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주얼리

신소재로 만든 다음 세대의 시계

2025.09.02

신소재로 만든 다음 세대의 시계

손목시계가 신소재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착용감과 내구성, 기술력, 친환경 요소까지 두루 갖춘 시계 분야의 넥스트 제너레이션.

손목시계의 시작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전쟁터의 군인들을 위해 탄생한 매우 실용적이고 절박한 도구로 말이다. 하지만 사실 제일 처음 등장한 손목시계는 어리고 부유한 귀족 여인, 그야말로 ‘영 앤 리치’의 수집품이었다. 19세기 나폴레옹 1세의 막내 여동생 카롤린 뮤라는 스물세 살 때부터 취미로 시계를 수집했는데, 1810년 브레게에 “팔찌로 착용할 수 있는 5,000프랑 예산의 리피터 워치(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 제작을 의뢰한 것이 역사에 기록된 첫 손목시계다. 제작 의뢰서만 남았을 뿐 실물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실물로 보존된 가장 오래된 손목시계는 19세기 백작 부인의 값비싼 장신구였다. 파티에서 자랑할 색다른 주얼리가 필요했던 헝가리의 코스코비치 백작 부인은 특별한 보석을 장식한 팔찌를 만들기로 마음먹고 안토니 파텍(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파텍 필립의 파텍이 맞다)을 찾아갔다. 백작 부인이 파티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은 꽃 모양으로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뚜껑 버튼을 누르면 짠 하고 그 아래 숨겨진 시계 다이얼이 보이는 골드 뱅글이었다.

요점은 손목시계란 태생적으로 고가의 귀금속으로 만든 물건이라는 거다. 부와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것이 정체성이었으며, 손목시계 분야가 발전할수록 500원 동전보다 조금 더 큰 무브먼트에 정교한 기능을 ‘꾸역꾸역’ 집어넣은 장인의 기술력이 가격표의 자릿수를 늘리는 데 점차 더 큰 지분을 갖게 됐다. 하지만 손목시계를 작은 우주로 만들곤 하던 기상천외한 기능의 등장도 언제부턴가 주춤하는 추세(챗GPT와 제미나이에게 오뜨 오를로제리 분야의 혁신적인 최신 기술이 뭐냐고 질문했더니, 공통적으로 첨단 AI 기반의 기술이라고 답한 게 그 증거다). 그 대신 요즘 시계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건 신소재다.

이 트렌드는 고가의 소재와 기술력이라는, 전통적으로 손목시계의 가격을 결정해온 두 요소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사용한 적 없는 값비싼 금속이 아니라 혁신적으로 가볍고, 강도가 높고, 스크래치와 부식에 강하고, 독특한 패턴이나 컬러를 표현할 수 있는, 그야말로 소재의 ‘다음 세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신소재 카보늄(Carbonium)은 2019년에 율리스 나르덴이 처음 시장에 소개한 후 점점 더 많은 시계 브랜드에서 사용하고 있다. 환경친화적인 합성물을 개발하는 프랑스 스타트업 ‘라부아지에 콩포지트(Lavoisier Composites)’에서 발명하고 제작한 이 소재는 항공우주산업의 폐기물과 에폭시 수지, 고온 내열 고분자 수지(High-temperature Polymer Resin)로 만든 합금이다. 일종의 포지드 카본(고가의 스포츠카 제작에 사용되는 고강도 경량 소재. 2007년 오데마 피게가 처음 포지드 카본 시계를 출시한 후 널리 사용되고 있다)으로 가볍고 강하지만, 재활용 소재를 사용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줄였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 티타늄보다 세 배 더 단단하고 무게는 반밖에 되지 않는다. 진회색부터 블랙까지 컬러 표현이 가능한데 여러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에서 카보늄을 활용한 스페셜 에디션 모델을 대리석 같은 은은한 패턴으로 출시했다. “고객은 늘 쿨한 디자인에 독특한 기술까지 갖춘 멋진 시계를 기대합니다.” 율리스 나르덴의 최고 제품 책임자 장 크리스토프 사바티에(Jean-Christophe Sabatier)는 카보늄이 기대를 충족한다고 덧붙였다. “미학적인 면과 기능적 장점을 고루 갖춘 소재를 찾기란 정말 어렵죠. 카보늄이 바로 우리가 찾던 겁니다.” TMI를 덧붙이자면, 하이 주얼리를 제작하는 독립 주얼리 디자이너 중 새로운 걸 시도하기 좋아하는 몇몇은 이미 골드나 플래티넘처럼 카보늄을 주얼리에 활용했다.

