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슬픈 마음 있는 사람

2025.07.03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정기현의 첫 번째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스위밍꿀, 2025)에 해설 원고를 써서 함께했다. 귀한 기회가 닿았다. 소설(가)의 세계 안쪽으로 성큼 들어서서 소설(가)이 펼친 미지의 세계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리저리 가로지른다. 여기도 들여다보고 저기도 둘러보며 신기해했다가 의아해했다가 수긍했다가 괜스레 슬픈 마음마저 드는 소설의 시간이었다. 여덟 편의 소설 한 편 한 편이 그러했고 한 편 한 편 읽어 나갈수록 그러했으며, 마침내 소설집을 다 읽었을 땐 소설 하나하나가 서로의 메아리처럼 코러스처럼 돌림노래처럼 들려왔다. 똑같지는 않지만, 닮아 있는 여덟 세계는 마치 움직이는 여덟 개의 지도 같았고 어렴풋이 이어지는 이야기들의 모음집처럼 보였다. 그 움직임, 흐름에 올라타 나는 유영하고 날아보고 걸어 나갔다.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드는 소설이 책이라는 형식으로 한데 묶여 세상에 나올 때, 그 책의 한편에 생각과 감흥의 흔적을 남길 수 있어 감사하다.

정기현, ‘슬픈 마음 있는 사람'(2025, 스위밍꿀). @swimmingkul

게다가 이 책과 인연을 맺어준 게 바로 이 지면이라니 그 또한 반갑다. 2023년 <보그>에 쓴 박솔뫼 작가의 소설 <극동의 여자 친구들>(위즈덤하우스, 2023)의 서평. 그 글을 세심히 읽어준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의 편집자이자 출판사 스위밍꿀 대표가 이번 원고를 제안했으니 거슬러 올라가면 책이 만들어준 귀한 인연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 그런 일이야말로 마음과 몸이 정직하고 깨끗하고 명료해지는 활동이라 여전히 믿고 싶은 나로서는 그 과정과 결과로 지금 다시 이렇게 앉아 한 권의 책에 관해 쓸 수 있어서 다행이다. 책이 만들어낸 인력과 소설의 영향 아래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느슨하게 연결되고 어렴풋이 접촉하며 나누는 건, 같은 것을 읽음으로써만 가능한 우정. 그 힘으로 다시 쓴다.

“정기현의 소설을 두고 그것을 ‘읽는다’라고 말하는 건 어딘가 부족하고 흡족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두고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연이어 떠오르는 움직임들이 있다.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움직임들이고 흐름이며 그런 것들의 연쇄에 올라타는 일이라고 해야겠다. 음음 음음 음음. 목소리를 가다듬고 허밍하듯 노래하듯 말해보자. 정기현의 소설은 ‘읽는다’기보다는 익숙한 듯 낯선 세계, 가본 듯 가보지 않은 세계의 문을 열어젖히기, 그 문을 열고서는 성큼성큼 들어서기, 그 문 안쪽으로든 그 문 바깥쪽으로든 어느 방향으로든 상관없이 들어서기, 들어서서는 의심 없이 맞이하기, 맞이하고는 가뿐히 올라타기, 올라타서는 훠이훠이 날아오르기, 날아가서는 살포시 착지하기, 발붙이는가 싶더니 냉큼 다시 걸어 나서기, 나섰다고 하면 그렇다면! 보란 듯이 두리번대기, 여기저기 두루 보면서는 콩콩 발 구르기, 구르는가 싶으면 총총 뛰어오르기, 뛰는가 했더니 어느새 유유자적 유영하기… 끝없이 이어 말할 수 있지만, 일단은 여기까지. 이렇게 써놓고 보니, 정기현의 소설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고, 두고 보는 이의 성정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하나같이 몸을 일으켜 움직이는 능동의 활동, 행하는 이들만이 보고, 마주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의 모음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까 저기 앞서 찍어둔 문장 끝의 줄임표는 뭔가를 매듭짓지 못한 채 어정쩡한 태도로 망설이는 유예의 표시가 아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수많은 ‘~하기’를 위한 열린 자리이고 그 가능성의 표현이다. 이때 ‘~하기’에는 지난날 했던 것도 얼마간 포함될 것이고, 지금 하는 것과도 연결될 것이며, 언제고 다가올 미래의 할 것들도 포함된다. 그야말로 ‘하는’ 이들과 ‘하는’ 것들이 만들어낸 ‘하기’의 지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시 쓰면, 움직임의 지도, 움직이는 여덟 편의 지도. 그 각각에는 움직이는 존재들의 속성과 흔적들이 기입되어 있다.” -해설 中-

그렇다. 정기현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산책자의 면모와 모험가의 기질과 탐험가의 눈을 지녔다. 그렇기에 그들은 몸을 일으켜 집 밖으로, 동네로 일단 나서보는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별나거나 그럴듯한 목적이랄 것은 없다. 어디로 향해야 한다는 강박이나 양식화된 방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이들은 예상치 못한 길로 접어들고 의외의 지점과 만나고 생각지도 못한 일 앞에 이를 것이다. 경계선 끝까지, 그 너머로 가보려고 한다. 순응하고 동화되고 길들기보다는 반대로도 가보고 반발도 하는 이것은 일종의 대항하는 몸. 일부러, 굳이, 무릅써보는 이것은 일종의 호기, 반골의 기질. 모든 산책과 산책자가 그렇지는 않겠으나 정기현 소설의 인물들은 엉뚱하고, 무심해, 예기치 않게 불순해진다. 이들의 산책은 자꾸만 다른 길로 미끄러지고 마는 것이다. 이를테면 괴담, 소문, 동네의 비밀과 만나는 일도 가능하다. 또 이를테면 지상의 길만 걸으라는 법도 없다. 하늘도 날고 땅속으로도 들어갈 수 있다. 아예 지상의 물리 법칙을 거스르고, 범속의 리얼리티를 깨뜨리기도 한다. 심지어 비인간의 입장이나 작디작은 소인의 시선과 위치에서 세상을 달리 보는 방법도 여기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수의, 인간 중심의, 기성의 질서에 일격과 일침을 가하는 당돌함이 뭉근하고 정확하다. 짜릿하고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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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현의 소설 세계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 끝에 다다른 곳에서 나는 소설 또는 이야기의 형태를 띤 세계의 여전한 가능성을 발견한다. ‘어째서 이야기는 계속되는가. 어째서 우리는 이야기에 빠져 한참 골몰하는가. 무엇이 이야기로 이끄는가. 어쩌면 가짜일지도 모를, 결코 진짜일 수는 없는 것. 삶도, 삶이 아닌 것도 아닌 이야기 앞에서….’ 어쩌면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에, 이야기의 형식을 빌리고 싶은 것일까. 누가 듣든 말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딘가에 있을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배어 나오는 이야기가 아닐까. 혼잣말에 그치지 않고 수신인에게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정기현의 소설은 그런 마음을 안다. 그런 마음을 그린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그 마음을 읽어내는 사람. 그런 마음이 이어지는 세계,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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