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가을 트렌드를 요약하는 새로운 옷, 새로운 풍경
올가을 패션 풍경을 완성하는 슈퍼 브랜드 30개의 새 옷 56벌과 F/W 트렌드.















“참 제 취향은 아니군요.” 지난 3월 7일 저녁 즈음 <보그> 편집장에게 ‘카톡’을 날렸다. 나는 논현동 사무실, 그는 파리 지방시 쇼장에서 막 거리로 나서던 참이었다. 사라 버튼이 지방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선보이는 첫 번째 쇼가 끝난 직후였다. 30년 가까이 맥퀸을 지켜온 그녀에 대한 기대는 컸다. 사무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노트북 스크린을 통해 지켜본 컬렉션은 예상 가능한 딱 그 정도로 보였다. 구조적인 수트와 드레스 등은 만듦새가 돋보였지만, 놀라울 정도는 아니었다. 로고를 더한 메시 소재 드레스는 실망에 가까웠다. 그나마 흥미로운 건 깨진 유리를 이어 붙인 톱과 섬세한 꽃무늬였다. “난 또 현장에서 보니 좋더라.” 조르주 생크 거리에 있는 지방시 본사 건물에서 직접 사라 버튼의 데뷔 컬렉션을 목도한 편집장의 소감은 이랬다. “앞에서 턱을 쭉 내밀고 보니 테일러링이 죽이더라.”
이틀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또 다른 중요한 패션 사건 중 하나였던 하이더 아커만의 톰 포드 데뷔 쇼는 1시간 정도 지연되고 있었다. 늦은 새벽 침대 위에서 라이브 쇼를 지켜보는 내내 든 생각은 ‘익숙하다’였다. ‘결국 아커만과 톰 포드의 베스트 앨범 같은 느낌인데?’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얼른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현장에 초대받은 게스트 300여 명 중 한 명이었던 <보그> 편집장이 전한 리뷰는 달랐다. “은밀한 클럽 같은 쇼장에 들어서니 향기로운 마티니를 건네더군. 습기 찬 유리 벽은 관음증 환자를 위한 공간처럼 기묘했어.” 벽 곳곳에 ‘Fuck’과 같이 도발적인 단어가 새겨진 것도 휴대폰으로 본 내가 확인하기 어려운 디테일이었다. “가슴과 엉덩이가 보일 듯 말 듯 펄럭이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 모델과 가죽 수트를 입은 남자 모델이 번갈아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성적인 긴장감과 끈적한 농염함으로 가득했어. (크리스틴) 맥미나미가 어린 남자 모델을 여러 명 끌고 백스테이지로 사라질 땐 과연 저기선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절로 상상하게 되더라.” 향기와 온습도까지 스크린으로 전해지는 기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근사한 패션쇼를 지켜본 감각은 현실에만 존재한다.
전통적인 패션쇼의 개념은 사라졌다. 소수의 고객과 프레스, 바이어가 쇼를 지켜보던 비밀스러운 경험은 이제 없다. 패션쇼는 이제 즉각적인 엔터테인먼트에 가깝다. 셀러브리티와 인플루언서의 등장은 곧 ‘디지털 인게이지먼트’ 점수로 매긴다. 스크린 건너편에 있는 ‘오디언스’는 쏟아지는 소음 속에서 패션을 마주한다. ‘스타일낫컴’과 ‘보링낫컴’ 등의 계정으로 패션계의 루머를 엿듣고, ‘쇼스튜디오’ 등에서 역사적, 사회적 측면에서 컬렉션을 해부한 릴스 영상을 공유한다. 마이크로 인플루언서가 꼽은 꼭 사야 할 아이템을 메모하고, 톱 모델과 친구들이 슬쩍 공개하는 백스테이지 풍경에 괜히 그들 중 일부가 된 듯한 착각을 한다.
