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놓고 겉핥기로 했다
전문가의 영역은 여전히 공고하지만, 멀티 유니버스 시대다. 여러 분야를 두루 넓게 아는 즐거움이 깊음을 야기한다. 나는 대놓고 겉핥기로 했다.

“피처계의 패션 위크 기간입니다.” 지난 9월 3일 개막하는 프리즈 서울을 앞뒤로 꽉 찬 일정을 살피면서 편집장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숨은 뜻은 ‘제가 자리를 비워도 뭐라 하지 마세요’.
2022년 프리즈 서울 첫 회가 열린 해에는 미술 관계자가 아닌 이들도 “뭐든 해야 한다”는 압박에 이런저런 행사를 열었다. 프리즈 기간에는 하루씩 날을 정해 을지로, 삼청동, 한남동, 청담동에서 미술계 네트워킹을 위한 파티가 열리고 전시 개장 시간을 연장하는데, 이를 ‘동네 이름+나잇(Night)’이라 부른다. 삼청 나잇에 갔을 때다. 갤러리가 밀집한 곳이지만, 그보다 패션·뷰티·가구 브랜드의 자본이 빚은 파티로 일대가 들썩였다. 나야 고맙지. 그곳들을 퐁당퐁당 옮겨가며 뭔가 달라진 서울의 모습에 취했는데, 다른 이들도 비슷해 보였다.
프리즈를 4회째 치른 올해는 더 정제된, 남을 게 남았다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미술과 관계없는 행사는 거의 열리지 않았다. 갤러리와 미술관은 벼려둔 전시를 이때쯤 개막했고, 안토니 곰리, 김수자,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등 관련 작가도 줄지어 방한했기에 시간 단위로 스케줄링해 움직였다. 안토니 곰리가 그렇게 ‘스윗’하시다는데, 실물을 영접해야지. 8월 26일 화이트 큐브 서울에서 기자 간담회를 치른 그를 9월 1일 삼청동에서 다시 마주쳤다.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갈라 포라스-김의 전시 오프닝이 열리는 중이었다. 이 갤러리 카페에서 커피나 마실까 기웃거리던 인자한 대작가는 기자들로 바글거리는 장내에 흠칫 놀라 물러가셨다. 다음 날 한남 나잇 때는 페이스갤러리가 연 파티에 들렀다. 드레스 코드는 화이트. 나는 흰색 리넨 셔츠와 팬츠를 입고 이우환의 ‘바위’ 앞에 자리를 잡았다. 샴페인을 연거푸 마시며 소셜라이트라도 된 듯 모르는 이들과 대화를 섞었다. 원래 낯가리는 편인데, 분위기에 잘 취한다. 그게 문제다.
페이스갤러리에서 나와 불콰한 얼굴을 손으로 식히며 리움으로 향했다. 차를 끌고 온 후배는 미술관 주차장이 만석이라며 주변을 몇 바퀴째 돌고 있었다. 이틀 뒤 열리는 이불 작가의 개인전을 ‘VIP’에게 사전 공개하는 날이라 인파가 몰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VIP가 이렇게 많았나. 사실 누구에게든 ‘님’ 자를 붙이는 사회이기에 VIP라 불러 손해 볼 건 없지. 아까 페이스갤러리에서 본 이들 역시 리움으로 옮기는 듯했다. 흰색 옷의 무리가 우르르 언덕을 오르는 풍경은 좀 기묘했다.
북새통을 지나 미술관 위층의 프라이빗 디너 장소에 들어섰다. 100여 명의 인사가 긴 테이블에 빼곡히 앉았는데, 연령도 스타일도 다양했다. 좌석 배치도를 보니 가운데 테이블에는 이불 작가의 성장을 지켜본 예술계 인사와 작가들이 자리했다. 진심으로 축하하는 기운이 흘러 뭉클하기까지 했다. 내 자리는 그 구역과 꽤 멀었지만, 한밤의 미술관에서 이불 작가의 소감을 육성으로 듣는 자리에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말했다시피, 나는 분위기에 잘 취한다. 그리고 샴페인에도. 결국 마주 앉은 에디터 두 명에게 2차를 제안했다. 자고로 ‘더 마시고 싶다’ 할 때부터 취했음을 알았건만, 저질러버렸다. 우린 근처에 문을 연 야장을 찾아 생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잡지와 예술, 패션을 좋아하는 마음을 식히는 과도한 업무량과 그래도 직업에 애증이 있다는 다소 느끼한 고백을 섞어가며 우린 취해갔다. 다음 날 숙취 해소를 위해 라면을 끓이면서 ‘그래도 괜찮은 밤이었다’ 합리화했고, 전날과 비슷한 미술 널뛰기를 했다.