하지만 카보늄의 부상에 친환경 소재라는 점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지속 가능성과 환경보호는 시계 분야에서 최근 떠오르는 주요 이슈다.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도 2023년부터 친환경 혁신 부문을 도입했으며, 첫해엔 쇼파드가 오스트리아 철강 기업 푀스탈피네 뵐러 에델슈탈(Voestalpine BÖHLER Edelstahl)과 개발한 루센트 스틸(Lucent Steel) 소재로 만든 L.U.C. 모델이 수상했다. 루센트 스틸은 스위스의 쇼파드 시계 생산 시설의 반경 1,000km 이내에 있는 항공 우주, 의료, 자동차 생산 시설에서 수급한 재활용 금속을 80% 이상 함유한 재활용 스틸 소재다. 기존 스테인리스 스틸보다 강도가 1.5배 더 강하고 의료 기기 수준으로 피부 자극이 적은 게 장점으로 쇼파드는 올해 안에 루센트 스틸의 재활용 금속 함유량을 90% 이상으로 높일 계획이다.

시계 소재에서 새로운 골드로 떠오른 세라믹. 다채로운 색감을 표현하는 것이 차세대 세라믹 소재의 특징이다. 선명한 그린 컬러 세라믹 베젤이 경쾌한 제니스의 ‘크로노마스터 스포츠’, 매끄럽게 연마한 블루 세라믹을 원석처럼 커팅한 위블로의 ‘스피릿 오브 빅뱅 상 블루 블루 세라믹’, 매트한 블루 컬러에서 밤하늘이 연상되는 하이테크 세라믹 소재의 샤넬 ‘J12 블루’.
지속 가능한 소재 개발은 신소재 연구의 주요 방향성으로 떠오르고 있다. 재활용 스틸 소재 e스틸™(eSteel™)을 케이스에 적용한 파네라이의 ‘섭머저블 콰란타콰트로 베르데 스메랄도’, 신소재 개발을 선도하는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 오프쇼어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블랙과 그린 세라믹, 티타늄 소재를 믹스해 독특한 세 가지 컬러 톤을 연출했다.

재활용 스틸 소재를 자체 개발하는 브랜드가 점차 늘어가는 가운데, 지속 가능한 럭셔리 시계를 표방하는 브랜드 ID 제네바는 100% 재활용 스틸과 바나나나무 섬유 등 식물에서 추출한 소재로 시계를 제작한다. 조립식 디자인이라서 수리하기도 수월하다. 이 독특하고 지속 가능한 접근은 환경 운동에 적극적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투자로 이어졌다. “우리는 재활용 스틸을 스위스의 뉴 골드라고 부릅니다.” ID 제네바의 공동 설립자 니콜라스 프로이디거(Nicolas Freudiger)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가 소재를 모으고 처리하는 방식은 곧 새로운 럭셔리가 될 거예요.” ID 제네바의 재활용 스틸은 스위스의 시계와 의료 기기 생산 시설에서 버려진 금속을 수거해 태양열 용광로(날씨 맑은 날, 거울로 태양열을 한 점에 모아 검은 종이를 태우던 걸 떠올려보라)에서 녹여 만든다. 강도와 내구성은 기존 스틸 소재와 동일하면서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발자국을 10배 이상 낮춰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혁신적으로 줄였다.

시계 분야의 또 다른 ‘뉴 골드’로 부상하는 소재는 바로 세라믹. 시계 제조에 사용하는 스틸 소재보다 3~4배 강해서 스크래치가 잘 나지 않고 가벼우며, 시간이 흘러도 부식되거나 녹슬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 1970~1980년대 처음 시계 시장에 등장했지만 2000년대 들어 샤넬 J12를 계기로 대중적 인기를 누리면서 점점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기존 세라믹 소재는 유리처럼 반짝이거나 아예 광택이 없고, 블랙 또는 화이트, 톤 다운된 그린 등 컬러가 제한적이었으나 최근 개발된 어드밴스드 세라믹 소재는 레드, 블루, 그린, 옐로 등 비비드한 컬러와 다채로운 광택을 표현할 수 있다.

