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는 지옥’ 대신 되뇌는 ‘적군의 언어’
서울에서 현대미술을 즐길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사뭇 달라졌다는 것을 요즘 새삼 느낍니다. 올해 프리즈 주간에는 유난히 유명 작가들의 전시가 많이 열렸지만, 특히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Adrián Villar Rojas)의 전시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반갑더군요. 아르헨티나-페루 작가인 비야르 로하스의 첫 번째 한국 개인전이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십 수년 전 샤르자 비엔날레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외곽까지 찾아가서 본 그의 작업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황폐한 땅, 버려진 건물 안에 놓인 벽돌 탑 사이사이 생명체가 자라나고 있었죠. 인류가 직면한 현재와 미래의 위기 속에서 다양한 생명체의 존재 풍경을 탐구해온 그의 시선은 나날이 복합적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 전시는 오픈 전부터 삼청동을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미술관 입구가 흙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죠.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전은 미술관 건물을 조각적 생태계로 전환하는 대규모 장소, 환경 특정적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깔끔하고 중립적인 미술관은 모두를 환대하는 공간이지만, 작가는 이곳을 매우 야생적이고 불완전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킵니다. 그 결과 미술관은 더 이상 보존의 장소가 아니라 비인간과 포스트 휴먼, 돌연변이 같은 존재가 마구 뒤섞인 예측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는 거죠. 게다가 이번 전시가 1995년 미술관 옛터에서 처음 열린 전시 <싹> 개최 30주년을 조용히 기념하고 있음을 떠올리면 그때와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인간의 세상과 비인간의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비교·대조할 수 있습니다.
지하에서 시작되는 전시는 전시장은 물론 복도, 계단, 화장실, 극장 등에서 전방위적으로 펼쳐집니다. 기존 미술관의 구조를 해체한다는 것은 관람객들의 경험까지 바꾸어놓는 일입니다. 게다가 작가는 물리적 구조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온도와 습도 등 감지할 수 있는 환경조차 변화시킵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놓인 흙, 불, 식물 등이 살 수 있는 곳이 된 거죠. 폐허가 된 공간을 걷다 보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근미래인지, 과거인지, 혹은 오래된 미래 풍경인지 헷갈립니다. 이 전시의 중심에 있는 ‘타임 엔진’은 비디오게임 엔진과 AI, 그리고 가상 세계를 결합한 일종의 디지털 시뮬레이션 도구입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생성된 가상 조각을 현실 세계에 물리적 형태로 구현하죠. 온갖 유기적, 무기적 재료가 한데 뒤섞인 이 복합체는 디스토피아 SF 영화에 등장할 법한 형상으로 보는 이들의 경계적 시간성을 흐립니다.


이번 전시 제목 ‘적군의 언어’는 작가의 형식적 시도와 개념의 실험을 모두 함축합니다. 오늘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작가의 말이 더 유효할 것 같아 가져와봅니다. “‘적군의 언어’는 의미 형성의 깊은 선 역사를 가리킨다.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상징체계를 홀로 발명한 존재가 아니다.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등 다른 인류와 함께 진화했고, 그들과의 만남은 적대적이면서도 친밀하고, 경쟁적이면서도 협력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오간 것은 도구, 몸짓, 불만이 아니라 상징적 사고와 의미 창조의 첫 불씨였다. 전시 제목은 바로 이러한 역설을 담고 있다. ‘적’이라는 완전한 타자성은 낯설고 위협적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한 거울이기도 했다.” (아트선재센터 홈페이지 중)
날마다 뉴스에서는 AI의 활약상을 다루고, AI를 잘 다루는 방법에 대한 강연이 속출하고 있으며, 부모들은 AI에 잠식되지 않을 ‘인간적인 직업’을 고민합니다. 현대미술이 인간 외의 존재에 대해 탐구해온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만, 비야르 로하스가 제시하는 언어들은 뇌리에, 그리고 피부에 더욱 강렬하게 박힙니다. 인류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지금처럼 치열했던 적이 있었을까요. 그가 제시하는 ‘행성적 규모’의 협업, 인간과 비인간의 조화는 과연 어떻게 현실이 될까요. 언젠가는 ‘인간성’의 정의 자체가 달라질 날이 오지 않을까요. 우리는 어떤 태도로 이 변화와 전이의 순간을 대해야 할까요. 머릿속이 이 전시장만큼이나 복잡해지는군요. 그 와중에 분명한 건, 바야흐로 ‘타자는 지옥’이라던 사르트르의 시대는 가고 ‘적군의 언어’를 배우고 익히는 비야르 로하스의 시대가 왔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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