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가 K-컬처를 활용하는 놀라운 방식 ‘케이팝 데몬 헌터스’
최근 뮤지컬 <어쩌다 해피엔딩>이 토니상 6관왕에 오르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넷플릭스)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한국 대중은 ‘K-컬처’의 위상에 다시 한번 놀라고 있다. 특히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굿판에서 저고리 시스터즈를 거쳐 K-팝으로 이어지는 한국 음악극의 역사, 무속, 민담, 현대 서울 풍경까지 디테일하게 담아내면서 한국 팬들이 자부심을 넘어 ‘내가 뭘 보고 있나’라는 혼란스러운 느낌마저 갖게 만든다. 크레디트 전반에 한국계 미국인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엄연히 소니픽쳐스에서 전 세계를 타깃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에 놀라움이 배가된다. 그런데 ‘역시 전 세계가 우리 문화를 사랑해’라는 식의 자아도취에 빠져서는 이 작품의 성공 비결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걸 그룹 ‘헌트릭스’가 사실은 노래로 세상을 구하는 ‘데몬 헌터’이며, 악마들이 그에 대적하기 위해 보이 그룹 ‘사자 보이즈’를 결성한다는 내용이다. 한국 문화를 캐릭터, 음악, 비주얼 등에 적극 활용했지만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물,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도 뚜렷하다. 한편 이 작품의 주제 의식과 스토리라인, 동아시아 문화유산을 북미 대중문화로 흡수하려는 전략은 2023년 아카데미 애니메이션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메이의 새빨간 비밀>(디즈니+)을 연상시킨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토론토에서 레드 판다 사당을 운영하는 중국 가정의 소녀가 사춘기를 맞이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주인공 메이는 동아시아계 서구 주부들의 스테레오타입인 ‘헬리콥터 맘’ 아래서 자랐으나 어머니의 통제와 효도 강박에 아무런 반발심을 느끼지 못하는 모범생이다. 메이가 부모에게 가진 유일한 비밀은 그가 보이 밴드 ‘4타운’의 광팬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어느날 메이가 레드 판다로 변해버리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 작품에서 레드 판다는 생리의 은유이자 사춘기에 발현하는 강력한 자아의 상징이다. 메이는 판다일 때 훨씬 강하고 유쾌하고 자유롭다. 하지만 집안의 성인 여자들은 대대로 그랬듯 판다를 봉인해 메이를 평범한 존재로 되돌리려 한다. 처음에는 메이도 순응한다. 그러나 친구들과 보이 밴드 콘서트에 가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어머니와 반목하게 된다. 그 결과 콘서트장을 배경으로 웅장하고 귀여운 ‘판타포칼립스’가 벌어진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자기 혈통의 특수하고 풍요로운 전통은 사수하되 여성 억압 같은 나쁜 유산으로부터는 선을 그으려는 소녀의 분투를 응원한다. 얼핏 이민자 가정의 난제에 초점을 맞춘 것 같지만 소녀의 분투는 보편적 정체성의 문제로 확대된다. 메이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당혹감, 주변 사람들을 만족시키기에 부족하다는 불안감, 못나고 이상한 부분을 비롯해 자기 모습 그대로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 속에서 갈등하며, 그런 자신과 스스로 화합하는 법을 찾아간다.
‘나는 충분히 훌륭하지 않아’, ‘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않아?’라는 건 <겨울왕국>, <인사이드 아웃 2> 등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히트한 최근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발견되는 고뇌다. 데몬과 헌터의 혼혈인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주인공 루미(아덴 조) 역시 대모 셀린(김윤진)에게 자기 몸에 담긴 악마의 흔적을 감추라는 억압을 받고는 정확히 같은 질문을 떠올린다. 그러고는 끝내 ‘나는 산산이 부서졌지만 부서진 조각도 반짝인다’는 감동적인 결론을 얻는다. ‘Be yourself, Love yourself’는 할리우드가 영 페미니스트에게 소구하기 위해 집중해온 키워드다.



메이와 루미의 정체성 혼란은 국적, 인종이 아니라 반인반수라는 개체 특성 때문에 발생한다. 판타지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특정 사회집단의 심리에 집중할 때보다 보편성이 크다. 실사 콘텐츠가 아니라서 가능한 전략이기도 하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의 중국,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한국은 이런 보편적인 정서를 담아내는 ‘독특하게 예쁜’ 그릇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할리우드가 다양성 확대 요구에 부응하는 안전한 방법이기도 하다. 인구, 경제력, 문화적인 영향력을 고려할 때 충분한 수요가 있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말하자면 <코코>(2017)의 멕시코, <모아나>(2017)의 폴리네시아와 같은 선이다.
그 과정에서 K-팝의 역할은 <메이의 새빨간 비밀> 개봉 당시 도미 시 감독의 인터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에 등장하는 ‘4타운’은 K-팝이라 명시되진 않았으나 명백한 K-팝의 영향력 아래 있다. 멤버 중 한 명의 이름은 ‘태영’이고 리더, 막내, 메인 댄서 등 멤버별 역할 구분 역시 K-팝의 그것이다. 감독 자신이 학창 시절 푹 빠져 지낸 2PM, 빅뱅 등 K-팝 아이돌에서 ‘4타운’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춘기의 많은 여자아이들이 아이돌을 통해 이성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고, 같은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과 하나로 뭉쳤다.”
한편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아이돌 그룹은 인간의 관심을 끌어모은 뒤 긍정 혹은 부정의 감정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자 보이즈’는 대중의 수치심과 비참함을 극대화함으로써 악마에 봉사하고, ‘헌트릭스’는 자신을 긍정하는 메시지를 통해 악마에 대적한다.



말하자면 이들 작품에서 K-팝은 팝 음악의 본래 효용을 현시점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하는 장르로서 의미를 지닌다. 스토리텔링 기술상 군중 가득한 스타디움에서 대단원을 펼칠 수 있도록 논리적 전제가 되기도 한다.
이 정도로도 한국 대중이 자부심을 갖고 ‘김구 선생님, 우리가 해냈습니다’라고 외치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K-팝 아이돌, 무당, 귀여운 호랑이와 까치 등이 일본의 사무라이나 그들이 오래전 세팅해둔 사이버펑크 세계관에 준할 정도로 지속력이 있을까는 의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연구해야 할 것은 할리우드가 한국 문화를 활용하는 현상이 아니라 그것을 세계 보편의 주제 의식과 연결하는 방식, 다양한 문화를 흡수, 포용하며 진화하는 습성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케이’가 아니라 할리우드의 파워를 볼 때 제2, 제3의, 혹은 메이드 인 코리아 버전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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