

첫 출정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아들의 활약상을 부풀려 떠벌린다.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아버지는 몰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과 몸을 섞고, 아들은 그 모습을 목격한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웅극을 보는 듯한 이 장면에서 관객은 이 마을의 생활이 사실은 전근대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새로운 총과 총알을 만들 수 없어서 결국 활을 선택한 것이었고, 남성들은 어렸을 때부터 활쏘기를 배워야 했다. 소년들은 아버지와 사냥에 나가고, 소녀들은 그런 소년을 위해 음식을 준비한다. 이때 아버지 제이미는 이러한 삶에 큰 만족감을 느끼는 인물로 그려진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앞장서는 강한 남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병든 아내를 살리려는 의지도 없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지도 않는 사람이다. 분명 이 섬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영화 ‘28년 후’ 스틸 컷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과 달리 영화 속 감염자들은 나름의 진화를 거친 형태로 등장한다. 바닥을 기어다니며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변한 개체가 있는가 하면, 바이러스를 일종의 스테로이드처럼 흡수해 거대해진 감염자도 있다. 심지어 이들은 리더를 따라 조직적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28년 후>의 감염자들은 사람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먹어치운다는 특징을 지닌다. <28일 후>의 감염자들은 분노 바이러스에 의해 타인을 공격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굶어 죽었다. 그러니 그동안 감염자들은 생존뿐 아니라 존속을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학습했을 것이란 상상이 가능하다. 이 지점에서 <28년 후>의 묘미가 드러난다. 생존을 위해 감염자는 진화했지만, 인간은 퇴보했다는 것. 또 인간은 퇴보하는 문명에 대해 어떤 질문도 품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화 ‘28년 후’ 스틸 컷

<28년 후>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스파이크가 병든 엄마를 살리기 위해 다시 섬 밖으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아이는 그 여정 속에서 점점 더 강해진다. 아이의 모험은 단지 가족을 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스파이크를 내세워 과거에 머물며 변화를 거부하는 세대와는 다른 존재의 등장을 보여준다. 대니 보일은 약 30년 전 영화 <트레인 스포팅>에서 한 세대의 절망을 꿰뚫었던 감독이다. 이제 일흔을 앞둔 그는 <28년 후>에서 ‘지금 여기’에 만족하는 것이 생존인지, 아니면 미래를 꿈꾸는 것이 진짜 인간다움인지 묻는다. 새로운 아포칼립스 세계관의 시작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질문이다. 여기에서 <28년 후>가 이야기의 무대를 작은 섬으로 좁혀놓은 이유도 유추할 수 있다. 스파이크를 통해 영화의 세계관은 작은 섬에서 육지로 이어졌고, 이후 시리즈를 통해 더 크고 넓게 확장될 것이다. 역시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진화는 불가능하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사진
영화 ‘28년 후’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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