“이제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는 직접적인 경험보단 그에 대한 정보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지방시와 톰 포드의 새로운 컬렉션을 두고 현장을 지킨 편집장과 서울에서 스크린을 통해 지켜본 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경험하며 떠오른 문장이다. 크리스틴 로젠은 저서 <경험의 멸종>을 통해 ‘경험의 외주화’라는 단어를 썼다. 스크린과 화면을 통해 모든 걸 만나는 우리에게 남는 건 기계화되고 균질화된 간접경험. 서울의 침실에 누운 채 톰 포드 쇼에 대한 평가를 내리던 나 역시 인스타그램을 통한 경험을 신뢰하고 있었던 셈이다. ‘경험의 외주화’는 옷을 만나는 방법에도 영향을 끼친다. 직접 옷을 만져보기보다는 인플루언서가 입어본 ‘OOTD’ 틱톡을 통해 링크를 클릭하고 온라인 결제 버튼을 누른다. 그 옷을 실제로 내 몸에 어떻게 걸칠지, 그 소재가 내 피부에 닿는 느낌이 어떨지는 부차적인 조건이 된다.
모든 경험의 외주화를 손가락질할 순 없다. 사실 패션계에서 일부 엘리트는 이제껏 그 특권을 독점해왔다. <보그>에 주어진 임무는 그런 특권에서 비롯된다. 디자이너는 미래를 예측하는 컬렉션을 선보이고 에디터를 비롯한 프레스는 수백 개에 이르는 컬렉션을 뜯어 살핀 뒤 일종의 경향을 예측한다. 6개월쯤 뒤에 여성이 입어야 할 재킷의 실루엣 혹은 구두 높이, 치마 길이 등을 두고 트렌드를 이야기한다. 그것이 전통적인 방식의 트렌드 예측이다.
“옷을 입은 사람을 감싸고 보호하는 옷이 넘쳐났다. ASMR을 듣는 듯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포 퍼(Faux Fur)’를 비롯한 부드러운 텍스처의 옷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 시즌을 의인화하자면 벨벳 장갑을 낀 채 힘과 편안함을 모두 지닌 강철 여인이다.” <보그 런웨이>는 전통적인 방식을 통해 2025-2026 가을/겨울 컬렉션의 트렌드를 꼽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배경으로 주목한 건 유럽과 중동에서 끊이지 않는 전쟁과 새로운 미국 정부 등 불안정한 세계 정세였다. 당장 모두가 전투복을 입을 수 없는 세상에 디자이너들은 어떤 옷을 공통적으로 선보였을까.







이슈는 여성의 몸이었다. 허리는 날씬하게, 엉덩이는 크게. 혹은 어깨는 크게, 가슴은 봉긋하게. 2025년의 모래시계 실루엣은 다양한 변주를 거듭했다. 이번 시즌 가장 인상적인 30개 브랜드의 옷을 기록한 화보 속 마린 세르의 벨벳 보디수트도 잘록한 허리와 과장된 엉덩이 라인을 자랑한다. “신성한 여성의 폭동”이라고 제목을 정한 런던의 딜라라 핀디코글루는 주체적인 여성의 몸을 드러낸다. 그 반대편에는 듀란 랜팅크가 있다. 영화 특수 분장에 등장할 법한 라텍스로 만든 DD 사이즈의 유방 톱은 남성 디자이너가 여성의 몸을 대상화한다는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촉감만큼은 꽤 ‘리얼’했어.” 이번 화보를 위해 이 톱을 실제로 만져본 <보그>의 패션 디렉터 손은영의 소감이다. “노화 때문에 살짝 처진 듯한 느낌을 주는 형상이 현실적인 여성의 몸이 진짜 패션이 될 수 있을지 오히려 되묻는 것 같았어.”
