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깊은 집에서 아파트까지, 지극히 사적인 건축사
마당 깊은 집에서 자라다가 다가구 벽돌집을 거쳐 아파트에 입주했다. 지금은 헐린 동대문운동장과 그 자리에 들어선 DDP를 오갔다. 내가 머문 건축은 어떤 나를 만들었을까.

“기내에서 보면 서울 옥상이 녹색이에요. 자연을 존중하는 의미인가요?” 2018년 당시 무인양품의 아트 디렉터였던 하라 겐야가 내게 물었다. 그가 기획한 하우스비전(미래의 주거 환경을 제안하는 세미나 및 전시 프로젝트)의 서울 개최에 즈음해 DDP에서 인터뷰 중이었다. 당시 나도 이유를 몰라 답을 못했는데, 알고 보니 옥상에 비가 고이지 않게 칠하는 방수제 대부분이 녹색이라고 한다. 그에게 녹색 옥상 말고 서울 건축의 특징을 묻자 “멋진 곳에 살고 싶은 욕망의 현대적인 아파트와 공간을 더 쓰고 싶다는 욕망의 옥탑방이 인상적”이라고 답했다.

나 역시 녹색 옥상의 빌라와 아파트에서 살았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럴 것이다. 옥탑방은 이사 후보지에 있었으나 기회가 닿지 않았다. 옥탑방에 사는 드라마 주인공이 비루함보다 낭만으로 묘사됐지만(삼겹살 굽기나 야경 같은), 실제 살아본 이들이 극심한 더위와 추위를 증언했기 때문이다. 한 번쯤 살아볼걸 아쉽긴 하다.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 방문 중에 7년 전 이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건축전에 참여한 66개국 대부분이 기후 위기에 따른 건축의 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수면 상승으로 언젠가 사라질 거라는 괴담이 도는(아니면 현실일) 베니스에 ‘어울리는’ 전시였다. 관람장을 나서자, 할아버지 두 분이 공구를 담은 양동이와 페인트를 들고 지나갔다. 주민들이 사는 지역에 가면 가끔 비슷한 풍경을 본다. 오랜 역사만큼 계속 관리해야 하는 집에 사는 건 어떨까. 문화유산이라 마음대로 개보수를 못해 답답할까, 자부심으로 아무렇지 않을까, 잦은 침수로 1층은 월세가 저렴할까 등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다면 철근 콘크리트와 벽돌의 도시, 서울에 사는 나는 어떤가. 누군가는 서울의 건축 풍경이 개성이 없다고 하지만, 이곳이기에 가능한 경험을 쌓아왔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말이다.


