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편, 제가 대신 읽어봤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저는 쓰레기 같은 소설도 아주 잘 보는 사람입니다. 흔히 ‘공항에서 보는 소설’이라 부르는 가벼운 킬링타임용 소설을 정말 좋아하죠. 허황되면 허황될수록 좋아요. 휴가 때는 넷플릭스 <러브 아일랜드>를 그대로 텍스트로 옮겨놓은 것 같은 책을 봅니다. 제 말은, 저는 우월감을 갖고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못 만든 로맨틱 코미디, 정말 좋아하고요. 약간 조잡한 2000년대 감성이 담긴 건 다 좋아요. 마돈나의 노래에 따라 그럴듯한 몽타주 장면이 흘러나오는 영화라면 뭐든 대환영이죠. 제 마음속에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제법 크게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마 이 모든 이유 때문일 거예요.

영국 <보그>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저에게 하던 말이 있어요. (일단 제가 입은 옷을 쭉 훑어본 후에) “거기에서 일하는 건 어때?” 그 말은 대체로 이런 뜻입니다. “거긴 얼마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랑 비슷해?” 아직 사무실에서 세룰리안 블루 컬러의 벨트나 <해리포터> 원고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마놀로 블라닉 기프트 백이 굴러다닌 날은 있긴 하지만), 2006년에 나온 이 영화가 저의 진로 선택이나 헤어 컬러 선택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겠네요. <보그>에서 일하는 동안 미란다 같은 상사를 만난 적은 (지금까지는) 없었어요. 하지만 개인으로서의 삶에서, 혹은 저의 직업과 관련해서 거의 코스프레에 가까웠던 순간은 분명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차에 받히는 사고를 겪은 후 할로윈에 검은 눈매에 붉은 머리를 하고 다리를 절뚝이는 에밀리로 분장했을 때가 그랬죠(슬프게도 에르메스 스카프는 빠졌습니다만).
살다가 괴로운 순간이 오면 KT 턴스톨의 ‘Suddenly I See’를 크게 틀곤 했지만, 그럼에도 저는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오직 앤디, 미란다와 그 일당만이 채울 수 있는 공허였죠. 그래서 저는 제 마음에 난 프라다 모양의 구멍을, 창의적인 제목의 원작 소설 속편, <복수는 프라다를 입는다(Revenge Wears Prada)>를 읽는 것으로 메우기로 했습니다.
속편의 배경은 앤디가 작은 타운카를 타고 파리 시내를 쏘다닌 후 드라마틱하게 <런웨이>를 그만두고 나서 10년이 흐른 시점입니다. 앤디는 이제 화려한 웨딩 매거진의 에디터가 됐습니다. 야외 활동을 취미로 즐기며 (술을 마시지 않는) 예민한 면이 있는, 미세하게 <석세션> 느낌이 나는 출판 기업 상속자인 맥스 해리슨이라는 남편도 있죠. 몇 챕터 읽고 나니 이 맥스라는 근육질 대타 남주는 너무 지루해서 눈물이 다 나더라고요. 그래도 첫 번째 영화에 나왔던, 얄스버그 치즈를 사랑하고 비협조적이었던 끔찍한 남자 친구는 포트 와인 할인과 함께 보스턴으로 떠나 사라지기는 했지만요.

소설은 시간을 넘나들며, 희한하게도 자꾸만 재발하는 앤디의 장염(스포일러: 임신입니다), 초호화 결혼식, 퇴근 후 기초 쿠킹 클래스에서 앤디와 에밀리가 언쟁을 벌이는 모습을 오락가락 스치듯 보여줍니다. 앤디와 에밀리는 두 문장 반에 걸쳐 날카로운 논쟁을 벌인 다음, 미란다로 인한 PTSD를 공유하며 트라우마 유대를 형성한 후, 팔짱을 낀 채 깔깔 웃으며 수플레 만들기 수업을 나와 함께 웨딩 매거진을 창간하기로 합니다. 2013년이니 지금과 상황이 달랐을 테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게 몇 년도라고 해도 <The Plunge>(급락, 낙하)는 잡지로서는 최악의 이름 같네요. 수치를 겪은 데다 패션에 민감한 여자들이 스크램블드에그 만드는 법을 배우면서 시간을 흘려보냈다는 것도 영 말이 안 되는 것 같고요.
소설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노출된 벽돌로 만든 탑층의 오픈 플랜 아파트, 열대 배경의 사진 촬영, 패션 위주의 과거 회상 장면이 몽실몽실 흐릿하게 펼쳐집니다. 아니나 다를까 에밀리는 앤디를 배신합니다. 미란다는 예전처럼 독재자로 군림합니다. 그리고 앤디는 왜인지 끔찍했던 전 남친과 재결합합니다. 책은 이틀 만에 다 읽었지만, 저는 시리즈의 다음 속편인 <삶이 당신에게 룰루레몬을 줄 때(When Life Gives You Lululemons)>보다는 영화가 너무나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매력은 플롯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빈약한 플롯보다는 미묘한 스타일, 위축된 눈빛, 향수 광고 같은 사운드트랙이 매력적이었죠. 뻔한 2000년대 음악에 또각또각 하이힐과 샤넬 부츠가 겹치면서 이 평면적인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살아난 거란 말입니다. 두꺼운 벨트와 강렬한 아이섀도를 벗겨내면, 이 캐릭터들은 평범해집니다. 종이 위에서 미란다는 영혼 없는 사디스트로, 에밀리는 미란다를 숭배하며 앤디에게 그만 먹으라고 말하는 것만이 주된 관심사인 속 빈 말라깽이로 격하됩니다(에밀리 블런트가 연기한 영화 속 에밀리에 대해서는 이런 표현은 부당합니다. 그 파란 아이섀도는 절대 납작하지 않았거든요).
지금까지 한 이야기들은 결국 제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편을 조심스럽게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다행히 제작진은 웨딩 매거진에 관한 스토리라인을 없앤 것 같고, 에밀리는 LVMH 같은 기업에서 고위직으로 일하고 있으며(훨씬 더 그럴듯하죠), 미란다는 종이 매체의 종말(…)로 고전하고 있다네요. 지금까지 찍힌 촬영 현장 사진은 오픈 플랜 오피스에서 피비 파일로(Phoebe Philo) 시절의 셀린느를 보고 싶은 저의 기대를 채워주지는 않지만, 시리즈의 나머지 책들을 힘겹게 읽지 않고도 앤디를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입니다. 해변에서 빨리 책장을 넘겨가며 읽을 게 필요한 게 아니라면, 저는 <복수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다시 보지 않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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