라텍스 톱을 현실에서 입지 못할 겁쟁이 여성을 위한 옵션도 존재한다. 이번 시즌 또 다른 인상적인 데뷔전을 펼친 캘빈클라인의 베로니카 레오니는 비즈니스우먼을 위한 옷을 완성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모든 여성의 어깨너비를 미식축구 선수의 그것처럼 만들고자 한 듯 넓은 어깨 라인을 선보인 생 로랑 안토니 바카렐로의 옷은 1980년대 ‘워킹 걸’을 꿈꾸던 우리 엄마의 옛 사진 속 옷차림 그대로였다. 덕분에 새로운 패션 아이콘이 등장했다. 낮에는 증권거래소에서, 밤에는 차가운 로프트에서 잔인한 살인을 일삼던 <아메리칸 싸이코>의 패트릭 베이트만이 주인공이다. 핀스트라이프가 이토록 섹시한 시즌이 또 있을까.
몇 년째 사라지지 않는 리본 장식, 고스족의 어두운 아우라, 우리 동네 뒷산의 중년 등산객 복장을 닮은 강렬한 형광 컬러, 영국 왕실의 휴가 사진에서 본 듯한 승마 스타일, 고급스러운 살롱의 커튼처럼 섬세한 드레이핑, 자꾸만 만져보고 싶은 가짜 모피 혹은 양털 스타일 등도 이른바 ‘마이크로 트렌드’라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옷을 뜯어보면 그 뒤엔 공통적인 감정이 존재한다. 평화로운 과거로의 회귀, 전쟁터 같은 일터를 위한 전투복, 누구보다 눈에 띄고자 하는 강력한 자아, 어두운 세상을 향한 비관적인 태도, 우아한 삶을 향한 회피형 성격 등등.
이런 감정은 즉 하나의 무드 혹은 ‘바이브’가 된다. 미니스커트가 유행하면 누구나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치마를 입던 시절과는 다르다. 지금 패션의 무드를 가장 뚜렷이 가늠할 수 있는 곳은 프라다이다. 밀라노 폰다치오네 프라다의 공사장을 닮은 쇼장에 앉아 지나가는 모델을 바라보면서 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저 꽃무늬가 맞아?’ ‘저 스웨터는 핏이 너무 이상한데?’ ‘저 밑단이 다 뜯어진 치마는 어떻게 세탁하지?’ 그 옷을 통해 미우치아 프라다와 라프 시몬스는 계속 질문을 던진 셈이다. 알고리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취향을 어떤 방식으로 가꿔야 할까? 혹은 권력을 지닌 여성은 파워 수트만 입어야 하나? 혹은 뻔하고 뻔한 패션 사이클 속에서 진짜 자유롭게 옷을 입는 건 뭘 말하나?
마지막 질문은 이번 시즌 미우치아 프라다와 라프 시몬스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이 둘은 위고비로 완벽한 몸매를 가꾸고, 스킴스의 몸매 교정 속옷으로 ‘스내치드(Snatched)’된 ‘하이퍼 여성성’을 꿈꾸는 세대에게 말을 건넨다. 몸매를 다 가리는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어도, 제각각인 단추를 꿰매놓은 코트를 입어도 괜찮다고 작은 위안의 메시지를 보낸다. 스키아파렐리의 숨 막히는 코르셋 장식 대신 벨트 구멍을 좀 더 늘리는 것이 멋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 위안을 전한다.