공간은 사람의 행동과 삶을 규정한다. 최근 읽은 건축 서적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건축가 유현준은 <공간 인간>에서 벽, 창문, 바닥, 지붕 등 몇 안 되는 요소가 사람들의 관계를 규정한다고 말한다. “벽은 사람 사이를 단절시키고, 창문은 사람 사이를 시각적으로 연결하며, 문이나 계단은 둘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관계로 만든다.” 이는 확장돼 건물 내부인과 외부인의 관계, 사람과 자연의 관계, 나아가 사회 구성원의 관계를 결정한다.
건축가 승효상은 <건축 사유의 기호>에서 “건축이 우리의 삶을 바꾼다”고 단언한다. “비록 그 건축의 효과가 즉각적이지 않아 우리가 느끼기에 더딜 뿐이지 건축은 우리의 인격체를 완성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그래서 건축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보그>에서 이번에 인터뷰한 건축가 김사라도 “사람이 공간을 만들지만, 공간이 사람을 형성한다”고 말했다. 나도 내가 머문 공간의 지배를 받았을까?
성인이 된 후 내가 가장 오래 산 곳은 붉은 벽돌집이었다. 인건비가 저렴해 벽돌을 한 장씩 쌓아 올릴 수 있던 벽돌집은 주로 다세대·다가구로 1970~1980년대에 집중적으로 지었다. 한번은 베란다 세탁기에서 샌 물이 옆집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베란다로 옆집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집주인이 두 채로 월세를 받으려고 베란다에 가벽을 세운 것이다. 어쩐지 옆집 밥숟가락 놓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래도 집주인이 마스터키로 몰래 들락거리기까지 꽤 살았다. 옆집과 얽히고설킨 다가구 벽돌집은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대학 입학 후 첫 자취방은 반지하 빌라였다. 내가 자란 시골에는 반지하가 없어서 신기했다. 입주하는 날 처음 본 친구와 한방을 썼다. 친구는 택배가 오는 날에는 집에 일찍 갔다. 배달 주소를 B101호가 아닌 101호로 썼기 때문이다. 지하라서 창피하다고 했다. 나는 그저 벌레가 많이 나오는 게 싫었고, 친구와 소원해져서 반년쯤 후 이사했다. 반지하방이 스무 살 나의 심신에 큰 영향을 주진 않았고 오히려 젊은 날의 훈장 같지만, 친구가 잠들기 전 한 말이 잊히진 않는다. “무덤에 누워 있는 것 같아.” 반지하가 불행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되짚고 있다.
그 후 10여 차례 이사하고 아파트에 입주했다. 누군가는 아파트를 우리나라 건축의 숙주라 한다. 한국인의 60%가 사는 그 모양이 그 모양인, 이름만 경쟁적으로 휘황찬란한 건물. 좁은 땅에 많은 인구를 효율적으로 담고, 자산의 척도가 된 권력자. 나는 마흔이 넘어서야 처음 아파트로 왔다. 경비실의 존재부터 신기했다. 누군가 내 현관을 지킨다니. 세탁소에 옷을 맡겨도 주인은 이름 대신 몇 호인지 물었다. 단지 내에서 나는 개인이기 전에 00동 000호다.

어느 날 아파트에 안전 등급 미달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위험하다는 판정을 받고 기뻐하는 데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 같다. 요즘엔 재건축 주민 동의서를 제출하라는 강요 아닌 강요가 전화와 방문으로 계속된다. 혹시 나도 공돈이 생기려나 슬쩍 들뜨기도 했다. 이 기운은 우리 아파트를 에워쌌고 각종 건축사의 현수막과 포스터가 부추긴다. ‘집값’이라는 목표로 모인 공동체라고 해야 하나. 아파트에서의 생활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모르겠다.
집 말고도 잠시 들르는 공간에서도 영향을 받는다. 오히려 익숙지 않은 공간이 더 깊은 잔상을 남기기도 한다.


