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도 나를 돌봐줄 엄마가 필요해, 루이즈 부르주아
올가을은 루이즈 부르주아의 계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호암미술관과 국제갤러리에서 부르주아 개인전을 같은 기간에 함께 볼 수 있다니요! 부르주아는 말이 필요 없는 여성 미술가이자 거장이죠. 지난 세기부터 지금까지 매우 영향력 있고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기에, ‘예술가들의 예술가’로 불리기도 합니다. 2010년에 작고한 부르주아가 여전히 국경과 세기를 넘나들며 이토록 추앙받는 이유는 바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자적인 예술 세계 때문일 겁니다. 미술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작가 자신에게서 출발한 세계, 자신의 경험과 내면의 감정을 소재 및 주제 삼아 평생 조각하고 그려낸 수많은 작품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작가도 실제 “나는 이미지를 만드는 게 아니라 감정을 그린다”고 얘기하곤 했다죠.

호암미술관의 전시 <루이즈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Louise Bourgeois: The Evanescent and the Eternal)>이 한국에서 25년 만에 선보이는 대규모 회고전이자 대표작을 대대적으로 펼쳐 보이는 자리라면, 국제갤러리의 <Rocking to Infinity>는 작가의 보다 내밀한 고백과 사유를 만날 수 있는 전시입니다. 제목 ‘Rocking to Infinity’는 ‘무한히 달래다’, ‘무한히 어루만지다’로 의역할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전시 대표 이미지인, 엄마가 아기를 안은 모습을 그린 드로잉이 퍽 잘 어울립니다. 이는 부르주아가 생전에 쓴 문장에서 가져온 제목인데요. 호기심이 발동한 저는 이 문구가 포함된 작가의 글을 찾아보았습니다. ‘무한히 흔들리는 붉은 실. 절대 끊어지거나 버려지거나 잘리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실이 하나 있는데, 바로 당신이다.’ 작가가 평생 다룬 주제인 모성, 관계, 연결 등을 함축하는 이 표현은 비록 직접 드러나진 않지만 전시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매 전시마다 변모해온 국제갤러리 K3는 이번에 더더욱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났습니다. 3점의 조각과 수십 점의 드로잉이 붉은 실처럼 연결된 채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데요. 이런 배치법이 중립적인 화이트 큐브에 생동적인 몰입감을 더합니다. 이를테면 작가의 어시스턴트로 수십 년간 함께 일한 동료인 동시에 소울메이트였던 제리 고로보이와의 신뢰 관계를 손의 움직임으로 표현한 판화 드로잉 ’10 AM is When You Come to Me'(2006), 부르주아의 감정 세계가 24시간 동안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악보가 그려진 패브릭에 펼쳐놓은 작업 ‘Hours of the Day'(2006), 그리고 모성, 연인 등 작가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사유를 다채롭게 보여주는 추상 및 구상 드로잉 작품. 관계, 시간, 기억에 대한 작가의 다채로운 감정의 지도가 조화로운 리듬과 화성으로 직조된 음악이 되어 전시장에 울려 퍼집니다.
이토록 유려한 드로잉의 흐름에 방점을 찍는 건 조각의 몫입니다. 부르주아는 원래 조각가였고, 그래서 형식적으로 작가를 대표하는 작품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더욱 절묘하게 느껴진 건 조각이 각각의 드로잉이 이야기하는 바와 만나고 있기 때문인데요. 제리 고로보이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는 핑크색 대리석 조각으로 발현됩니다. 시간을 향한 부르주아의 성찰은 2개의 물줄기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물이 무한을 상징하는 8자를 그리며 만나는 형상의 추상 조각으로 이어지죠. 또 유무형의 다양한 관계에 대한 생각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뒤엉킨 채 천장에 매달린 은색 알루미늄 조각에 가닿습니다. 부르주아는 같은 주제를 다른 매체에 완벽하게 담아내며 같음과 다름의 미학을 만들어내는 솜씨를 발휘했습니다.

특히 저는 이 ‘The Couple’이라는 조각 아래 한참 서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여성의 뒤통수에서 나온 머리카락이 남성의 형상을 빚어낸 것 같기도 한데요. 그러므로 이 커플은 사랑의 속박을 견뎌낸 연인이기도, 탯줄로 연결된 부모와 자식이기도 합니다. “부르주아는 다양한 매체로 작업하면서, 지속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에 대한,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연결에 대한, 갈망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부르주아의 모든 예술적 유산을 관리하고 있는 이스턴 재단의 큐레이터 필립 라랏 스미스는 기자 간담회 중 이렇게 말하기도 했는데, 꽤 설득력이 있더군요. “그녀는 스스로를 엄마가 아니라 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들 내가 엄마처럼 뭔가 해주길 바라는데, 사실 나도 나를 돌봐줄 엄마가 필요해’라고 얘기하곤 했어요.”


부르주아가 만약 국제갤러리의 한옥 공간을 봤다면 분명히 무척 좋아했을 겁니다. 국제갤러리 K3가 붉은 실로 공간 전체를 둘러싼 것처럼 드라마틱하다면 한옥 전시장은 보다 고즈넉합니다. 여기에는 1994년에 처음 작업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만 공개된 커피 필터 드로잉이 걸려 있습니다. 동그란 커피 필터에 작가가 그린 구상, 추상 드로잉들이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부르주아는 작업을 할 때 손에 잡히는 어떤 종이든 활용했는데요. 더욱이 커피 필터라는 가사적인(Domestic) 재료는 여성과 집안일의 관계를 유희적으로 비판합니다. 시계를 닮은 커피 필터에 그린 드로잉들이 꿈틀거리고 움직이면서 말없이 내밀한 이야기를 건넵니다. 그러면서 부르주아라는 예술가를, 여성을, 그리고 그녀를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보도록 이끕니다.
부르주아는 스스로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미술을 하고 글을 쓴 전대미문의 여성 작가입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후대의 관객들이 절대 경험하지 못했을 고유하고 귀한 순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더운 기운이 잦아들고 선선한 바람이 불 때, 다시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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