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당신의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는 예술은 무엇인가요?

2025.07.05

당신의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는 예술은 무엇인가요?

벌써 10년 전입니다. 영국 서북부로 여행을 떠난 저는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열차를 뛰쳐나와 테이트 모던으로 갔습니다. 그날은 특별히 미술관이 밤 10시까지 문을 여는 날이었고, 다음 날도 일정이 빡빡한 한국인 여행자는 하나라도 더 보겠다는 일념으로 입장 마감 1시간 전 아슬아슬하게 미술관 앞에 도착했죠. 수버니어 숍 외에는 앞에서 관람하는 이도, 뒤따라오는 이도 없던 한가한 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혼자 바쁘게 발을 구르니 관내 경비원이 빙그레 웃으며 “Enjoy”라고 하더군요. 마크 로스코의 방 앞이었습니다.

Getty Images

온통 적갈색으로 칠해진 방 안을 돌아보는데, 온 세상이 제 것 같았습니다. 처음엔 혼자 독차지했다는 생각에 환희가 밀려왔다가, 그 뒤에는 압도당했고, 종국엔 깊은 슬픔이 어딘가에서 용솟음쳤습니다. 슬픔의 연유는 지금도 모릅니다. 그저 로스코의 죽음이 그림에 묻어 있었다고 추측할 뿐입니다. 당시엔 로스코의 배경도 그림의 이야기도 전혀 몰랐거든요. 그 후 그림으로 작가의 마음이, 삶이 전달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제 방에 걸린 붉은 그림 포스터 한 점이 그때의 슬픔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그렇고요. 그 큰 그림을 어찌 가져왔는지 기억은 희미하지만, 로스코의 방 안에 있던 순간만큼은 여전히 선명하다는 점에서도 이 믿음은 강화되었죠.

“누군가에게 예술은 삶의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단편이 된다.” 국제갤러리 윤혜정 이사가 말한 ‘예술의 경험’이 이런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날이 제 삶에 숨 쉬고 있는 것을 보면요. 윤혜정의 ‘예술 3부작’의 마지막 편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을유문화사, 2025)는 작가가 1990년대부터 쌓아온 예술적 순간과 경험, 지식과 사유를 ‘장소성’과 ‘시간성’에 방점을 찍으며 풀어낸 예술 견문집입니다. 베니스 비엔날레부터 아를의 이우환 미술관, 베니스의 푼타 델라 도가나 등 전 세계 곳곳에서 그녀가 품고 곱씹었을 15편의 이야기가 펼쳐지죠. 이건 15개의 전시실을 꾸린 미술관에 들어선 느낌, 때론 15곳의 여행지에 가닿은 듯 생생한 화면이 펼쳐집니다.

윤혜정,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을유문화사, 2025)

“푼타 델라 도가나의 공기는 시종일관 젖어 있었고, 그 축축함이 어둠의 밀도를 높였다. 여기에 관람객의 숨결까지 더해져 눅진하고 무거워진 암흑의 분자가 살갗에 닿으니 따가웠다. …(중략)… 칠흑 같은 어둠을 넘어서는 두려움과 기이함, 공포와 불안. 통각은 개체에 닥친 위험을 뇌에 경고해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존에 기여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때의 통각들이 내게 어떠한 경각심을 준 것일까.”

제가 좋아하는 전작 <인생, 예술>이 작품이란 프리즘을 통해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순간이었다면, 이번엔 누구나 한 번쯤 가지고 있을 법한 예술 경험을 상기시키면서 독자의 기억에 다가섭니다. 예술이 어렵고 먼 것이 아니라, 인생을 담아내는 제각기 다른 그릇임을 강조해왔던 것처럼, 편안하게 그 경험을 떠올리고 즐기라고 제안하죠. 같은 작가의 전시여도 어느 곳에서 어떤 날 보느냐에 따라 그 풍경과 메시지가 전혀 달라진다고 다독이면서요.

“나의 몸과 마음을 위탁함으로써 이 미술관이 작품과 공간, 공간과 세상, 세상과 나, 나와 작품이 만나고 순환하며 대화하는 곳으로 분했다는 사실, 현학적으로 예술을 논하는 곳이 아니라 사적인 경험과 인식으로 완성된 미술관의 장소성만 각인되었다.”

이 책은 제게 또 다른 의미의 용기를 줍니다. ‘느낌’ ’순간’ ’분위기’라는 모호한 단어로 내린 확신을 더 만끽하고 내뱉어도 괜찮다고요.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행위가 우리를 변화의 순간으로 안내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15편의 세계를 통해 여러분의 변곡점을 찍어보세요. 어쩐지 이것이 예술의 가장 큰 가치이자 사치스러운 순간처럼 느껴집니다.

사진
Getty Images,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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