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시대를 보는 새로운 시선 ‘태풍상사’
코스피는 연일 최고가를 경신하고 환율과 금값은 치솟는데 다른 쪽에서는 세계경제 버블 붕괴와 자산 시장 격변을 경고한다. 100명의 전문가가 100가지 다른 말을 한다. 한국 경제에 기회가 오고 있다는 진단과 25년째 한국을 떠도는 “제2의 IMF가 온다”는 괴담이 공존한다. 화폐가치 하락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지금이라도 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하고 싶은 충동과 그러다 잘못된 종목을 선택하거나 꼭지에서 메다꽂힐 수 있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기가 어렵다. 지금이 축제의 시간인지 비극의 서막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소박한 행복을 꿈꾸며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불안의 시대임이 확실하다. <태풍상사>(tvN)는 그런 이들에게 묘한 위안을 주는 드라마다.

<태풍상사>는 <SNL 코리아>를 패러디한 듯한 레트로 인터뷰로 시작한다. 배경은 1997년. 리포터는 을지로에 있는 작은 무역 회사 ‘태풍상사’를 방문한다. 고마진 과장, 차선택 차장, 배송중 대리 등 코믹한 이름, 반면에 진지한 배우들과 고급스러운 촬영은 이 드라마가 균형 잡힌 희비극이 될 것임을 예고한다. 직원들의 인터뷰는 희망과 낭만으로 가득하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봉급이 오르면 좋겠지만은, 그보다 우선은 나라가 잘되어야 회사가 잘되고, 또 회사가 살아야 내가 사는 거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지금으로선 믿기 어렵지만 평생 고용 신화가 무너지기 전 한국인에게 제법 흔했던 태도다. 1997년을 기억하는 시청자들이 슬픔을 예견할 때, 경리 오미선(김민하)이 드라마의 주제를 들려준다. “나라 경제가 어려울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는 거잖아요? 중요한 거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인 것 같거든요? 무엇이든 모두가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태풍상사 인터뷰를 “아시아의 용, 한강의 기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라고 마무리 지은 리포터는 압구정 클럽으로 이동한다. ‘무분별한 과소비로 부모가 이뤄놓은 부와 성공을 탕진하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오렌지족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강태풍(이준호)이 있다. 드라마는 강태풍이 당대의 유행 패션을 입고 춤추고 노는 장면을 통해 이준호의 재능을 알뜰하게 써먹는 한편으로, 한국 경제가 상승할 일만 남았다고 오롯이 낙관했던 마지막 시대의 향수를 자극한다.



주인공의 아버지이자 태풍상사 사장 강진영(성동일)은 허구한 날 클럽에서 놀다가 시비나 붙는 아들이 못마땅하다. 그런데 태풍은 아버지에게 반항하면서도 종종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주는 뜻밖의 효자다. 아버지가 반대하는 원예학과에 간 것도 진짜 꽃을 좋아하기 때문인 듯, 남몰래 신품종 장미를 연구하는 성실성을 보인다. 안타깝게도 이 부자는 화해하지 못한다.
드라마는 한국 경제의 몰락을 시청자들이 공감하기 쉬운 개인의 불행으로 몽타주한다. 오미선의 동생은 승무원 시험 3차 통과했다고, 이제 자기가 언니 뒷바라지해서 대학에 보내줄 차례라고 호언하지만 채용 계획이 취소되었다는 통보를 받는다. 태풍의 친구 한 명은 집안이 망해서 야반도주를 한다. 다른 친구의 어머니는 다니던 은행에서 해고를 당한다. 태풍의 아버지는 직원들에게 거래처의 어음이 부도나서 월급을 늦게 줄 거라 통보한다. 직원들은 “요즘 다른 회사도 다 그렇더라”고 서운함을 감춘다. 그 직후 태풍의 아버지가 쓰러진다. 그가 영안실로 실려가는 순간 뉴스에서는 한국이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X세대 이상 연배의 한국인에게는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고통스러운 장면들이다. 그런데 드라마는 여기에 사람의 온기를 더한다.


미선의 동생은 주저앉아 좌절하는 대신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미선은 불평하는 대신 계속 가정을 건사하기로 한다. 태풍은 야반도주하는 친구에게 손목시계를 풀어준다. 태풍상사 직원들은 평소 자신의 어려운 형편을 물심양면으로 살피던 사장이 쓰러지자 진심으로 그를 걱정한다. 태풍은 죽은 아버지가 남긴 메시지를 발견하고 오열한다. “결과보다 중요한 건 사람이다. 우리 길이 꽃보다 더 향기롭고 돈보다 더 가치 있다.”
그 시기 한국인은 사회의 가치관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것을 체감했다. 사람들은 돈에 대한 숭배, 집착, 강박을 수치스러워하지 않게 되었고, 언제고 하루아침에 경제가 다시 무너질 수 있으며 그때의 생존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라는 공포, 나아가 능력주의의 환상에 사로잡혔다. “제2의 IMF가 온다”는 말은 유령처럼 늘 거리에 떠돌았다. 현대 한국 사회에 깊은 후유증을 남긴 사건이지만 경제 얘기를 극적으로 구성하기가 까다로운 탓에 이를 정면으로 다룬 콘텐츠는 많지 않다. 그런데 <태풍상사> 초반은 전쟁, 침략, 독재 등을 이야기할 때 자주 활용되는 민중의 극복기라는 형식으로 그 시대에 접근한다. “나는 항상 알려주고 싶었단다. 네가 직접 부딪히고 이겨내서 얻어지는 것들만이 네 것이라 부를 수가 있다는 걸”이라는 강진영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경제 붕괴의 시련뿐 아니라 그것을 극복한 역사가 있으며, 그 경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허를 찌르는 교훈을 안겨준다. 노동 소득의 평가절하 앞에서 조급하던 마음도 잠시 진정된다. 제작진은 여기에 샐러리맨 성공담의 긴장과 희열, 복수극, 로맨스, 유머를 가미해 풍성한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강태풍은 저 버블 시대의 상징 같던 장미 가꾸기를 접어두고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태풍상사’에 취직한다. 뛰어난 암기력과 계산 능력, 신중한 성격을 가진 오미선이 그를 돕는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도련님처럼 살았지만 눈치와 순간 판단력이 뛰어난 태풍은 첫 외근에서부터 회사를 함정에서 구해낸다. 하지만 사방에서 쏟아지는 빚 독촉, 재고 처리 등 위기는 계속된다. 해사하고 트렌디한 느낌이 있는 이준호와 탈정형화되고 무게감 있는 배우 김민하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조합이지만 각자의 배역에 꼭 맞아떨어지면서 신선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강태풍 부자와 여러 가지로 얽혀 있는 거래처 사장 표박호는 작품에 미스터리와 스릴을 드리운다. 힘 빼고 툭툭 던지는 듯한 말투로 굉장한 위압감을 주는 김상호의 연기가 표박호의 존재감을 강력하게 만든다.

혹독한 겨울과 기근을 겪어본 사람은 풍요의 계절에도 안심할 수가 없다. <태풍상사>는 저 어두운 시대를 새로운 시선으로 조망함으로써 그 시대가 우리에게 심어준 불안의 습성을 잠시 누그러뜨린다. 열정 가득한 초보 상사 맨 강태풍의 성장에 응원을 보내고 위로를 받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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