여성을 중심에 둔 디자인을 말하면서 피비 파일로를 빼놓을 순 없다. 내가 지갑 사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옷을 입을 수 있는 여성이라면 올가을 아마도 피비 파일로의 ‘컬렉션 C(파일로는 전통적인 시즌 시스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컬렉션을 선보인다)’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려입을 것이다. 며칠 전 런던 도버 스트리트 마켓의 한 코너에 자리한 ‘피비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이 상상은 확신에 가까워졌다. 온통 블랙 컬러 아이템으로만 채운 그곳에는 현대 여성에게 필요한 모든 디자인이 존재했다. 꼭 필요한지 미처 깨닫지 못한 아이템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허리가 트인 테일러드 코트와 밑단을 뜯어낸 블랙 데님 팬츠, 뭉툭하게 잘라낸 듯한 펌프스까지. 훌륭한 디자이너의 기준이 내게 숨어 있는 욕망을 이끌어내는 능력이라면 파일로는 지금을 정의할 만한 디자이너다. 얼핏 보면 ‘콰이어트 럭셔리’ 카테고리에 속할 듯하지만 파일로의 옷에는 조금씩 괴상한 디테일이 숨어 있다. ‘조용한 럭셔리는 게으른 미니멀리즘 아닐까요?’라고 시니컬하게 되묻는 듯한 디자인이다. 무엇보다 지금 패션계에서 가장 큰 최고의 가치는 변화다. 이번 가을은 잠시 숨 고르기에 가깝다. 2026년 봄 컬렉션이 등장하는 9월 진짜가 찾아온다. 고루한 하우스의 먼지를 털어내고 새로운 가구와 커튼을 달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 샤넬의 마티유 블라지가 가장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전임자 버지니 비아르가 사실상 칼 라거펠트 학파 소속이었다고 치면, 무려 30여 년간 이어진 라거펠트식 샤넬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 셈이다. 이제 우리는 처음으로 완전히 새로운 샤넬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
또 다른 궁금증은 이미 물음표로 가득하다. 지난 6월 남성복 컬렉션에서 디올 데뷔 무대를 가진 조나단 앤더슨도 첫 번째 여성 컬렉션을 공개한다. 그가 과연 꾸뛰르 하우스에서 선보이는 여성복은 어떤 모습일까? 뎀나가 구찌에서도 시니컬하게 현대사회를 풍자하게 될까? 피엘파올로 피촐리는 발렌시아가 하우스의 핸들을 돌려 유턴을 시도할까? 베르사체의 새 주인 다리오 비탈레는 불화라는 루머 속에서도 자신의 비전을 완성할 수 있을까? 루이스 트로터는 보테가 베네타를 어떻게 해석할까? 로에베의 잭 맥콜로와 라자로 에르난데스가 뉴욕 패션계의 비호를 벗어나서도 성공할 수 있을까? 듀란 랜팅크는 장 폴 고티에의 악동 정신을 어떻게 이어갈까? 셀린느의 마이클 라이더와 메종 마르지엘라 글렌 마르탱의 두 번째 컬렉션은 어떤 모습일까? 마르니의 메릴 로게와 질 샌더의 시모네 벨로티는?
“중요한 건 정해진 화면 또는 확인된 세상만 보는 걸 넘어서 그 밖의 것을 마주했을 때의 경험입니다. 이를 겪었을 때 드는 생각은 질적으로 달라요. 기술이 매끄럽게 깔아둔 판이 아니라 조금은 거친 세상을 만났을 때 생기는 마찰에서 우리는 성장하기 때문이죠.” 크리스틴 로젠은 현실의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느새 입추가 지나면서 지독한 더위가 가시고 가을로 들어서는 문턱에 서 있다. 찰나에 느껴지는 시원한 공기는 변화의 바람이다. 바람을 마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속에 내 몸을 던지는 것이다. 패션의 바람이 불어오는 올가을에는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직접 내가 입을 코트를 손으로 만져보고, 구두를 신어보길 바란다. 당대 디자이너들이 제안한 패션을 ‘외주화’하기엔 그 아름다움이 너무 소중하지 않은가. VK






- 패션 디렉터
- 손은영
- 패션 에디터
- 손기호
- 포토그래퍼
- 목정욱
- 모델
- 김도현, 선혜영, 자기, Cristina Pastian, Gray Beyer, Karolina Raducka, Maria Sosa, Sophie, Zoe, Zuzana Langerova
- 헤어
- 김정한, 오지혜
- 메이크업
- 최시노, 유혜수
- 프롭
- 최서윤(D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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