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나도 모르게 이어온 전통, ‘아득한 오늘’展

2025.07.04

나도 모르게 이어온 전통, ‘아득한 오늘’展

‘아득한 오늘’이라니. 전통에 대한 전시 제목으로 정말 근사합니다. 국제갤러리에서 7월 20일까지 선보이는 이 전시는 미술가 박찬경이 기획해 궁금증을 더 증폭시켰습니다. 그는 지난 2014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서 예술감독을 맡아 ‘귀신 간첩 할머니’라는 희한한 제목의 전시를 선보였습니다. 강렬한 식민과 냉전의 경험, 사회적 급변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동시대 ‘아시아’에 대한 고민이 묻어 있는 단어의 조합이지요. 동시에 이는 박찬경 작가가 줄기차게 고민해온 이슈인데요. <아득한 오늘>전은 이 모든 것의 화두가 되는 한국의 근대성과 식민지 이후에 단절되거나 잊힌 전통 인식 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국제갤러리 한옥 기획전 ‘아득한 오늘’ 설치 전경.

박찬경 작가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전통이라는 주제를, 다름 아닌 다섯 작가의 작품에서 찾아냈습니다. 전시는 김범, 임영주, 조현택, 최수련, 최윤 작가의 작업으로 구성되는데요. ‘미술가들의 미술가’로 사랑받는 김범 작가는 조선 시대에 유래한 괴석도를 추상화하고 재해석한 작업을 보여줍니다. 1990년대 초 회화의 물성을 탐구하는 드로잉 역시 귀한 작품이지요. 한편 1982년생 조현택 작가는 주로 도시와 비도시의 경계를 발견해 사진으로 기록해왔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변두리에서 발견되는 기이한 한국적인 풍경, 민속신앙, 미신의 전재를 탐색한 작품을 대거 선보입니다. 엉뚱한 데 놓인 석탑과 버려진 듯한 불상 등이 매우 초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김범, ‘괴석도’, 2022, Ink on paper, wooden frame, 95.5×47.3cm
조현택, ‘조각난 두상들’, 2024, Digital pigment print, 72×140cm

한편 1986년생 최수련 작가는 현시대에 재현되거나 소비되는 동양풍의 이미지에 주목합니다. 특히 동아시아에 떠도는 설화를 미술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중국 귀신 설화에서 인용한 작업을 소개합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기이한 이야기가 동양화를 빙자한 캔버스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989년생 최윤 작가는 대중문화, 미디어, 인터넷 등에서 발견되는 이미지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덜란드 라익스 아카데미 레지던시에서 만든 텔레비전 스크린, 리모컨, 휴대폰을 구현한 조각도 그렇지만, 화강암 빨래판으로 만든 작업이 특히 흥미롭더군요. 한때 인터넷 쇼핑몰에서 유행했지만 결국 어떤 전통으로도 거듭나지 못한 화강암 빨래판을 일으켜 세워 만든 비석과 병풍 작업이 내내 기억에 남습니다.

최수련, ‘섭포의 노래’, 2025, Watercolor, oil, silver ink on linen, 130×97cm
최윤, ‘3성TV은하46”’, 2023–2024, Ceramics fired at variable kiln soaking duration, copper wires, coins, various metal pieces and metal oxides, Approx 101.5×57.1×1.5cm(each)

1982년생인 임영주 작가는 참여 작가 중 가장 다양한 매체의 작업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미신, 신화 등이 형성되고 수용되는 과정을 관찰하고, 이를 작품으로 풀어내는 미술가입니다. 이번에는 대표적인 영상 ‘요석공주’부터 조각과 회화 등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데요. 특히 개인적으로 저는 서까래 위에 얹힌 ‘뒤집힌 왕’이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임금 왕(王) 자를 거꾸로 걸어두면 집에 잡귀가 들지 않는다는 설을 소환한 작가는 기왕이면 글자보다는 얼굴이 낫지 않겠느냐며 그린 임금의 초상을 거꾸로 걸어두는 재치를 발휘합니다. 한옥이라는 장소성이 작품의 맥락을 한결 풍성하게 만들고 있지요.

임영주, ‘요석공주’, 2018, Three-channel video, color, sound(stereo), 43min. 10sec
국제갤러리 한옥 기획전 ‘아득한 오늘’ 설치 전경.

다섯 작가가 전통을 대하는 방식은 전혀 무겁지 않습니다. 가볍고, 그래서 나름의 해학으로 빛나지요. 엄격한 제도 아래 고이 보호받아 계승된 전통보다 일상에서 희미하게 남아 있는 전통이 오히려 우리 현실과 더 가깝고, 그래서 더 생생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번의 보수, 즉 근대화와 현대화를 거쳐 “현대 문화의 일부이기도 하고, 살아남은 전통의 잔여물”인 이 한옥이라는 공간처럼 말이죠. 아, 전시를 보러 가시면 박찬경 작가가 쓴 전통에 대한 글이 실린 리플릿 챙기는 것도 잊지 마세요.

국제갤러리 한옥 기획전 ‘아득한 오늘’ 설치 전경.
국제갤러리 한옥 기획전 ‘아득한 오늘’ 설치 전경.
국제갤러리 한옥 기획전 ‘아득한 오늘’ 설치 전경.
정윤원(미술 애호가, 문화 평론가)
사진
국제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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