2004년 청계천 개발로 주변 노점이 동대문운동장으로 이전했다. (지금은 DDP로 바뀐 자리에 고교야구대회가 열리던 동대문운동장이 있었다.) 찌는 듯한 여름이었는데, 그 안은 정말이지 찜통이었다. 그곳에 온 손님과 노점상들은 불쾌지수가 높아 예민하거나 기진맥진했다. 급하게 이사 오느라 정돈되지 않은 풍물은 잡동사니처럼 하찮게 보였다. 상인 할아버지가 푸념을 늘어놨다. “우리를 여기다 집어넣고 쪄 죽일려고 하는겨.” 이후 지금의 신설동 서울풍물시장으로 옮겨 갔는데, 아직 가보지 못했다. 배려 없는 이주로 말라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 자리는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DDP가 됐다. 서울의 랜드마크처럼 등장했지만 이상하게 그곳에 가면 길을 자주 잃는다. 영화감독 정재은의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에서 고(故) 정기용 건축가가 “DDP는 자하 하디드의 것이지, 서울 시민의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하지만 매년 서울 컬렉션과 전시가 열리고 인파가 오간다. 더는 건축에 왈가왈부도 하지 않으니 어느 정도 받아들여진 듯하다. 대체로 시간이 약이다. 서울에 새로운 건축이 등장할 때 유명 건축가의 이름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최근엔 영국 건축가 토머스 헤더윅이 노들 글로벌 예술섬에 이어 코엑스의 외관 리모델링을 맡았다는 뉴스가 떴다. 건축가의 이력만으로 될 일은 아닐 텐데. 프리츠커 건축상을 받은 리처드 마이어 측이 설계했지만 아쉬운 강릉시립미술관 솔올도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은 어디일까. 첫인상이 아름답기보다 심리적 안정을 주는 좋은 건축. 거의 산사다. 경남 합천의 해인사를 마을 협동조합의 여행 패키지를 통해 다녀왔다. 합천 주민들이 꾸려나가는 여행사 아닌 여행사였다. 아주머니께서 해인사를 구경시켜주었는데 그때 일주문의 의미를 처음 알았다. 그곳에서부터 속세와 불교의 세계가 나뉜다. 다른 절도 마찬가지다. 일주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고 계단을 올라 대웅전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를 통과할 때마다 마음이 속세와 멀어지며 절에 맞게 다듬어진다. 승효상 건축가는 공간 체험 시나리오라 이른다. 저서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건물은 움직이지 않는다 하여도 우리는 움직이며 돌아다닌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여러 공간을 연결하면서 나름대로 시나리오를 생각한다.” 명동성당으로 들어가려면 살짝 원형으로 구부러진 돌계단을 올라야 하는 것도 비슷하다. 근처에 가면 가끔 기도를 드리는데, 입장 전에 주어진 계단의 시간에 마음과 옷차림을 정리하게 된다. 말하고 보니 기준 없는 무신론자다.
다시 해인사로 돌아와, 아주머니는 관광객이 잘 가지 않는 주변 절도 데려가주었다. 등산을 온 건지 싶을 만큼 깊숙한 산으로 올랐다. 극한의 수행을 하는 스님들이 머무는 작은 절이 있었다. 이 검박하고 외딴 공간이 수행을 독려할 것이다. 땀범벅이 된 절 투어를 마치고 등을 돌리니 마을이 보였다. 아주머니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로도 유명한 성철 스님 일화를 들려주었다. 성철 스님은 일주문을 지나 마을로 내려올 때면 잔돈을 챙기셨다고 한다. 마을에서 스님의 쌈짓돈을 안 받아본 아이가 없었고 아주머니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해인사라는 천년 사찰은 아이들을 어떤 어른으로 자라게 했을까.

이 칼럼을 준비하며 주변 건축을 살피곤 했다. 당신 곁에는 어떤 건축이 자리하는가. 우리 회사 앞 서울세관은 노을이 질 때 아름답다. 올록볼록 블록의 외관이 주황빛을 입으면서 더 입체적인 모습을 갖춘다. 세상을 나아지게 만드는 자연의 힘을 느낀다. 퇴근 중에는 한강 변의 고층 아파트를 지난다. 신축 아파트는 어떻게든 한강을 조망하려고 비켜 세웠다. 그래서인지 외부의 나는 아파트 너머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이들에겐 도시 조경보단 자신이 안에서 보는 바깥 풍경이 훨씬 중요하다. 풍경을 독점한 그들과 풍경을 박탈당한 나는 이미 갈라서 있다.
언젠가 내가 살고 싶은 건축은 마당 깊은 집이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개 스무 마리를 키웠다. 개들이 다 살고도 마당이 훌쩍 남을 만큼 깊었다. 그곳에서 고기를 굽고 목욕을 했다. 김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은 여덟 명의 식구가 다섯 개의 방을 쓰며 산다. 휴전 직후의 어수선한 세월을 겪어낸 그 집은 헐린다. “내 대구 생활 첫 1년이 저렇게 묻히고 마는구나 하고 나는 슬픔 가득 찬 마음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굶주림과 설움이 그렇게 묻혀 내 눈에 자취를 남기지 않게 된 게 달가웠으나, 곧 이층 양옥집이 초라한 내 생활의 발자취를 딛듯 그 땅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내 유년 시절의 마당 깊은 집도 헐리고 건물이 들어섰다. 그곳이 길러낸 아이는 여전히 여러 공간을 전전하며 산다. (VK)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최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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