결국 삼청동 한가운데서 식은땀으로 등골이 축축했다. 삼청 나잇을 기념해 갤러리현대에서 주최하는 ‘굿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같은 날 야외 파티를 여는 국제갤러리의 큐레이터는 바비큐 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을 빠져나와 인도에 초점 없이 앉아 있었다. 지나가던 기자가 우리 얼굴을 보더니 비타민을 나눠주었다. 그녀와 악수하는 내 손이 흥건했다. 이러다 내가 굿을 당하겠다 싶어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우니 지인들의 인스타 스토리에 만신의 굿판이 올라왔다. 좀 더 참을걸 그랬나.
요 몇 년 사이 미술 관련 취재가 많아지면서 이 분야에 관심이 생겼다. 하나를 보니 둘이 궁금해지고, 아트 바젤과 비엔날레를 3년 연속 가니 연결점이 보여서 좀 신났다. ‘잘 모른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안달했다. 부족하다고 솔직히 인정하며 전문가를 따라다니고, 기자 간담회를 챙기고, 관련 책을 읽은 덕분에 최근 화제였던 전시는 “아, 그 작가요?” 하고 아는 체할 수 있었다. 그 ‘체’ 후엔 주로 듣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역시 다니는 만큼, 보고 듣는 만큼 내 것이 됐다. 그 굿판에도 갔어야···
일주일 전 미술계 인사들과 좌담을 가졌을 때, 나는 어느 대화에서 약간 충격을 받았다. “갤러리 대표로서 작가에 대한 인터뷰 요청이 반갑지만, 통찰력 있는 기획이 부족하다”는 일침이었다.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 해당 잡지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사화하는 능력 혹은 성의가 필요하달까. 대표는 곧 덧붙였다. “물론 쳐내야 할 기사가 많겠죠. 시간과 공력에 허덕이는 건 이해해요.” 표정을 보니 정말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도 나도 너무 바빠서 어떨 땐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을 테니까. 하지만 그날 밤 지난 인터뷰를 회상하면서, 전문적이지 못했을 내 수준에 회한이 느껴졌다. 나는 분위기와 샴페인에 잘 취하고, 남의 말에도 잘 펄럭인다. 새벽에 깨서 물 마시러 거실로 나왔는데, 가로로 쌓인 도록이 보였다. 언젠가 다시 펼쳐보려니 했는데, 이사 갈 때까지 저대로일 것 같다. 옆에는 미술 역사와 경매에 관한 서적이 쌓여 있다. 절반은 새 책이다. 읽은 내용도 가물가물하다. 노트북을 켜고 피곤할 것 같아 취소한 대구 갤러리의 기자 간담회를 다시 시청했다. 현장에서 보고 들어야 이해하기 쉽고 내 것이 된다며. 미술계 뒷얘기도 좀 듣고.
프리즈 서울이 끝나면 부산국제영화제가 온다. 매년 10월에 열렸으나 이번엔 추석 연휴로 9월 17일에 개막한다. 부산을 찾는 감독, 배우, 프로그래머의 리스트를 보면서 누구를 인터뷰할지 살폈다. 사나흘 만에 각종 스케줄(요즘엔 유튜브 채널 출연도)을 치고 빠지는 그들이기에 인터뷰 요청이 다 성사되진 않지만 ‘그래도’ 하는 마음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줄리엣 비노쉬, 그녀가 온다. 만나고 싶다. 그런데 만나고만 싶다. 이 멋진 여성에게 어울리는 질문을 할 수 있을까? 두렵다. 나는 분위기도 잘 타고, 남의 말에 잘 펄럭이고, 쉽게 위축된다.
그래도 <보그>에 어울리는 그녀에게 인터뷰 러브 레터를 보낸다. 그리고 다시 스크롤을 내리니 핫한 동남아시아 감독들이 눈에 띈다. 내가 그들의 전작을 봤던가? 몇 편 되지 않으니 한 번에 몰아서 보고 인터뷰하면 되지 않을까. 단독 말고 여럿을 만나야 할 것 같아 망설여진다. 다시 스크롤을 내린다. 대가의 이름이 등장한다. 더 위축된다. 영화제가 열리기까지 일주일 남았다. 지금부터 공부해도 그의 영화 세계를 숙지할 수 없다. 수천 번 인터뷰했을 그에게 어떤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그래도 인터뷰 요청서를 날린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다. 내 인생이 그래왔다. 일단, 덜컥, 어쩌지의 연속. 전문적이지 못한 나를 자책했다. 인생이 수박 겉 핥기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선배는 “한 분야의 전문 기자가 돼라”고 조언했다. 내가 잡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뒤섞인 ‘잡(雜)’이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패션지를 펼치면 이번 주 갈 곳, 입을 옷, 먹을 게 있었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글에서 위로받기도 했다. 잘난 척은 좀 해도 다정한 친구랄까. 선배는 “전문 기자가 롱런한다”며 “오디오든, 클래식이든, 영화든 뭐든 하나 죽자고 파. 근데 넌 뭘 좋아하니?”라고 물었다. 나는 “영화랑 한국 소설이랑, 아, 요즘 인디 밴드를 좀 듣는데요”라고 중언부언해 선배를 실망시켰다.
