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쾌하고 엄격한, 시모네 벨로티의 질 샌더
시모네 벨로티(Simone Bellotti)가 줌 미팅방에 접속했다. 작은 사무실에 앉아 있는 그의 뒤로 옷이 걸린 행어 여러 개가 보인다. “전부 제 옷입니다. 집엔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거든요!” 발리에서 몇 차례 인상적인 컬렉션을 선보이며 명성을 얻은 뒤, 이제 질 샌더 데뷔를 앞둔 디자이너는 사무실 행어에 걸린 옷에서 영감을 받을 때도 있다고 얘기했다. “사무실이 좁아 보이지만, 이 옷은 저를 자극하죠. 이 행어를 편집하고 또 편집하다 보면 새로운 언어가 탄생할지도 모릅니다.”

이탈리아 태생인 벨로티는 캐롤 크리스찬 포엘(Carol Christian Poell)과 A.F. 반더보스트(A.F. Vandevorst)에서 인턴십을 거친 뒤 지안프랑코 페레, 보테가 베네타, 돌체앤가바나에서 남성복 디자이너로 일했다. 2007년부터 2022년까지 15년간 구찌에서 실력을 갈고닦은 그는 발리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되었다. 질 샌더는 발리에서 네 차례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선보인 벨로티를 눈여겨봤고, 지난 3월 그를 브랜드 수장으로 임명했다. 20년 넘게 스포트라이트가 닿지 않는 곳에서 일한 그가 드디어 ‘메인 스테이지’에 오른 것이다.
‘덜어냄의 여왕(Queen of Less)’이라는 별명을 가진 질 샌더 여사가 창립한 질 샌더는 미니멀 스타일을 대표하는 브랜드다. 하지만 그녀가 은퇴한 후 브랜드를 맡은 디자이너들은 각자 조금 다른 분위기의 디자인을 선보였다. 라프 시몬스의 질 샌더는 꾸뛰르를 연상시켰고, 루크와 루시 마이어 듀오가 표현한 질 샌더는 ‘올드 셀린느’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시모네 벨로티는 엄격하면서도 특유의 ‘쿨함’을 잃지 않던 질 샌더의 디자인 정신을 계승할 적임자다. 그는 체계적이고 학구적인 자세를 늘 유지하지만, 몽상가 같은 기질도 지녔다. “질 샌더는 종종 ‘순수함(Pure)’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죠. 그 점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질 샌더란 패션 브랜드보다는 특정한 삶의 방식에 가깝거든요. 저 역시 질 샌더 여사처럼 순수함의 본질을 탐구하고 싶습니다.”

지난여름 시모네 벨로티가 첫 티저를 공개했다. ‘보훔 벨트(Bochum Welt)’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 잔루이지 디 코스탄초(Gianluigi Di Costanzo)가 작업한 곡을 담은 한정판 EP를 공개한 것(벨로티는 이 EP가 ‘솔드 아웃’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EP 발매와 함께 공개한 뮤직비디오 촬영지는 질 샌더의 고향 함부르크였다. 론칭 파티를 위해 함부르크를 직접 방문했던 벨로티는 그 경험이 브랜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함부르크는 품격이 넘쳐흐르는 클래식한 도시입니다. 어딘가 특이한 면도 있죠. 논쟁적인 동시에 산업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특히 강과 호수, 항구, 그리고 도시 전체의 조명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벨로티가 쌓아온 커리어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나는 그가 데뷔 컬렉션에 어떤 은근한 코드를 숨겨놓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발리의 2025 가을/겨울 컬렉션을 예로 들어보자. 쇼 초반부에 등장한 모델은 회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길이는 정확히 무릎에서 끊기고, 칼라는 목을 전부 가리는 고지식한 스타일의 드레스 말이다. 나는 모델이 내 앞을 지나가고 나서야 그 룩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드레스 뒷면이 그린 컬러 시어링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벨로티는 ‘어떤 은근한 코드’를 찾아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털어놓았다. “하우스에 처음 도착한 뒤부터 스스로에게 물었죠. ‘내가 뭘 더해야 ‘뉴 질 샌더’가 완성될까?’ 질 샌더는 늘 모든 것을 덜어내고, 사물의 본질만 보여주는 브랜드였기에 더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출근 첫날 있었던 일화를 공유했다. “팀원들이 간단한 스피치를 부탁했습니다. 엄청나게 긴장했죠.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쇼룸 한가운데 어색하게 서 있는데, 창 너머로 피아차 카스텔로(Piazza Castello)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때 힌트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경쾌하고 모던한 하우스 질 샌더의 이면에 어떤 엄격한 태도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그런 엄격함 말이에요.” 그는 데뷔 쇼를 선보일 장소로 같은 장소를 택했다. 피아차 카스텔로에서 8년 만에 열리는 패션쇼다.

경쾌함과 엄격함. 데뷔를 앞둔 벨로티의 무드보드에서도 상충하는 두 단어에 대한 레퍼런스를 찾아볼 수 있었다. 자동차 덮개를 활용해 완성한 리처드 프린스(Richard Prince)의 아트 피스, ‘후즈(Hoods)’는 통제를 상징한다. 벨로티가 질 샌더를 조사하던 중 발견한 사진가 듀오 스헬턴스 & 아베너스(Scheltens & Abbenes)의 매거진은 자유를 상징한다. 벨로티는 자신의 첫 컬렉션에서 질 샌더의 본질과도 같은 테일러링과 구조에 집중한 룩은 물론, 앞서 언급한 사진 두 장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룩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힌트를 흘렸다. “여기서는 최고 품질의 옷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것도 질 샌더만의 차별점이 될 수 있죠.”
질 샌더가 가장 사랑하는 단어가 ‘순수함’이었다면, 벨로티는 ‘솔직함’이다. 그는 패션계가 마주한 문제점으로 ‘초가시성’을 꼽았다. “우리는 정보 과잉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모든 걸 보고 들을 수 있으니, 대중은 궁금해할 이유가 없죠.” 그는 정보와 이미지를 과도하게 접하다 보면 결국 그것을 잊는 순간이 온다고 이야기하며, 이 같은 문제의 해결책으로 솔직함을 꼽았다. “옷은 진실해야 합니다. 비싼 제품은 한눈에 봐도 비싸다는 걸 알 수 있어야 하고요.”

벨로티는 발리 재직 시절 날렵한 실루엣의 보트 슈즈를 선보이며 한 차례 트렌드를 주도했다. 그의 질 샌더 데뷔 역시 매력적인 디자인의 신발로 가득하다. 페이턴트 레더 소재로 제작한 옥스퍼드 슈즈는 리처드 프린스의 작품이 연상되고, 크레이프 솔을 더한 데저트 부츠는 발리의 보트 슈즈 못지않은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최고 수준의 가죽 제품을 제작하는 브랜드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벨로티는 더블 페이스 레더 재킷과 코트를 설명하며 ‘최고급’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했다. “모두가 질 샌더에 대해 각자만의 생각을 갖고 있을 겁니다. 품질 좋은 옷을 찾는 사람이라면, 질 샌더 매장에 방문해도 후회는 없을 거라고 확신해요.”
질 샌더 2026 봄/여름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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