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맨 케이브에 집착하는 남자들
*이 글은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쩔수가없다>의 주인공 만수(이병헌)의 취미는 ‘분재’다. 영화 속 인물이 가진 취미는 곧 그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치다. 만수는 어떤 식물이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일 수 있다. 또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더더욱 하루아침에 해고당한 처지를 견디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쩔수가없다>에서 취미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건, 취미를 위해 만들어놓은 공간이다. 5년 전 자신이 나고 자란 집을 구입해 개조했던 그는 사연 많은 창고를 개조해 온실을 만들었다. 그곳에는 각종 작업 도구와 분재 작품이 진열되어 있다. 나중에는 이곳에서 자신이 벌인 살인을 마무리한다. 말하자면 이 온실은 만수의 ‘맨 케이브(Man Cave)’다. 러닝타임 내내 다른 인물(아내 또는 아이들)이 이곳에 들어오는 장면이 없는 걸 보면, 이 가정에서도 온실은 오로지 만수를 위한 공간이라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는 듯 보인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이때 또 다른 남자들이 떠오를 것이다. 엄격한 규칙으로 자기만의 공간을 영위하던 남자들이 또 있었다.
영화 <아가씨>의 코우즈키 노리야키(조진웅)가 있다. 그에게는 거대한 서재가 있었다. 동서고금의 온갖 외설 서적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일에 집착하는 그에게 이곳은 전리품을 모아놓은 전시관이다. 입구 바로 앞에 뱀 형상이 있는데, 코우즈키의 허락을 받아야만 그 형상을 넘어설 수 있다. 이곳에서 코우즈키의 아내와 조카는 남자들의 음탕한 시선을 견디며 서적의 내용을 목소리와 동작으로 재현한다. 그처럼 코우즈키의 서재는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비뚤어진 욕망이 발현되는 곳이다. 코우즈키와 함께 영화 <헤어질 결심>의 기도수(유승목)를 떠올릴 수도 있다. 그의 맨 케이브는 무려 두 곳이다. 집에는 혼자 위스키를 즐기며 말러의 교향곡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당연히 아내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집 밖에는 남들이 쉽게 오르지 못하는 암벽이 있다. 기도수는 말러 교향곡 5번을 들으며 정상에 오른다. 그에게는 이 암벽도 다른 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자신만의 공간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그처럼 취미에 집착하고 취미를 위해 자신만의 공간까지 설계한 남자들은 모두 최악의 인간이었다. 이때 주인공은 그런 남자들이 통제하는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거나 그 세계를 무너뜨리곤 했다. <아가씨>의 숙희와 히데코는 코우즈키의 서재에서 마음껏 바닥을 뜯어내고 책을 찢어버렸다. <헤어질 결심>의 서래는 남편이 즐겨 찾는 암벽에 올라가 그를 밀어버렸다. 그러니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의 이전 작품에서 그렇게 무너뜨려야만 하는 대상이었던 인물의 시점을 따라가는 영화인 것이다. 물론 만수가 코우즈키나 기도수처럼 처음부터 악랄한 인간으로 나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과거 술에 취하면 아내와 아이를 학대했던 전력이 있었고,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면서 그녀의 속옷까지 뒤지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걸 보면 본질적으로는 비슷한 인간이다. 급기야 맥주-위스키 폭탄주를 들이켠 후 스스로 앓던 이를 뽑아버리며 폭주하기도 한다. 만수가 그렇게까지 되어버리는 이유는 표면적으로 ‘해고’지만, 사실은 자신의 맨 케이브가 망가질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마트에서 일하며 버티던 그는 집을 팔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살인을 계획한다. 가족과 함께 사는 공간을 잃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그의 아내는 집을 팔고 아파트로 가자고 했으니, 그건 아닌 듯 보인다. 분명 그는 자신이 오롯이 통제할 수 있는 세계의 붕괴 가능성에 공포를 느낀 것이다.
재미있게도 <어쩔수가없다>에서는 만수의 제거 대상들도 맨 케이브가 있다. 스스로를 아날로그 인간이라고 말하는 구범모(이성민)에게는 오래된 LP를 듣는 오디오 룸이 있다. 최선출(박희순)은 도시 외곽에 살고 싶지 않다는 아내와 별거까지 하면서 별장 같은 집을 지어놓고 사는 남자다. 만수는 그들과 각각 악몽과 로망을 공유한다. 구범모는 집에 다른 남자가 들어와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는 현장을 목격했다. 만수는 그런 구범모를 보며 아내 미리의 불륜을 근심한다. 최선출은 만수가 찾아오고 나서야 한 번도 쓰지 않았던 화롯대에 불을 피운다. 그리고 만수는 그들을 제거하고 나서야 불안을 잊는다. 재취업에 성공했고, 아내는 나와 함께하고 집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그의 온실도 예전처럼 오롯이 그의 공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수는 새로운 직장에서 또 다른 동굴과 마주한다. 모든 공정을 로봇이 맡고 있고 일하는 사람은 만수 혼자인 공장이다. 더 큰 맨 케이브를 갖게 된 셈이지만, 그의 표정은 공허하다. 언젠가 그는 이곳에서 제거당할 것이다. 그때는 온실도 잃게 될 것이다. 코우즈키와 기도수, 구범모, 최선출의 마지막이 그랬던 것처럼.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남성이 독점하던 공간은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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