그렇게 ‘잡’스럽게 살아온 20여 년이 흘러 2025년 <보그> 사무실. 패션 에디터가 새로 나온 아이폰 에어를 모니터에 띄우며 감탄했다. “더 얇아졌어. 얇지만 깊고 진하고 묵직하지 않니?” 무슨 소리지. “얇은데 어떻게 깊어요”라고 말하려다 “패션 직군은 왜 다들 아이폰을 써요?” 물었다. “예쁘니까.”
그럴 줄 알았다. 아예 눈이 다른 생명체다. 미감에 전부를 거는 종족. 패션지에서 일하며 패션 전문가가 된 운 좋은 사람들. 그렇다면 나는? 거칠게 말하면, 패션지에서 패션·뷰티 이외의 것을 한다. 미술가를 인터뷰하고, 영화감독을 만나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소설가에게 원고를 청탁하고, <보그> 행사를 함께할 큐레이터를 찾는다. 나는 하나의 전문가가 될 수 없다. ‘잡’스러워야 하는 세계다. 수박 겉 핥기가 필수인.
미술 전문 저널리스트와 나눈 티타임. 미술계에 빠진 뒤 그녀에게 자주 조언을 구했다. 에르메스 메종 도산 지하에 자리한 카페 마당. 그녀는 커피가 나오기 전 옆에 있는 에르메스 아뜰리에에서 젊은 작가전을 보고 오자며 일어섰다. 하지만 오늘은 수요일, 휴관일이다. 무척 아쉬워했지만, 그녀는 목요일이든 금요일이든 수요일 빼고 다시 올 것이다. 카푸치노를 마시던 그녀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요즘은 오페라의 무대미술이 혁신적이래요. 지금 최고 핫한 무대 디자이너가 이 사람인데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한다. ‘이젠 내가 오페라 무대미술까지 알아야 해?’
알아야 할 것 같다. 알고 싶다. 집으로 돌아와 구글 이미지 검색에 그녀의 이름을 친다. 누군가를 처음 조사할 때, 우선 이미지 검색을 해서 그의 전체 분위기를 직관적으로 본다. 그녀는 허름한 티셔츠에 헝클어진 머리, 새로 유행할 ‘타이어드 걸’ 메이크업의 원조 같은 모습이었다. 수전 손택, 아니 조지아 오키프를 닮았다. 멋진 여자들은 닮나 보다. 나는 조사를 이어간다. 어제까지 미디어 아티스트가 언급한 ‘테크노 퓨처리즘’을 뒤적였는데, 오늘은 오페라다. 이 직업에서만큼은 겉핥기가 미덕이라며 자위한다. 나는 ‘잡’스럽기에 오페라 전문 기자가 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클린 걸 메이크업 후 타이어드 걸 메이크업이 오는데 말이죠···” 이건 농담이다.
모든 분야마다 전문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체력이 받쳐주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다. 물론 맞는데, 어떻게 다 전문적일 수 있겠는가. 내 임무는 수박 겉 핥기다. 넓게 더 넓게. 그러다 깊이 들어가고 싶은 무언가가 생기면 그때 뛰어드는 거다. 여러 방면을 넓게 핥아왔기에 그 분야를 더 매력적으로 기사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전문가의 시대는 늘 존재하겠지만, 멀티 유니버스 시대다. 요즘 창작자들을 인터뷰해보면 확실히 다양한 매체와 장르를 시도한다. 그렇게 한 사람 안에서 각 분야를 떠돌다가 우연히 만나 빅뱅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렇게 입신양명해 나와 재회하기도 한다. 그땐 호칭을 작가님으로 해야 하나, 선생님으로 해야 하나 헷갈리기도.
패션 선배는 결국 아이폰 에어를 살 것 같다. 나도 권했다. “선배, 저도 아이폰 에어가 얇고 얕기에 깊고 진한 것 같아요.” 내 건 통화 중 녹음 기능이 있는 갤럭시지만. VK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아티스트
- HERNAN B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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