“새로운 소재로 작업하는 것은 일종의 과학입니다. 밀도를 유지하면서 여러 컬러를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컬러별로 각기 다른 제조법이 필요하죠. 소재 개발에도 몇 년이 걸리지만, 그 소재를 다양한 컬러로 표현하는 데 몇 년이 더 걸립니다.” 위블로의 최고 제품 판매 책임자 라파엘 누스바우머(Raphaël Nussbaumer)는 2024년에 처음 선보인 페일 블루 컬러 세라믹 워치에 대해 설명했다. 위블로는 세라믹 파우더에 착색 안료를 섞어 고온에서 압착하고 소결(압착한 가루를 고온에서 녹여 서로 엉겨 굳게 만드는 것)하는 방식으로 선명한 옐로와 레드, 밝은 오렌지 컬러의 모델을 출시했다. 간단하게 들리지만, 안료는 온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여태까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겼으며 최근에야 가능해졌다. 특히 올해에는 샤넬과 제니스 등 여러 브랜드에서 다양한 블루 톤 세라믹을 구현한 제품을 선보였으며, 롤렉스도 첫 세라믹 다이얼 워치로 세라믹 유행에 동참했다.

벌크 금속 유리 또는 벌크 비정질 합금(Bulk Metallic Glass, BMG)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나? 감히 말하건대, 공상과학소설에 나올 법한 이 첨단 소재야말로 현시점에서 고급 시계 제조 분야 신소재의 최고봉이 아닐까 싶다. 영문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금속과 유리의 대조적인 특성(금속은 원자 배열이 일정하고 전기가 통하지만, 유리는 원자 배열이 불규칙하고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을 동시에 지닌 역설적인(!) 하이브리드 금속으로, 다른 은하계에서 온 물질처럼 느껴질 정도다. 강도가 높으면서도 유연하고, 내구성이 좋으며, 부식에도 강하다는 점은 다른 소재와 특별히 다를 것 없지만, 독특한 원자 배열 덕에 다른 합금에 비해 복잡한 형태나 디자인으로 주조하기 쉽고, 추가 가공이 필요 없을 정도로 표면이 매우 매끄럽다. 외부 충격이나 자극으로 ‘닳거나 마모’되는 현상도 훨씬 적다. 2000년대부터 스마트폰과 전자 기기, 스포츠용품, 의료 도구, 임플란트, 항공 우주 기기 등 여러 분야에서 널리 사용돼왔으며 지금도 활용 방안이 연구되고 있을 정도로 최근에 발견된 금속 소재다. 시계 시장에는 2017년 파네라이 섭머저블 모델로 처음 등장했는데, 아직까지 파네라이와 오데마 피게에서만 BMG를 사용한 모델을 출시했고 그나마 5개도 채 되지 않기에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손목시계 분야의 혁신적인 신소재를 조사하던 중 ‘자가 치유 시계’라는, 가장 매혹적이면서도 의심스러운 표현을 발견 했다. 상처 난 피부가 시간이 흐르면 낫는 것처럼, 찍히거나 스크래치 난 케이스가 다시 원상 복구된다는 걸까? ID 제네바가 스위스 스타트업 컴페어(CompPair)와 ‘치유 가능한’ 신소재 재생 탄소(Regenerative Carbon)를 공동 개발해 서큘러 C 워치를 출시했다는 기사였다. 물론 가만히 놔둔다고 저절로 고쳐지진 않는다. 1~2분 동안 손상된 표면을 100도의 열로 가열하면 소재의 ‘회복력’이 활성화되어 새것처럼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는 설명. 그리고 이 소재는 다이얼과 옆면 장식, 베젤에만 적용해 무브먼트 등의 기계적 고장은 고칠 수 없다. ‘자가 치유’ ‘치유 가능한’이 딱히 틀렸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 표현에 담긴 신비로운 힘을 고려하면 꽤 소박한 기술이다. 논란의 여지를 없애려면 ‘복구 가능한’ 정도가 적당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가능하다면, 신소재의 끝판왕이 될 것은 분명하다. 처음부터 흠집이나 고장이 잘 나지 않는 것도 좋지만, 저절로 수리되는 쪽이 더 매력적이다. SF 영화에서 주인공이 토막 낸 외계 생명체가 꾸물꾸물 자가 재생하는 모습이 떠오르다 보니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문과 출신 상상력의 한계일 뿐이다. BMG처럼 금속인 듯 유리 같고, 액체인 듯 고체 같은 물질도 존재하는 세상에 자가 치유력을 갖춘 신소재 시계의 등장은 이제 시간문제다. VK

손은영

손은영

패션 디렉터

인생의 딱 절반을 패션 에디터로 살아왔습니다. 그중 20년은 여기 <보그 코리아>에서만. 그런데 흔히 말하는 패션쟁이는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멋 부리기를 즐기는 늦둥이 X세대. 역사, 과학, 음악 등 다양한 관심사를 패션과 연결 짓는 것을 좋아합니다.

더보기
    패션 디렉터
    손은영
    송보라
    사진
    이호현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